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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문제 앞에 서서 (요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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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도에 개봉한 영화<라이어 라이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인데 이런 내용입니다. 소송에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질 변호사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거짓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능수능란해서 그의 부인과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도 이미 신용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가족과의 약속을 항상 지키지 못하고 변명만 하던 어느 날, 아들의 생일 때는 꼭 참석하겠다고 굳게 약속을 합니다. 아들은 기대에 부풀어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준비해놓고 기다리지만 아빠는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망한 아들은 아빠가 원망스러워 생일 소원을 빌면서 아빠가 하루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맙니다. 다음날부터 아버지는 자기의 장기인 거짓말을 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정직한 말만 튀어나오는 바람에 상당한 곤욕을 치룹니다. 교통경찰이 불러 세우자 자진해서 그 동안 위반한 사실을 쏟아내고, 유능한 변호사였지만 재판에서도 맥을 못 춥니다. 갖가지 해프닝을 겪으면서 그는 조금씩 각성하게 되고 그 결과 다시 화목한 가정을 회복하게 되는 코미디영화입니다.

미국 정신과 의사[제럴드 젤리슨]박사는 사람들이 평균 8분에 한번씩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소설가[은희경]씨가<새의 선물>이라는 책에서 묘사했듯이 우리의 언어 관습은 거짓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내 자랑 같지만”으로 운을 떼는 사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뭘까요? 자기 자랑이지요. “이런 말씀드리고 싶지 않지만”으로 얘기를 시작하면 꼭 그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약하고 악하므로 늘 자기방어와 자기 이익을 챙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결국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가장 최상의 가치는 생각할 줄 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두 가지스타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먼저 본능대로 살아놓고 생각을 이것에 맞추어 가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생각을 먼저하고 그 생각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게 지혜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아마도 후자의 사람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생각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 할 가치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 관심을 둘 필요도 없는 것에 관심을 둘 때에 거기에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장에서 인간을<육신에 속한 자>와<영에 속한 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롬8:5-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그리스도인이라면 깊이 생각해 볼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의 생각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영적인 가치관을 중시 할 것입니까? 단순한 육체적 본능에 이끌려 살아가는 동물적 삶에 머무를 것입니까? 인간이 영적동물이라면 당연히 영적 가치관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라야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영적 가치관을 따라 살아서 살아가는 날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기적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문제 앞에서도 달라야합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해결 방법까지도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문제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늘 문제 앞에 노출 되어 있고 문제를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이제 이 문제 앞에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오늘 말씀 속에서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벳세다 광야에서 굶주린 백성들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이신 소위<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불리 우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기적인지 복음서 기자들이 다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14:13이하에, 막6:32절 이하, 눅9:10-17까지에, 그리고 오늘 본문 요6장에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들을 토대로 보면 이런 사건의 경위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천 명이 모였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을까요?

본문 2절에 보면 그 한가지의 이유가 나옵니다.“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 이러라.”고 합니다. 병을 고치는 등의 기적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목적으로 지금이 자리에 와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5절을 보면“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합니다. 즉 정치적 목적으로 이 자리에 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곳이 광야이다 보니까 아마도 뒤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가 깊어질수록 그 말씀에 흠뻑 도취되어 버렸습니다.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때가 가까워 온다는 것마저도 잊어버린 채 어둑어둑해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걱정입니다. 너무나 지친 사람들에게 뭘 좀 먹여 보냈으면 좋겠거든요. 이에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먹일게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각각입니다. 오늘 이 문제에 대응하는 제자들의 유형이 나옵니다. 곧 문제 앞에 선 우리들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본문 속에서 각자의 신앙 정체성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회피적인 반응입니다.“아, 배고픈 거야 자기들이 정신없이 앉아 있다가 때를 놓친 거지 우리가 잘못했나. 우리는 말씀만 전하면 되지 먹는 것까지 신경 쓸건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막6:36에 보면“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굶건 말건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무관심 주의자들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개입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형태입니다. 교회가 무슨 행사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사람들도 오늘날도 참으로 많습니다. 피하고 싶은 겁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이건 참 문제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빌립과 같은 생각을 가진 계산적인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묻습니다.“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왜 예수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빌립에게 물었을까요? 성경은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코자함이라고 말합니다. 빌립의 충성심과 믿음을 보고자 함입니다. 더군다나 벳세다는 빌립의 고향입니다. 빌립이 근처의 지리도 잘 알고 있었으니 한 번 알아보라고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빌립이 뭐라고 합니까?“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 하리이다.”라고 얼른 계산부터 해 봅니다. 그런데 엄청난 비용이 들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합니다.‘아니, 될 일을 말씀하셔야지 도대체 계산도 없이 말씀을 하십니까?’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요, 이성적이며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어디에 가도 면접으로 일등 할 사람입니다. 취직도 잘 할 사람이고, 중역자리에도 얼른 오를 수 있는 정도의 비상한 머리입니다. 그런 면에서 빌립의 계산은 현실적으로 정확한 계산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답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빌립이 참 똑똑한 머리로 지금까지 손해 보지 않고 잘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영적 가치관의 문제로 들여다본다면 얼마나 불 신앙적인지 보세요. 먼저 그는 주위환경을 신앙보다 앞세워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군중의 수, 그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이 외양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믿음의 장애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언제나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사람을 계산속으로 빠져들게 만듭니다. 가끔씩 계산 잘하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저는 이 계산을 잘못하기도 합니다만 계산하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오래전이야기입니다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넥타이 하나를 1,500원에 판다고 적어 놓은 걸 보고 참 싸다 생각하며 막 지나려고 하는데 아저씨가“자, 오천 원 한 장이면 넥타이 3장을 살 수 있습니다.”하기에 참 단순하게“오천 원에 세장씩이나 주면 싸게 주나보다”는 생각만 하고 3개를 샀습니다. 그리고는 오천 원짜리 한 장을 줬더니 거스름돈500원을 주려고 하더라고요.‘아니 아저씨가 오천 원에 3장 준다고 해놓고 무슨 거스름돈을 주나 아저씨가 실수하시는구나.’싶어서 그냥 집에 왔습니다. 와서 아내에게 오늘 넥타이를 무지하게 싸게 샀다고 세 개를 사니까 더 싸게 해주더라고 자랑했더니 배꼽을 잡고 웃는 겁니다. 무슨 이야긴지 모르시는 분께는 제가 친근감을 느낍니다. 제가 이렇게 아무 계산 없이 삽니다. 그런데요 집에 와서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그랬으면 지금까지도 제 나름대로는 싸게 싼 넥타이로 인한 행복감에 젖어 있을 텐데 말입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계산을 하지 않으면 행복인데 해보고 나면 괴로운 것입니다. 빌립이 여기에 빠진 것이죠.

자, 빌립이 또 하나의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그의 말 중에“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라고 하는 말입니다. 무한한 능력이시오, 은혜이신 분의 면전에서“조금씩”이라뇨. 결과론 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마14장 21절에는 여자와 아이를 빼고 5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빌립이 하고 있는 말이 얼마나 주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불 신앙적인 언사입니까? 주님은 거저 허기나 면하게 할 만큼 적당하게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빌립은 지금 자기계산, 자기기준의 능력으로 암담한 상황 앞에 신앙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어두운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부정적인 자세가 되어버립니다. 보세요, 그렇게 철저하게 계산해낸 빌립이 예수님께 드린 것이 있습니까? 그 정확한 계산이 예수님과 공동체에 기여한 것이 있느냔 말입니다. 없습니다. 괜히 다른 사람들까지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말잖아요.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우리의 머리로 생각해 낸 답이 아니라 주님이 가지고 계신 답입니다. 6절을 보면 빌립이 이 정도 밖에 안 될 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한 사람입니다. 물고기와 떡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입니다.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물론 아주 적은 것 이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어린아이에게는 전부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내가 먹으려고 가지고 온 것인데 왜 주냐, 내 것이니까 나만 먹겠다.”고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내 놓으면 오천 명이 다 먹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언감생심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드린 것으로 이루어진 기적 뒤에 숨겨져 있는 이 소년의 행복을 누가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점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적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적은 물질을 원하십니다. 시간과 지혜와 노력을 요구하십니다. 드리고 안 드리고는 자신이 결정 할 일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기적은 우리들이 드리는 이 씨앗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드리는 적은 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문제가 해결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신앙 앞에도 얼마든지 문제는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교회에도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그 문제 앞에서, 위기 앞에서 우리는 육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해결할 것인지 영적인 가치로 문제를 보고 신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문제 앞에 서고야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도록 평소에 우리들의 신앙적 관점과 영적인 가치관을 올바르게 세워 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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