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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마음 (마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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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마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I. 본문의 배경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하신 일이 세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삼중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첫째는 천국 복음을 설교하신 일이었고, 둘째는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신 것이었고, 셋째는 병든 자들을 치료하심으로 섬기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하신 사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일하셨고 그렇게 섬겨야 할 불쌍한 백성들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불러 권능을 주심으로 사도를 삼으셔서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일을 함께 하게 하시고, 또 당신이 승천하신 후에 그 일을 뒤잇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II. 사도 파송의 동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 9:37-38). 사도에게 주셨던 이 당부는 오늘 우리를 향하신 부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세상의 고통 하는 자들을 향해 흘러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이처럼 간곡히 당부하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세상으로 파송하신 예수님의 그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A.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

예수님께서 고생하고 유리하는 백성들을 보실 때, 그것은 마치 목자가 없는 양들의 처지와 같았습니다. 원래 양은 사람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창조된 동물입니다. 자기를 보호하거나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신체적인 강점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양순하지만 어리석은 짐승의 대명사가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수가 아무리 많다할지라도 그들을 지키는 목자가 없다면, 그 처지는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을 이끄시기 위해 자기의 일군들을 세우셨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양떼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좇아 그들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셨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여기서 “보시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희랍어로 ‘이돈(ivdw.n)’입니다. 이 단어는 단지 육신의 눈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의 배후를 직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가난, 그리고 영적인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양떼들의 처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때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니” 이 단어는 희랍어로 “에스플랑크니쉬데(evsplagcni,sqh)”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직역하자면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우리 문화의 맥락에 맞게 번역한다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셨으니”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을 바라보셨을 때, 이런 큰 고통을 마음에 느끼셨습니다. 겉으로는 별일 없는 것처럼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직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고통으로 마음의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그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되었는지, 또 왜 그들이 유리하며 고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그렇게 버림받은 내팽겨 쳐진 목자 없는 양 같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아 줄 진실한 지도자를 갈망하였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정직한 설교를 듣고 영혼의 해갈을 얻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버림받았던 그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구름 떼처럼 모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런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천한 종의 신분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서 고난의 길을 가시며 섬기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은 지금 우리 안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마음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주님의 것에 합치시키며 주님이 지금 여기에 살아계셨더라면 사랑하고 섬기셨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의 가장 큰 축복은 이런 마음을 온 성도들이 품는 것입니다. 부패한 신자의 마음 안에는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결한 신자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향한 눈물 고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쌍한 영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기에 바로 하나님이 계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갈망 안에 고통 하는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진리의 말씀,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키시는 성령의 역사, 그리고 연약한 나를 섬겨주는 사랑하는 지체들의 봉사,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사랑을 품고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슬픔이 많이 이 세상 사람들에 그 눈물을 씻어주고 고통 하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B. 목자 없는 양같이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토록 담대하고 용감하신 하나님이 가장 약한 자가 되어 가슴을 쓸어안고 마음으로 우시는 이 모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에서는 섬겨야 할 영혼의 상태에 대해 “고생하며(evskulme,noi)”와 “유리하며(evrrimme,noi)”로 적고 있는데, “에스퀼메노이(evskulme,noi)”는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 괴롬을 주다, 고통스럽게 하다, 귀찮게 하다”의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스퀼로(sku,llw)”의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또한 “에림메노이(evrrimme,noi)”는 “내던지다, 팽개치다”의 뜻을 가진 동사 “맆토(r`i,ptw)”의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불쌍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실린 “고생하며, 유리하며”라는 이 두 동사는 모두 희랍어에서 수동태 완료 분사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이었지만,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눈에는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양떼들이었으며, 누군가에 의해 내동댕이쳐져서 외롭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고통을 당하며 스스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내팽겨 쳐진 상태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고 도전해 오는 영적인 세력들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그들은 영적인 세력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며 또 병든 육신과 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적인 권능을 주셔서 세상으로 파송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셨던 사람들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영혼의 곤고함이나 또는 육신의 병들고 약함 중 어느 한 부분 때문에 가슴 아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총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들이 비참하게 된 원인보다는 결과에 관심을 갖게 하십니다. 그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게 된 것이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이었는지, 또 그들 자신의 책임이었는지에 대한 시비의 판단보다는 그들의 고통 받고 있는 상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이 사랑을 주셔서 이후로 우리 모두가 어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고통 하는 사람들을 섬기며 그들 속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참으로 많은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도 있었고, 성경을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율법사들, 그리고 경건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늘 안식일과 절기로 모이고, 회당에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유리하고 고생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종교의 번영과 사람들의 행복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의 이 마음을 품고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고생하고 유리하는 많은 영혼들의 수도 줄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 세상의 특징은 어리석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 없이 어리석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양과 같았습니다. 피리를 불면서 지팡이로 자신들의 길을 인도해 주며, 막대기로 원수들을 무찔러주는 선한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저들에게는 언제나 고통만이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자신의 소견대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목자의 품을 떠난 양의 결국은 사나운 맹수의 밥이 되든지 험준한 낭떠러지에서 방황하는 비참함입니다. 스스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목자 없이 살아가고, 그래서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 언제나 단수로 말합니다. 그분이 원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지키고 신앙으로 사는 이 교회 생활이 한없이 버겁고 힘들게 느껴지십니까? 세상으로 나가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유리하고 고생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도 봅니다. “유리하며 고생한다.”는 말은 수동태 완료형 분사로 되어있습니다. 스스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당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가려는 사람들, 주님의 십자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복음의 대한 기대도 없이 살아가려는 이 세상 사람들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은 아무리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고통하고 있으며,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영혼의 목마른 부르짖음과 외침을 세상에 있는 물질과 명예와 권력과 같은 헛된 것들로 누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갈망을 끊임없이 포기하고 억누르며 자기를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벼랑 끝에 선 인생의 절박한 순간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일생동안 붙들고 살아왔던 자신의 생각과 꿈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믿었던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며, 목숨처럼 자기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 떠나가고, 그 많았던 재물과 높은 명예와 건강이 사라져 버릴 때 여러분들이 다다른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세상에는 자신의 인생을 도울 자가 아무도 없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도 이 깊음에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자신은 그야말로 목자 없는 양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수많은 고통에는 그 이유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원인은 한도 끝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제 아무리 다양해도 그 고통 하는 세상을 향한 유일한 응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참된 해답이 없습니다.

III.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오늘날 이 세상은 이런 마음을 가진 교회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분주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위하여 일한다할지라도 우리 안에 이 마음이 없다면 참으로 예수께서 하신 그 일을 뒤이을 수 없습니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는 위대한 능력도 필요하지만 주님의 이 마음을 품고 부흥이 오지 않는 날에도 심령을 다해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러므로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섬길 수 있도록 끊임없는 영혼의 부흥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만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만큼만 참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사람이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부패한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하려는 부패한 경향성과 싸우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진리의 빛이 우리들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주고, 성령의 감화로 끊임없이 참회하며 하나님 사랑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시대의 백성들을 보며 찢어지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섬기고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섬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며,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그들로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사역은 전인적인 사역이었다는 것을 유념하십시오.

A. 육체를 섬기심

첫째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것은 그들의 육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자가 육신의 질병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후자는 육신과 마음의 홀로 설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그들을 고치는 방식은 오직 신유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똑같이 그런 영적인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보여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하는 백성들을 섬겨 그들의 육체를 보살펴 주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와 능력으로 고치셨으며,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적인 능력과 더불어 기름도 부어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장애를 입고 자신의 몸이 일평생 인생을 살아가는 데 부담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실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으신 분이니 지금 우리 가운데 오신다할지라도 똑같이 민망히 여기시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병든 사람들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희생과 섬김은 우리가 그들에게 자랑스럽게 베풀어 주는 후의(厚意)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이행해야 할 우리의 즐거운 의무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한 지체로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섬김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면 그 악을 행한 사람이 받는 해보다 더 큰 해를 우리 영혼이 입게 됩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며 섬기면 그들이 받는 유익보다 더 큰 덕을 우리 영혼이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통 하는 사람들을 향한 모든 섬김은 그들을 휘돌아 자신의 영혼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렇게 돌려주시는 유익입니다. 그러므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진정을 기울이십시오. 특별히 장애를 가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자주 다가가고,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있는 다름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 많이 생각하며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원이 그들을 향해 흘려보내고 고통과 슬픔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우리는 유리하고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시던 예수님의 섬김의 뒤를 잇게 되는 것입니다.

B. 영혼을 섬기심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아파하셨던 것은 단지 육신의 형편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 배후에서 그들을 고통하게 만드는 수많은 영적인 세력들을 보셨고, 무지와 어둠 속에서 곤고해진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고 먹을 것만을 나누어주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으로 전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함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지 속에서 영혼은 짓눌리고 고통당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자유로운 영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일을 뒤이어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복음에 대해서 듣지 못하였기에 영혼이 유리하고 고생하면서도 고통의 원인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복음을 그들에게 증거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창조의 목적을 따라 기쁨 속에서 찬송하며 살아가도록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며, 이 땅, 내 조국, 어둡고 후미진 골목과 동네를 누비며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어찌 참일 수 있겠습니까?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존 오웬(John Owen) 목사님은 목회의 핵심을 “회심하게 하고, 회심한 것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어찌하면, 그들이 변화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땀과 눈물과 피로 섬길 수 있을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그들에게 끊임없이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아울러 그들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참회하며 그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고통의 이유가 아무리 다양해도,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촌에 사는 혹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가난하거나 혹은 부요한 사람들, 지위가 낮거나 높은 사람들, 모든 사람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주일을 살다가 남모를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안고 지금 여기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여러분 각자의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여러분들의 그러한 영적인 상태를 위해 슬퍼하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보듬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온전히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는 일 외에는 고통에 대한 참된 해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하고 가르쳐 주는 이 없이 어떻게 저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이시면 얼마나 행복해 질 수 있을지, 그리고 목자이신 주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목자 없이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목자 잃은 양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사람들, 예수가 누구인지 바로 가르쳐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목자 되신 주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참된 목자가 누구인지 가르쳐 줄 수밖에 없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믿은 우리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해야 합니다. “고통 하는 네 영혼을 바라보며 그대보다 더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시며 민망히 여기시는 분이 계시니 그 그리스도의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깊이 깨달아야 할 사명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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