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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애인 사랑, 예수님 사랑 (사 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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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사랑, 예수님 사랑" (이사야 35:5-6) 

“5 그 때에 시각장애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청각장애인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지체장애인은 사슴 같이 뛸 것이며 언어장애인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성경은 장애인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100번, 신약성경에는 135번 모두 235번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다른 대상에 비해서 매우 많은 편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언급 횟수의 많고 적음이 그것의 가치를 정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적어도 성경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거기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장애라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래서 성도들은 장애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오늘 구약 본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말씀에 장애인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해 보입니다. 
  오늘 본문인 “그 때에 시각장애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청각장애인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지체장애인은 사슴 같이 뛸 것이며 언어장애인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장애인 선교엑스포를 준비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 창훈대교회는 장애인에 대한 용어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그때에, 메시야가 구세주임을 나타내는 증표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보며 지체장애인이 걸으며 한센씨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청각장애인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에서 5절, 누가복음 7장 22절에서 예수님이 다시 인용을 합니다.  “시각장애인이 보며 지체장애인이 보며 나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청각장애인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메시야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시 기다릴까요?  이것은 이사야 내용의 성취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질문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의 앞길을 예비키 위해 온 사람이고 그 앞을 예비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물어야 했고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정확히 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듣고 본 것을 그대로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로서 신분증 제시와 같은 것입니다.  신분증은 공식적 증표와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반드시 장애인이 고침 받는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설치해놓은 것이어서 그대로 가야 했습니다.  메시야 입증하는 이때에 하필이면 장애인을 등장시키고 있을까요?
  청년들과 똑똑한 사람등 얼마든지 많은 경우들이 있을 것인데 하필이면 장애인 고치는 것을 증표로 제시했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쯤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장애인이 낫게 된 병 고침의 기적에 맞춥니다.  어떤 경우는 장애인의 자격기준이 논해지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병고침을 보고 그가 메시야인 것을 인증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곡을 찌르는 바른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메시야께서 자신을 입증하기위해 장애인 몇 사람 고치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 줄 만큼 연약한 위치에 있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장애인 고치는 능력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메시야임을 인정받을 만큼 작은 분이거나 아쉬운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그것은 인공위성을 만든 사람에게 종이비행기 잘 만들었다고 놀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격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놀래려면 우주를 창조하신 것에 놀래야지 병자 몇 사람 고친 것에 놀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태양을 하나 더 만든다든지 산을 옮긴다든지 하는 것이 이적이지, 병자 몇 사람 고쳐주고 그것을 ‘나는 메시야다’라고 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기적자체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어떤 질서나 정신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법칙과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을 전체적 구도 안에서 보아야 할 경우가 많은데 이 본문이 바로 그렇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예수님의 해결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포인트입니다.  인간의 장애는 고통의 상징입니다.  요한의 제자가 예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것은 이사야에서 예언된 말씀만을 가지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장애인이 고침 받는 것만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눌린 자,  포로된 자에게 자유가 전파됨을 말하라’는 것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의 요인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 오늘 보문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임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인간에게 고통이 들어온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 구속사역의 대원칙이며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하나님 섭리에 근본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마침내 본래의 보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장애인과 관련해서 오늘 본문은 최소한 두 가지를 알게 합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사역 안에는 인간의 장애고통을 해결하는 것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는 장애인의 고통을 덜어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예수께 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예수께 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4복음서를 정리해보면 예수께서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고 여러 형태로 일한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와 당신을 따르는 성도에게 당신이 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장애인 사역을 크게 정리하면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장애를 무조건 죄로 보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십니다.
  요한복은 9장 1절에서 3절에도 나면서 시각장애인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논하는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부인하셨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장애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각의 전환, 의식의 전환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도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은 지극히 중한 고통,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 장애가 반드시 죄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일의 과정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둘째는 장애인을 돕는 자원봉사자의 역할을 촉구하십니다.  장애자의 안내자가 되고 도와주는 것을 칭찬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1절에서 7절과, 마가복음 2장 2절에서 5절에 보면 한 중풍병자의 친구가 있는데 그를 침상에 눕혀 데리고 왔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지붕을 뚫고 병자를 내립니다.  그래서 주께서 고쳐주십니다.
  이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개신교에서는 다른 사람의 공적이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오늘 본문은 병고침이 구원이라고 속단하기 어렵지만 병고침의 원인이 그들의 우정이 아름답기 때문에 병자를 고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대한 행동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군데 요한복음 2장 5절에서 9절에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는데 7절에 그는 물이 동할 때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의 협력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역시 표현은 안 하셨지만 행하시는 내용 속에는 그런 친구가 없는 것을 한탄하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셋째는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4절, 마가복음 1장 41절 , 마가복은 7장 32절에서 35절, 누가복음 7장 11절에서 15절, 요한복음 11장에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한번은 어디에 가서 이야기 하면서 장애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더니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장애인이 왜 불쌍히 여기라는 말을 하느냐 항의 했습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긴다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것도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성경에도 예수님이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쌍하다고 동정만 보내고 다른 행동이 따르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장애인이나 어려운 사람을 대했을 때 그 행동을 촉발시키는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마음이 일어났어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쉽게 눈물 흘리는 것 가지고 나는 동정이 있구나 하면서 자위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어떤 것 때문에 불쌍히 여겼다면 그 불쌍히 여긴 것을 덜어주는 적극적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뒤에 즉각적 행동을 하십니다.  그 불쌍함의 즉각적 제거를 위해 예수님은 행동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장애인의 현실적인 고통을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당신께 가지고 나와 해결을 요구하면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 32절에서 34절 말씀, 마태복음 8장 5절에서 7절, 마태복음 20장 29절에서 34절, 누가복음 5장 12절에도 문제를 들고 온 장애인에게 어떤 책망도 않으셨습니다. 
  천국의 복음을 먼저 믿어야 된다든지, 나를 빨리 믿으라 혹은 내가 메시야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든지 지체 없이 묻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아픈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가령 전도하기 바쁘다고 하신다든지, 생명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든지 이런 적이 없으십니다.
  그 인간이 당하는 육신적, 환경적인 문제에 즉각적으로 참여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귀감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마가복음 3장, 누가복음 6장에 보면 한편 손 마른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손 마른 장애인이 고침을 요구하는 것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장애는 그렇게 심각한 장애인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 항상 망을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면 고소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에 여의치 않고 고쳐주십니다.  내일와라, 급한 것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흠잡기 위해 보고 있는데 내일 오면 좋겠다 하고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고통을 우선적 해결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시는 것이 메시야의 오신 목적입니다.

  다섯째, 가장 소중한 자리에 장애인을 청해서 교제하고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도 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자리에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다시 갚아 줄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고 안하면 욕합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대가를 베풀 사람은 피하라고 하십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과 지체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을 청하라고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는 의인의 부활시 우리가 다시 갚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잔치 자리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살면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복된 자리입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참으로 행복한 자리입니다.  돌잔치, 회갑잔치, 결혼잔치... 그런데 성도에게 가장 복 받는 잔치는 예배인줄 믿습니다.
  그 잔치에 장애인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건넌방, 거실이 아니라 안방에 청하라고 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자리, 보배로운 자리에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잔치자리입니다.  그래야 의인의 부활시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사실 상당한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 따라서 장애인 선교 엑스포에 여러분이 동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 설교에 감동을 받고 민박을 신청을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설교 감동여하를 떠나 민박에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리드하는 사무국장이 저한테 이럽니다.  주변에 다른 교회를 찾아 민박을 섭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훈대교회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올해는 창훈대교회가 장애인과 함께 하는 교회로 모토를 걸었는데 창훈대교회의 자존심으로 해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창훈대교회가 감당해 낼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애인을 잔치자리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98년에도 한번 창훈대교회에서 더 성대히 치루었습니다.  여러분들 언제 장애인을 모셔보겠습니까?  고통은 아닙니다만 고통이라면 3일 고통에 참여 못하겠습니까? 

  실리적 차원에서 본다 해도 여러분에게 자녀들에게 자신의 신앙이 자부심을 생깁니다.  자녀들도 이런 일에 동참하는 부모를 존경하게 됩니다.  개인이 복을 받는 축복된 일입니다.  400가정이 넘어 고를 것이 걱정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장애인은 한국교회 옆에 놓아둔 숙제입니다.  특별히 원했든 원하지 않았던 간에 창훈대교회가 이 일을 치룰 때 일차적으로 한국교회 대표자로서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끝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모두가 하나님께 칭찬받고 예수님 오신 목적을 성취하는 데 동참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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