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 30:1-12, 행 9:1-9, 요 21:15-17)

  • 잡초 잡초
  • 264
  • 0

첨부 1



1.  시드니 카트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술에 만취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날따라 그는 집에 오자말자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독주에 취하여 형편없이 흉한 몰골이 된 자기 모습이 비쳤습니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너는 어리석은 놈이다. 내가 너인 줄 미처 몰랐구나!”.

    그러면서 카트니는 그토록 망가지고 초라한 자기 모습을 보고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주먹으로 그 거울을 깨뜨려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인생은 실패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카트니는 거기서 낙심하고 좌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망가진 자화상을 보고나서 그날부터 새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나의 영적 자아를 제대로 살피는 일입니다. 옛날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가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주여, 내게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나무 사이에 자기를 은폐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을 살피기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결국 에덴동산 즉 하나님 면전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성군이라고 일컫는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실 다윗의 범죄는 일반 사람들로부터도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모든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임금과 백성들을 위하여 싸우는 마당에 군대의 중요한 지휘관인 우리야장군의 아내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워서 이번에는 그 충성된 장군을 죽게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셔서 이 죄를 지적하도록 했습니다. 나단은 이야기 끝에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윗은 나단선지자마저 처단해버리면 사건은 간단하게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죄된 모습을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다윗은 그 자리에 꼬꾸라졌습니다. “내가 주께 죄를 지었나이다.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제발 주님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어가지 말아주옵소서”라고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그는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었으며 계속 주님께 더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2.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는 단연 그 첫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일컬어서 “수제자”라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 추앙합니다. 우리가 중세기 때나 심지어 요새 로마 교황을 보더라도 가톨릭교회가 베드로에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권세를 부여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베드로를 보면 너무도 인간적인 사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연명하던 어부였습니다. 나중에 오순절 때 예루살렘 모였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갈릴리 촌  사람이라고 무시해서 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설사 베드로가 가톨릭에서 주장하듯이 어마어한 교황의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처음 교회가 설립될 때 결정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며 그 후 초대 교회를 이끌어나간 지도자였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로는 베드로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이 막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진면목을 살펴보면 정말 허물 많고 문제 투성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 마다 베드로는 신중하게 듣고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꾸짖는 투로 항의하기 까지 했습니다. 어느 때는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해놓고도 사세불리하게 전개되니까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저주까지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과 관계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옛날 직장으로 돌아간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베드로가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변화를 하게 되었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그 실패의 현장으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과정이 어떠합니까?

    요 21:에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고기 153마리를 잡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3번째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3번째”가 강조되고 있는 것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몇 번 하셨습니까? 3번을 하셨습니다. 여기 또 “3번”이 강조됩니다. 17절에 보면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러려니 하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3번째” 똑 같은 질문을 하실 때 아마도 베드로는 큰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어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3번”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체포당하시고 심문 받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가서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를 본 사람이 “너도 저 예수와 일당이 아니냐?”고 했을 때 베드로는 질급을 하면서 “무슨 말이냐?”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베드로는 똑같이 부인했습니다. 그런 일이 세 번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3번”에 대한 경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늘밤 닭이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날 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할 때도 역시 대제사장의 관저의 뜰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 아침도 역시 그들은 해변에서 지금 숯불을 쬐면서 이 말씀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기억을 되찾아주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과거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아가서 그때 했던 일들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잊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천연덕스럽게 옛 직업으로 돌아 가버린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옛날 일들을 회상할만한 극적인 일들을 진행하십니다. 처음에 베드로를 부르실 때 고기를 잡게 했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할 때 “3번”을 부인했듯이 이번에는 “3번”에 걸쳐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이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같은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끈질긴 사랑입니다. 마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놀아난 고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속량해낸 호세아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리고 호세아는 그 폭풍 같은 가정적 시련을 통하여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므로 내 죄를 담당 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우리를 주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적어도 베드로가, 저 갈릴리 어부 베드로가, 그리고 연약하고, 허물 많고, 죄 많은 저 베드로가 주님의 수사도가 되고, 초대 교회의 초석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러하신 주님의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총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렇게 베드로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래의 자리에 계속 서서 주님께 일향 충성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내가 주님에게서 떠났던 그 자리, 그 사건들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또는 베드로에게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변명하지도 말고, 내 모습 이대로 진실하게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새 출발의 발길을 돌렸듯이 바로 거기서 여러분의 발길을 주님께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영접해 주십니다. 주님이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더 귀하게 만드시고 들어 쓰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회개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초대 교회가 성령 충만 받은 후 예수님의 명령대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복음이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대행진 앞에 장벽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고 했습니다. 이미 스데반을 죽일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여세를 몰아 이제는 복음이 유대 땅을 벗어나서 온 세상을 향하여 나가듯이 박해의 손길도 역시 유대 땅을 넘어서 불같이 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신임장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을 향하여 불같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잘 보십시오. 인간들이 아무리 계획을 세워서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해도, 아니 아무리 사탄이 집요하게 하나님의 사역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는 길에 그 어떤 장애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40년을 끝내고 약속의 땅에 갔을 때 그들 앞에는 여리고라고하는 철옹성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합지졸같은 이스라엘 군인들을 들어서 그 여리고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을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 앞에 여리고성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감당할 수 없이 강한 빛이 내려 비쳤습니다. 사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기서 사울은 그를 강권적으로 찾아오신 주님께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평생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박해하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되었습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찾으신 주님은 박해하는 사울도 찾으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키셔서 교회 설립을 위한 초석으로 들어 쓰신 주님은 박해자 사울을 통하여 그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사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은 대단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헬라 철학에 능해서 고도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요, 로마 시민권을 가져서 세계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유대 율법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 폭넓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복음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을 들어 쓰셨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을 들어 쓰신 하나님이신가 하면 바울 같은 사람도 들어 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 있는 나를 찾아주십니다. 나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나를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쓰시려고 택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