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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보증 (눅 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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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보증(눅 24: 11~16절)

누가복음 24장은 고전 15장과 더불어 부활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5:12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바울은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53절에도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두드러진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자들이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 아침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았습니다. 목적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시신에 바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와보니, 시체가 보이지 않자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으니 누가 훔쳐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깜짝 놀라며 근심하고 있을 때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께에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교주들인 석가나 공자나 마호매트의 경우 모두 한결같이 다 무덤에 시체가 썪어진 상태로 있는데, 놀랍게도 역사에 존재한 모든 인물 중 예수님만 빈 무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특징은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증이 되어주신 것 가운데 자신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부활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베드로전서 3: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3절에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그 산 소망이란 부활을 우리도 하게 된 다는 소망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먼저 본문에서 부활의 증인들에 대하여 본문에서 몇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선 못마땅한 것이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주일 첫날 아침에 무덤을 찾은 것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닌 여자들이었습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 것도 3년 간 훈련받은 제자들이 아닌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 아닙니까? 철저하게 훈련받은 제자들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머리로 남자들을 세워 주었습니다. 마땅히 가정의 영적인 제사장 역할은 가장들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적 주도권은 여성들에게 있습니다. 남자들이 신앙적으로 확고하게 서서 영적인 분위기로 끌고 가는 가정들이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빨리 영적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시급함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 바울은 딤전 2:8에서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남자 성도와 여자성도의 비율이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들과 부친들의 영적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더욱이 한심한 것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11절입니다.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여자들의 말이 허탄한 듯 뵈어, 믿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더디 믿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13절 이하를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과 동행중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① 그 이유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본문 15~6절입니다. “저희 눈이 가리워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했습니다. 눈이 가리워졌음을 강조합니다. 자, 이제 눅9:4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했습니다. 18:3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눈을 가렸고, 말씀이 감추어 졌고, 이성이 어두우므로 더 이상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깨닫는 것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②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이제 그 비결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24장에는 세 번씩이나 열어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한 번 나옵니다마는 영어 성경에는 세 번 나옵니다.

㉠ 30,1절입니다. 예수님이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로서 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 32절에 보면, 예수님이 성경을 열어 주셨습니다.
비로서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 45절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비로서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국이 무엇입니까?

눈이 열려지고, 성경이 열려지고, 마음이 열려진 결국이 무엇입니까? 52~3절입니다. 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큰 기쁨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큰 기쁨의 삶을 사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야 하고, 성경 말씀이 들려져야 하고, 마음이 활짝 열려 시간마다 깨달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령한 깨달음의 기쁨을 물질 몇 푼 얻는 기쁨과 비교하겠습니까?

오늘도 이 같은 신령한 깨달음과 기쁨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각 가정들이 영적이 질서가 회복이 되며, 가장들이 말씀가운데 바로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며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부활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 부활의 보증이 된 부활의 몸은 어떤 상태입니까?

누가복음 20:36절에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11:25-26).

그리고 그분께서 친히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고(롬1:4) 그분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부활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부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입니다.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요한일서 3장 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몸으로 승천하셨고 부활의 몸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행1:11). 그런데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분과 같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지상 행적에서 그분의 몸이 어떠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에 대한 단서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부활의 몸은 죽음 이전의 몸이 변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분명한 신체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처음에 그분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근심과 불안과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분의 외모에 무엇인가 현저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분을 동산지기로 오해했었다는 사실(요20:15)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결국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딘지 다르면서도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신체적, 인격적 특성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주장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전에나 부활 후에나 동일한 인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은 죽음 이전의 몸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전 몸의 상태와 똑같은 것도 아니고 발전된 상태의 것입니다.

혹시 상대적으로 신체의 균형이 잡히지 않고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외모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천국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할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몸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믿기는 부활의 몸은 각 사람의 특성이 외모에서도 나타나면서도 결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상태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외모는 별 볼 일 없었습니다. 영화나 만화에서 그려지는 예수님은 성경적인 묘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사야서 예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52:1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예수님께서 이러하셨다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에 얼마나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것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 그분의 변화된 모습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이 요한계시록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6)

변화산 위에서의 그분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외모가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2) 부활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15절), 순식간에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31절). 그뿐이 아닙니다. 그 날 저녁시간에 제자들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장소의 문들을 모두 닫았었습니다(요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36절). 제자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고 누가 인기척을 느끼고 나가서 문을 열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건물 벽체를 통과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특성이었습니다. 죽음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 더 이상 우리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순식간에 여기 저기 오갈 수 있으며 만화에서나 보던 "공간이동"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게 됨으로 일단 부활의 몸을 입은 이상 신체의 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때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했습니다(행1:11). "너희가 본 그대로"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2천 년이 지나도 몸의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될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몸은 살과 뼈가 있는 가시적인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출현에 제자들은 크게 놀랐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하시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39절). 또한 그 말씀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2:7). 부활의 몸은 허상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은 부활의 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의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서 애벌레에게는 신체의 큰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몸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때를 기다리며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썩은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 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전15:35,42-44).'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3. 부활의 보증이란 어떤 내용을 말합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셔서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죄인 됨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죄 사함 받고 구원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보증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본문은 그분께서 부활하신 그 날 이른 새벽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부활로 인해 부활을 얻게 되지만 또 다른 보증이 된 복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1) 부활은 인류의 가장 큰 참된 소망이 되었습니다.

인류는 하늘을 날고자 하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달나라에 가보기를 소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소망은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질병 퇴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고 건강을 위하여 조깅을 하기도 하고 등산을 하기도 합니다. 장수하기 위하여 음식을 가려 먹고 운동을 합니다. 건강과 관련된 책자와 보조식품과 기구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회생을 기약하며 죽은 시체가 다시 깨어나기를 소망하며 영구히 깨어나는 순간까지 보존하기 위해서 '미이라'로 만들었습니다. 현대에는 한 수 더 뜹니다. 그래서 먼 훗날 의학이 더 발달하게 될 때를 기다리며 식물인간이나 중한 병으로 고칠수 없는 불치의 환자를 죽기 직전의 사람을 냉동 처리합니다. 언젠가 깨어나게 해서 치료할 수 있는 시대에 살릴 수 있다는 희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의학에는 '노화학(老化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화의 원인을 찾아 노화를 예방하여 수명을 연장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화의 원인조차 근본적으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고 아무리 성형 수술이 발달하고 수명을 늘이는 방법을 연구해도 죽음을 영원히 극복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인류에게 장수, 더 나아가서 부활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최초로 부활하셔서 부활의 보증이 되어 주셨습니다.

간혹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례가 흥미롭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심장 박동이 멈추었다가 회복되었다든가 며칠 동안 의식 불명 이었다가 회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회생이지 결코 부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회생한 사람은 얼마 동안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틀림없지만 언젠가 또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회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은 그 후 줄곧 살아계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실 것입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요한계시록 1:17)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부활을 여러 차례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대인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도 믿지 못했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 째 되던 날 그분을 생전에 좇았던 여인들이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새벽에 무덤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굴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큰 바위돌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무덤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 당황한 그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이 서둘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했지만 그들 역시 처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11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해(害)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 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1:3)

그리고 그 이후 제자들은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적이 있습니까?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키실 수 있습니다(행2:24). 하나님께서는 이 부활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께서 주장하신 모든 것이 사실임을 입증해 보이신 것입니다(롬1:4).

3) 모든 사람은 훗날 예외 없이 부활하게 됩니다.

사람은 죽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분의 음성을 훗날 듣고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같은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여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부활을 원하십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또한 히브리서 6:2절에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20:6절에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약속합니다. 요한복음 11: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이 시간 묻고 계십니다. 이 귀한 생명의 부활의 은총에 참여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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