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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 부활의 승리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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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하나님이 재우시고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시는 사건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할머니와 설교를 잘못하는 목사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영감이 없습니다. 설교 못하는 목사님도 영감이 없어서 못합니다. 영감은 영적 능력입니다. 영감이 없어서 설교를 잘 못하면 교인들은 졸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설교하다가 조는 교인들이 늘 눈에 거슬립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청년한명이 늘 꾸벅 꾸벅 조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것이 거슬렸습니다. 옆에 있는 집사님에게 깨우라고 눈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늘 집사님이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날따라 또 깨우려니 신경질이 나는 것입니다. 역정을 내면서 “목사님은 참 이상해 잠은 자기가 재워놓고 왜 나보고 깨우래!” 라고 하면서 깨웠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활은 그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재워 주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를 깨워주십니다.

재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을 하십니다. 천사들과 또 나팔소리를 앞세워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을 깨우시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도 신령하고 불멸의 몸으로, 변화된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이 없다면 인간은 제일 비참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사시지 않으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고, 너희의 모든 기대도 헛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이 생애에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근본은 예수님의 부활의 토대위에 서있습니다. 기독교는 곧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말한들 그 무덤에는 시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자나 맹자나 마호매트는 그들의 무덤을 자랑합니다. 그 무덤 속에 그들은 갇혀져 있습니다.

제일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미래가 없고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눈앞에 현실의 이익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제일 비참한 사람입니다. 장자옥 교수가 쓴 ‘마지막 남은 생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소개됩니다. 군 형무소에 두명의 사형수가 수감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총기로 민간인을 쏘아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되고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또 한사람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자기 동료와 사사로운 일로 다툼을 하다가 동료를 죽이고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사형집행일이 다가 왔습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당신 죽기 전에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나는 고기한번 마음껏 먹고 죽고 싶습니다.” 그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족이 없습니다. 사식을 넣어줄 사람도 없고 영치금을 넣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누군가가 알려주었습니다. “당신 몸을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기증하고 돈을 받으면 됩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병원에 기증하기로 하고 선금 1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10만원으로 고기를 사다가 마음껏 먹었는데 3만원치 먹으니까 더 이상 먹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앞사람이 물었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맛있습니까?” “맛있기는 뭐가 맛있냐고 내 몸을 팔아서 먹는 고기인데 뭐가 맛있겠냐?”고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형장에 걸어 나갔다고 합니다. 또 한사람의 사형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끔 교회에 나갑니다. 형무소 안에 있는 교회 예배에 참석합니다. 어느 날은 밖에 있는 교회의 성가대가 찬양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복도에서 만났습니다. 무언가를 주고 싶은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만 오천 원이 있는 것입니다. 만 오천 원을 한 성가대원의 손에 쥐어주며 “이것이 내가 가진 전 재산입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좋은 일 한번 해 보지 못해보았습니다. 이 돈을 좋은 일에 써 주십시오.” 돈을 받은 성가대원은 이 돈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 형무소 교회에 목회하던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마침 그 형무소 교회 건축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것들은 다 준비가 되었는데 강단이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돈으로 목재를 사서 강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헌당식 때 강단을 놓고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 사형수들 가운데 한명이 만 오천 원을 헌금했고 그 돈으로 이 강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립니다.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그 돈으로 강단에 헌금을 하다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이야기가 법무부까지 들려졌습니다. 법무부는 그 사형수를 무기징역수로 형을 감량해 주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한 일이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이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재물이 있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더라도 미래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투자를 합니다. 운동도 하고 보약도 사먹고 웰빙 음식도 먹습니다. 건강한 일에는 돈을 아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헌금하라면 아낍니다. 부활절 헌금을 하라면 아낍니다. 그러나 건강에 투자 하는 것 헬스비 내는 것, 골프 치는 것 이런 것을 아끼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건강을 위해 투자 한다고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물론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건강한 것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미래에 일을 준비하는 것이 더 귀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보통 사람은 70세 80세까지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세에 돌아 가셨습니다. 실패한 인생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부면 실패한 인생이지만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우리 인간에게 엄청난 축복의 선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를 부활의 축복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에게 붙어 있는 모든 자들이 부활할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마치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면 죽 연결되어서 죽 고구마들이 딸려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영적인 교재를 하고 있는 자들은 다 예수님과 붙어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보증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보증해 줍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경 51절부터 53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오늘 사도바울은 아주 귀중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비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비밀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영원히 잠들지 않습니다. 마지막 나팔소리에 홀연히 변화합니다. 부활은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지만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신령한 몸으로 다 변화합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합니다. 부활은 변화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입니다. 우리의 몸이 땅에 묻히지만 우리는 신령하게 변화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다 부활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의 이야기를 할 때 정신적인 부활, 사랑의 부활, 용기의 부활을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부활의 의미이고 성도의 진정한 부활은 우리의 육체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육신으로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미 앞서가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도 우리가 부활할 때 함께 그 부활의 현장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 여행을 하는 중에 비석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떤 비석에 “부지런한 내 딸 여기 잠들다. 부활의 날에도 제일 일찍 일어나리라.” 부지런한 딸이 부활의 날에도 제일 먼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석도 있습니다. “참 말 많았던 내 아내 더디어 여기에 잠들다.” 말 많던 사람도 잠들면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 할 때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보증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성도의 부활에 예표가 됩니다. 성도들이 이와 같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그렇게 종종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죽었다고 소문이 난다면 믿지 마세요.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이전한 것입니다.” 부활은 주소를 이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정복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54절부터 56절까지 보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이 이김에 삼키어 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승리가 사망을 삼키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5절, 56절은 사도 바울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부활의 노래입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이미 너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인간을 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불이 났습니다. 노루고 사자고 불을 피해 대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걱정은 전갈입니다. 전갈은 대피를 해야 되는데 강을 건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갈이 고민을 하다가 개구리에게 가서 부탁을 했습니다. “개구리야 나를 엎어서 건내 줄 수 있겠느냐?” 개구리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엎어서 건내는 건 문재가 아닌데 너가 만일 나를 쏘면 어떻게 하니?” 전갈이 말합니다. “나는 절대로 너를 쏘지는 않을 거야!” 개구리가 그 말을 믿고 전갈을 업고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다 건넜을 때 이 전갈이 감사하는 말은커녕 그만 독을 쏘아서 개구리를 죽여 버렸습니다. 개구리가 깜짝 놀랐습니다. 개구리가 한마디를 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괜찮은데 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를 쏘았냐?” 그때 전갈이 이야기 했습니다. “개구리야!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것이 내 본성인데 어떻게 하냐.” 쏘는 것이 전갈의 본성입니다. 여러분 죽음의 본성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쏘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비참한 곳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권세입니다. 여러분 죽음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인간에게 온 죄가 결국 죽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를 살아간 어떤 위대한 사람도 이 죽음의 독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의 쏘는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노래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제는 네가 아무것도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자가 없었습니다. 삼대독자도 죽음은 괴물처럼 삼켜버렸습니다. 부자도 삼켜버립니다. 절세미인도 삼켜버렸습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곡소리가 나고 가정이 깨어지고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망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55절, 56절은 승리의 노래 부활의 노래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누우셨지만 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승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승리를 보증합니다.

5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부활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고 우리가 누리는 복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의 복도 누리고, 물질의 복도 누리고 사업이 잘되는 복도 받습니다. 그런데 가장 귀한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원한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가 무엇입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승리를 보증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 집사님은 아주 나쁜 버릇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상습적인 도박 중독증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출석하지만 늘 도박에 끌려가는 약한 분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는데 성금요일 예배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성찬식까지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부활절 아침에 일찍 교회에 와서 목사님께 “지난 금요일에는 참 은혜가 많았습니다.”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 생각에 지난 성금요일 성찬식에 은혜를 많이 받았나보다 생각을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일에 그렇게 은혜를 받았습니까?” 집사님이 하는 말이 “제가 성찬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어디를 좀 들렀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많더군요 어찌나 끝빨이 좋던지요.” 여러분 그런 종류의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그런 상급이 아닙니다. 우리는 좀 가난해도 좀 병들어도 영원한 부활의 확신, 영원한 부활의 소망 그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얼마나 비참하고 어리석겠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영원한 하늘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이 왜 축복됩니까?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장로님은 아주 믿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일본 형사가 이분에게 고문을 하면서 “당신 노인이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시오? 인도의 간디도 100세까지 살았는데 당신도 100세까지 살아야 될 것이 아니오. 일찍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그때 이상재 장로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기는 왜 죽어 영원히 살아야지!”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나사로도 죽었다 살았지만 다시 죽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상여가 나가다가 예수님이 안수하셔서 다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죽었을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예수님이 ‘달리다쿰’ 안수하실 때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도 다시 죽었습니다.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살았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부활의 능력 안에서 거해야 합니다. 진짜 행복한 부부는 날마다 결혼식에 기쁨 속에 사는 것입니다. 늘 신혼의 기쁨이 가정을 떠나지 않으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부인을 부를 때 여보 신부, 여보 신랑 이렇게 부르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늘 신혼부부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성도는 늘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이 부활의 기쁨이요, 부활의 소망가운데 거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주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주보 시안을 주보사에 보내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보사 직원이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이번 주 주보는 찬송이 이상합니다. 부활절 찬송이 주보 안에 있네요. 부활절도 아닌데” 그때 목사님이 “여보시오. 우리교회는 매주가 부활절이요.” 여러분의 삶이 매일 매일 부활절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능력 안에 부활의 영광 안에, 부활의 소망 안에 거한다면 우리 안에 좌절이 올 틈이 없습니다. 낙심이 어디 있습니까? 불안과 염려가 어디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잠에서 일어나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 그것보다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일어 날것을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이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아침에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활의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성도의 부활을 보장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정복을 보증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승리를 보증해 줍니다. 이 부활의 능력가운데서 오늘도 행복하게 사시고 능력 있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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