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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살후 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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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튀스 더 스피노자 (Benedictus de Spinoza, 1632년 11월 25일 - 1677년 2월 21일)는 암스테르담 태생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실 ‘사과나무’라는 말만 빼면, 그 말은 17세기 이전부터 알려진, 아주 오래 된 지혜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아니라 누가 했든, 그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개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면, 오늘 “먹고 죽자!” 할 사람이 많습니다. 지구까지는 몰라도, 개인의 삶에 위기가 닥쳤다고 해도, 자포자기하고 말 사람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If I fought wild beasts in Ephesus for merely human reasons, what have I gained? If the dead are not raised, "Let us eat and drink, for tomorrow we die."
고전 15:32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면, 밥을 주지 말라!”
어디서 들어 본 말입니까?
공산주의자의 선동 같은 말입니다. 무서운 말이지요.
놀랍게도 이것은 성경말씀입니다.

나는 중학교 때 이 말씀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때의 무서움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구나! 나는 이 말씀을 정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당장 내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해를 피합시다. 이것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직장이 없거나, 몸에 장애가 생겨서 부득이하게 일을 할 수가 없거나 한 사람들을 겨냥한 말은 아닙니다.

게으른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니, 그 준비를 하며 살라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을 읽고 “핑계거리”로 삼는 모든 부정적인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제2차 전도 여행중이던 A.D. 51-53년경, 바울이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기록 연대는, 바울이 고린도에 있었을 때 갈리오 총독의 법정에 끌려갔다는 사실에서 그 정확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행 18:12-17). 본서의 저작 연대를 A.D.51-53년으로 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후서는 최초의 바울 서신이며, 신약 성경 중에 최초의 기록입니다.

사람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세상사람 누구나 다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도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진 것은, 우리의 삶에 ‘일상성’ 그리고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결정적인 믿음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다면, 상황에 따라 흔들립니다. 일정한 모습은 없어집니다. 어차피 죽으면 “끝”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죽음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불신자들도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항상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안이숙 사모님의 찬송시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주옵소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른 삶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는 “부활과 재림”입니다.
그렇게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냈더니, 부활의 신앙에 소망이 생겼고, 재림의 신앙에 믿음을 더욱 굳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문제도 생겼습니다. 그냥 놀고먹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내일 주님께서 오실 텐데 일은 무슨 일이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 번째 편지, 곧 <데살로니가후서>를 쓴 것입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온 ‘오해’를 시정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1장을 요약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인내와 믿음      이 뛰어납니다. 자랑할 만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      니다.

2장 1-4절을 요약, 정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에 대하여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      다.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탄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2장 13-17절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여러분을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으로써 우리를 부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굳게 서서 우리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행동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      기를 원합니다.

이어서 3장입니다.
      “게으르게 행하고 가르침을 거역하는 모든 형제들”(살후 3:6)에게서 떠나십시오. 그들      은 무질서하게 행동하며, 음식을 값없이 먹으며, 수고하지 않습니다. 나는 스스로 일하      는 사람이며, 음식 값을 지불하며, 다른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먹을 권리가 있지만, 본을 보이기 위      함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도 게을러서 일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형제들에게 권면합니다: “묵묵      히 자기 일을 하며, 자기 양식을 먹으라!” 그런데도 계속해서 순종하지 않거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십시오. 그러나 ‘원수’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십시      오(살후 3:15).

그러니까, 일하지 않는다고 밥을 굶기는 것은 너무한 일이겠습니다. 일을 하면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직장을 소개해 준다거나, 일거리를 직접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미국의 외삼촌에게서 초청장이 온 것은 1977년이었습니다. 정작 비자가 나온 것은 1985년이니까, 꼭 8년 걸렸습니다. 오늘내일 하던 것이 8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1977년은 내가 고3 때였습니다. 나는 그 초청장 받은 이후 11년 만에 미국에 입국했습니다. 형제초청이었으므로, 어머니가 당시 19세 미만이었던 막내와 함께 미국에 들어오시고, 나머지 자녀들을 재초청해야 했던 것입니다.

대입을 준비하던 고3 때, 긴장이 풀렸습니다. 대학 다닐 때도 몇 번인가 교수들에게 물었습니다. “졸업하고 갈까요, 바로 갈까요?” 비자를 손에 쥔 것처럼 물었습니다. 교수들은 “여기서 뭘 배울게 있다고 머뭇거리냐? 웬만하면 그냥 가라”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와 대학 때 공부를 제대로 못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군대 생활할 때도, “제대하기 전에 미국 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같이 훈련 뛰면서도 다른 동료 병사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잘 있으시오. 나는 갑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11년은 어떤 의미에서 공중에 뜬 세월이었습니다.

초청장이 왔을 때 아래 세 명의 동생들은 초-중-고에 걸쳐 있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내일 미국 갈 텐데 무슨 공부냐?” “공부를 처음부터 새로 해야 한다더라.” 그랬습니다. 미국 간다고 해서 공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미국 비자가 여러 아이들 공부를 망쳤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1990년대 초반, 소위 “재림신앙”이 미주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구약 4천년, 신약 2천년, 그래서 6천년이 지났으니, 이제 안식천년, 즉 “천년왕국”의 때가 임했다는 세대주의적 발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흔들렸’습니다. 직장을 그만 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학교공부도 그만두고 기도원에 가서 사는 젊은이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조금 더 극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인생은 9회 말 투 아웃부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소위 “막판 뒤집기”가 있습니다. 위기에서 위기로 치닫다가, 마지막 순간에 상황을 뒤집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언제 나옵니까?
‘요행수’가 아닙니다.
평소에 하던 식으로 하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평소에 하던 식’이란 ‘본래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연스러움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을 때, 십자가의 강도 한 사람이 그 자연스러움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One of the criminals who hung there hurled insults at him: "Aren't you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But the other criminal rebuked him. "Don't you fear God," he said, "since you are under the same sentence?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We are punished justly, for we are getting what our deeds deserve. But this man has done nothing wrong."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Then he said,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눅 23:49-43

이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게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 그는 성령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알아보았습니다.

[개역](고전2: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NIV](1co2:10)but God has revealed it to us by his Spirit. The Spirit searches all things, even the deep things of God.
[개역](고전2:11)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NIV](1co2:11)For who among men knows the thoughts of a man except the man's spirit within him? In the same way no one knows the thoughts of God except the Spirit of God.
고전 2:10-11

2. 그는 성령으로써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고전 12:3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한 강도가 보여준 막판 회개는 그의 결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막판 뒤집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은 재림을 핑계 삼아 저들의 게으름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때는 사도바울의 선교 초기입니다. 교회가 여기저기 서기 시작했지만, 신학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때로부터 시대는 2천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런 현상이 그대로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어떤 핑계라도 댑니다. 거룩한 핑계라도 댑니다. 즉 “재림이라도” 핑계거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때는 이 세상의 모든 질서가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왕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이라고 ‘특별히’ 달라져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 생활하던 방식으로 가야 합니다.
‘항상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삶은 ‘부지런’하고 ‘생산적’입니다.

지난 주중에 어떤 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교회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제 곧 파킹장과 교육관 공사가 있을 예정인데, 그때 모두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 생각 때문에 교회의 화단정리를 미루어왔습니다.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3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주인 없는 집처럼’ 그렇게 잡초가 우거진 화단이었고 정원이었습니다.

잔디밭만 해도 그렇습니다. 잡초가 많습니다. 쪼그려 앉아서 민들레를 뽑다가, “이거 공사하면 소용이 없는데!” 하면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민들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설계사무소에 들렀더니 앞으로 짧아야 2개월 후에야 첫 삽을 뜰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때가 오더라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안 정리도 그렇습니다. 곧 이사 간다고 생각하면 청소도 잘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병폐가 생깁니다. 먼지가 끼고, 그래서 탁한 공기를 마셔야 합니다.
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가구와 옷가지 때문에 마음이 맑지 않습니다.
이사를 갈 때 가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국을 떠나 한국이나 타 지역으로 떠나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대개는 마지막 주일까지 교회에 나왔을 뿐 아니라, 디자인이나 그 밖의 봉사를 마지막 순간까지 했습니다. 마치 앞으로도 10년은 더 교회 나올 것처럼 하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싫어합니다. 공부 좋아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핑계를 대는 데 비상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부모가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큰 병에 걸렸을 때, 그래서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어차피 죽을 텐데,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사람은 ‘자살적인 충동’으로 살아갑니다.
죽음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2.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자매가 목회자를 찾아왔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죽어도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상의하러 온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 와서 잔디를 깎고 일 좀 해 주세요. 섬기는 일에 손이 필요합니다.” 그 자매는 교회에서 할 일을 발견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교회로 오십시오. 그리고 물어주십시오. “목사님. 사모님. 제가 할 일이 없을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1. 교회는 할 일이 쌓여있습니다. 2.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문제 자체가 사라집니다. 3. 그리고 ‘여유’를 회복할 수가 있게 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의 때, 오히려 주님과 함께 천천히 걷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참된 모습은 이런 ‘위기’의 때 드러납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하루하루는 늘 ‘위기’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사람들입니다.
놀고먹는 사람들!
눈총을 주는 사람들은, “오뉴월 DOG 팔자야!” 하면서 비아냥거리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놀고먹는 그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세상에 눈칫밥처럼 맛없는 밥이 또 있습니까?

그러니까, ‘재림’을 빙자해서 놀고먹는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계속 조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조장된 위기가 ‘병’이라면 병에서 낫지 않으려는 이상한 충동까지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경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환자는 환자인데 ‘낫지 않으려는’ 환자입니다. 의사나 약품이 도울 수가 없습니다. “뮌하우젠”이라는 정신병입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식까지도 고통에 머물게 함으로써 동정을 유발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림” 때문에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핑계 삼아 놀고먹는 행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지적한 것입니다.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은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그런 법(法)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질병이 찾아와도, 그것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되지를 않습니다.
지식이 부족해도, 그것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절망’이나 ‘위기’가 왔을 때, 당황하고 허둥대는 사람은 ‘훈련미숙’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평소처럼 기도하고, 그렇게 성경 읽고, 평상심을 잃지 않으면, 위기는 지나갑니다!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사방이 막혀 있을 때, 그럴 때도 허둥대지 않고 하던 일 계속 할 수 있는 ‘여유’와 ‘자연스러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이제부터 그것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영으로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회복된 사람은,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일보에 칼럼을 쓰던 때 일입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위기에 닥쳤을 때, 그 때는 큰 일을 생각하지 말라. 작은 일에 몰두하라. 화분에 물을 주거나, 청소를 하라. 찌개를 끓이고, 식구들과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하라. 큰 일이 닥쳤을 때 오히려 작은 일을 하라.

다른 주에 산다는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기는 말기 암 환자로, 앞으로 두 달 정도 생명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힘들어 절망하다가 이 칼럼을 읽고, 소망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전화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칼럼의 제목은 “위기의 때는 작은 일을!”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인생의 마지막을 사는 사람에게 소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 말라!”입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일하라. 그러면 식욕이 돋우어질 것이다.
      일을 찾아 구하라. 그러면 삶의 의미가 생길 것이다.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성경읽기입니다.
그것이 시시해 보일 때, 그때가 정말 위기입니다. 큰일이 난 것입니다.
정말 위기여서 큰 일 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기도가 생각조차 나지 않으니까 위기입니다.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정말 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봉사입니다.
성전에 와서 청소하고, 민들레 뽑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문제가 해결됩니다. 자동차 타고 와서, 주중에라도 언제나 풀 뽑고 가십시오. 가까운 꽃집에서 꽃 한 포기 사다가 정원 한 구석에 심어놓고 가십시오. 저도 모르게 무슨 희망이 꿈틀거리고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은 마귀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마귀는 속삭입니다.
큰 거 한 방이어야 해. 그래야 뒤집기를 할 수 있어!

이게 도박의 심리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잃은 것 다 갚고, 막판 뒤집기를 하겠다는 계획.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은 골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뒤집기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평소에” 훈련을 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9회 말 투 아웃이 되었어도 평상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잘 하던 사람이 위기 때 강합니다.
평소에 항상성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위기의 때도 극복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항상성”과 함께 갑니다.

기억하십니까?

항상 기뻐하라
Be joyful always;
쉬지 말고 기도하라
pray continually;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살전 5:16-19

같은 막판 뒤집기인데,
      하나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항상성’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를 의지하는 ‘도박’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다릅니까?

재림의 핑계를 대는 사람은 어떤 핑계도 댈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다른 핑계를 대는 데 익숙한 사람은 재림 같은 거룩한 말씀도 핑계거리도 삼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냐, 마귀의 속삭임이냐?
굉장히 얇은 차이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나이가 많습니까?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지금 9회 말 투아웃 상황입니까?
“이미 버린 몸”이라는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심정입니까? 너는 이미 버린 몸이다! 그 말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때다! 나에게 구하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고후 6:2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할 일을 하는 자세입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사과는 몇 년이 지나야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단 하루만 살아도 악몽(惡夢)입니다.
소망으로 살면 단 하루에도 천국의 은혜입니다. 

지구의 종말은 예수님의 재림보다 먼저 올 수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주님께서 택한 성도들을 데리고 올라가신 다음에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지구의 종말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만 우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십시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이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희들과 함께하옵소서.
위기의 때 오히려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게 하시옵소서.
주님과 늘 함께 동행 하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천국 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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