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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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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비롯한 대서양 연안이 매년 허리케인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 기상당국에 따르면 올해의 열대성 폭풍의 발생건수나 규모가 지난해에는 못 미치지만 평년 수준은 뛰어 넘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카트리나와 리타 등의 초대형 허리케인의 위력을 단단히 맛 본 미국은 바짝 긴장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작년엔 이 맘 때에 벌써 몇 개의 대형 허리케인 미국을 강타하였는데 올해는 아직까지 그렇치가 않으니 다행입니다.

허리케인이 저 남쪽에서부터 생성되기 시작하면 미국까지 도착하려면 한 주나 두주 전에 벌써 경계 예보가 나가고 허리케인의 강도와 코스에 대해서 계속해서 예보를 전해줍니다.

요새는 과학이 발달해서 허리케인 관측소에서 예측하는 속도와 코스가 거의 맞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기예보에 따라 준비를 하고 집을 떠나야 한다면 부지런히 짐을 챙겨서 집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얘기를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주변에서 짐을 챙기고 준비를 해도 그리고 길거리에 피난 가는 자동차가 가득해도 눈 하나 꼼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비웃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막바지가 다 되어서 도피하려고 하니 때는 이미 늦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작년에 뉴올리언즈의 제방둑이 무너지며 온 뉴올린언즈 시가 물에 잠기는 처참한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형 허리케인이 뉴올린언즈를 치면 둑이 무너질 수 있다고 온 시가 물에 잠기는 참변을 당할 수 있다고 뉴올린어즈에 살아 본 사람이라면 거의가 들어 본 이야기 인데 지난 수 십 년 아니 1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일이라 설마설마 하다가 설마가 사람잡는 일이 작년에 드디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이미 알고 있던 일, 준비하고 있었으면 그런 참화는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 왔으니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베드로 후에 2000년이 넘도록 마지막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다고 설마설마하다가 준비없이 마지막을 맞이 하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에 따라 준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한번 부탁드립니다.

첫 번째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타인 중심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것도 열심히 사랑하고 합니다.
그리고 남을 잘 대접하라고 합니다.
교회로 편지가 오는 것을 함께 도와달라는 기독교 단체들의 편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대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을 돕는 단체들입니다.
월드비전이나 굿 사마리탄 등과 같은 잘 알려진 단체로부터 일반들에겐 생소한 수많은 단체들이 남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일일이 모두에게 도움과 협력을 주지 못하지만 여러 가지로 남을 돕는 사역을 나름대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회나 단체나 성도들은 태생적으로 남을 돕는 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나 그 어떤 기독교 단체가 세워진 것은 스스로의 몸집을 키우기 위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이타적인 목적을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서 사람들로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해주고
병원을 세워 육신의 질병을 돌봐주고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봐주며
양로원을 세워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보살피며
쉘터를 세워 집 없는 사람들의 거처가 되게 합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며 교회마다 기독교 단체마다 모금운동을 펼쳐 도움의 손길을 베풀고
전쟁이 나면 안전한 곳에 피난처를 즉 refuge camp를 지어 피난민들에게 거처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줍니다.

학교를 세워 글을 가르치고 사회에 공헌할 인재를 양성합니다.
한국의 경우 현대 병원의 시작은 거의가 기독교가 세운 병원이었고
학교도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 까지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은 거의가 기독교가 세운 기관이고
고아원이나 양로원도 거의가 기독교가 설립한 기관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기관이나 교회나 모두가 설립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이타적 목적을 위해 설립된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단체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함께 교회를 이루어가는 목적도
우리 교회를 크게 만들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도록 도와주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누리는 삶을 살도록 도우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타적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34-35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말씀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람과 천사의 방언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까리와 같다고 했고
골로새의 교인들에겐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케 매는 띠 라고 했고
로마의 교인들에겐 피차 사랑의 빚 이외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으며
에베소의 교인들에겐 그리스도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4:7-8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Beloved, let us love one another: for love is of God; and every one that      loveth is born of God, and knoweth God.
      He that loveth not knoweth not God; for God is love.

이제 이 곳에서 베드로 사도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했고 서로 잘 대접하며 각각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불행의 원인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성도는 사랑을 위해 만들어졌고 사랑 안에서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발견하게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마지막 때에 준비하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타인 중심일 뿐 만 아니라 믿음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역동적으로 바라보며 그를 적극적으로 의욕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의 믿음이란 다른 말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자기 의존적 사람이 하나님 의존적 인생으로 바뀐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원래 세상적으론 자기의지가 약하고 제 삼자 의존도가 큰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 의지에는 소극적이고 하나님 의지에는 적극적이고 의욕적입니다.

인생을 자기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과 힘에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을 의욕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새 힘을 한 번 받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호와를 계속해서 앙망해야 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통해 이타적인 사랑을 배웠습니다.
남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교훈과 명령이 인간의 노력만으론 비현실적이요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의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힘이 되셔야 하고 의지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통해 감동을 주시고 하고자하는 의욕을 주시고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삶의 순간순간에 그를 의지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날마다 넘어지고 변화 많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힘 있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는 성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말이나 봉사에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신비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겐 신기할 뿐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 신비가 비밀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가서 우리 어머니에게 들은 간증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6-25전쟁 후에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였습니다.
말이 간호사지 하는 일은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당시엔 부모 잃은 어린 아이들이 수도 없이 고아원으로 들어왔는데 들어오기는 했으나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하루에도 수도 없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20대 초반의 처녀 때 간호원복을 입고 하던 일은 이 아이들의 임종 직전에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다 죽으면 의사의 지시에 따라 이 죽은 아이들을 포자기에 둘둘 말아 상자에 따로 담아 한 쪽으로 모아 두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아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는 버려진 아이들이
먹지를 못해서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마지막 숨을 힘없이 내쉬는 아이들을 가슴에 안아주고 마지막 온기가 되어주고
질병으로 몸에서 온갖 악취가 진동을 하는 아이들을 최후의 숨을 거둘 때까지 지켜보다가 죽으면 죽은 아이의 냄새나고 때 묻은 옷을 벗기고 보자기에 둘둘 말아주는 일을 쉴 새도 없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는 지금 그 당시를 돌아보면 생지옥과 같은 경험이었는데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처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신앙의 힘이었다고 간증하십니다.

신앙의 힘은 위대합니다.
성도는 신앙 중심 믿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욕적으로 의지하고 그가 공급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던 조지 뮬러 목사님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뼈를 묻은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인도의 컬카타 빈민촌에서 평생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돌아보다 인생을 마감한 테레사 수녀가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였고
그들의 봉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봉사를 보고 그들을 존경을 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역사인 줄을 너무나 잘 알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믿음의 사람은 이타적 사랑의 삶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욕적으로 의존하며 이루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믿음으로 이타적 사랑의 삶을 순간순간 경험하며 신앙의 신비와 감격을 날마다 경험하며 마지막 때를 맞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셋째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속사람 중심의 삶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말로 전하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 행위와 말이 그 사람의 심령으로부터 나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신앙과 거룩함을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 위선적으로 행하고 그럴싸한 말은 하지만 속사람의 확신도 사랑도 없이 행한다면 사람은 속을 지 언정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어느 성도가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주의 사랑을 전해주는데
이유 없이 공격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나 보복하거나 응징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고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여전히 그저 주던 사랑 계속해서 줄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속사람의 사랑이 아니면 아니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따르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온갖 환란과 고난을 다 당했으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속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는데 누구는 알아주고 자기는 알아주지 않는다고 입이 촉새처럼 튀어나오지도 않고 눈을 뱁새처럼 가려 뜨지도 않고 얼굴을 외로 꼬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욕망하는 일이면 아무 것도 게의치 않고 묵묵히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면 입가엔 웃음이 눈가엔 사랑이 얼굴엔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표현에 따르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순간순간 감정의 기복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론의 반응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clear-minded person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self-control 즉 자기를 조정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이 있고 주의 일에 부지런하고 하며 즐겁고 한 뒤엔 감사가 뒤따를 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이타적 사랑의 삶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의 삶이고 외식이 아닌 중심에 따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삶은 육신적인 노력이나 헌신만으론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역사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은혜 받아 마지막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축복의 성도들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김경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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