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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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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충성
본 문 : 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1. 충성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충성”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저에게 이 “충성”은 아주 익숙한 말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군에 있을 때, 경례 구호가 “충성”이었기 때문인데요. 3년 반을 “충성”이라는 구호를 붙이다 보니까 너무나 익숙해졌고, 또 제대한 후까지 한 동안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대한 후 선배 목사님께 인사하는데도, ‘안녕하십니까?’가 아니고 ‘충성’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전화를 받으면, ‘충성’ 또는 ‘통신보안’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이렇게 저에게 익숙한 이 충성이라는 말이 여러분에게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충성”에서 ‘충(忠)’은 가운데 중(中) 자와 마음 심(心)이 합한 것으로서 마음이나 그 삶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한결 같은 것을 의미하며, ‘성(誠)’은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이 합하여 자신이 말한 그대로 사는 사람 즉, 신실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 “충성”은 구약 성경에서 원어적인 의미는 '확고함(firmness)', '확실성(certainty)', '보증(assurance)' 등인데요, 이 말은 ‘확실하게 하다, 충실하다, 믿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이 말은 믿음을 뜻하는 ‘피스티스’와 같은 말인데요. 이 말 역시 '신뢰,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뢰 등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러한 뜻을 가진 이유는 원래 이 말이 쌍방이 맺은 약속이나 계약을 깨지 않고 충실한 것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이란 무슨 뜻입니까? 한 번 한 약속이나 한 번 맺은 신뢰의 관계를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충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충실하여 변치 않는 것, 혹은 그 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서머나 교회의 충성

1) 서머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가운데,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현재 터키의 항구도시 ‘이즈밀’인 서머나는 비옥한 허무스(Hermus)라는 계곡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도시인데다가, 바다가 도시 안까지 들어와 있는 천연적인 항구로서 산과 들과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굉장히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서머나가 얼마나 아름다웠든지, 사람들은 서머나를 “아시아의 장신구”, “아시아의 면류관”, “아시아의 꽃”, 즉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았습니다.

이 서머나는 에베소로부터 북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요. 당시 최대의 도시인 에베소와 1, 2위를 다툴 만큼 부유하고 번창했습니다. 고대 도시로서는 드물게 인구 10만 명의 거대 도시였고, 각종 산업이 발달하는 등 경제력을 지닌 도시였으며, 환경이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볼 때도 뛰어났으며, 지식이나 문화나 예술 방면으로도 다른 도시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서머나는 로마에 대해 아시아 어느 도시보다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로마가 ‘자유 순회재판소’를 설치해 주는 등 정치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머나는 어느 도시보다 로마적이었고 또 로마에 충성했습니다.

2) 서머나 교회의 형편

아쉬운 것은 서머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이라든가, 혹은 전해 내려오는 전설 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추측하기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전도하다가 서머나가 멀지 않으니까 서머나에 잠시 가서 전도하지 않았을까?’, 또는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서머나로 와서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 뿐입니다.

이러한 서머나 교회의 상황, 즉 오늘 본문 당시 상황은 어떻습니까? 본문에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라고 말하는데요. 이 말씀이 당시 서머나 교회가 처한 형편을 보여줍니다.

① “환난”이란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신앙적 핍박’, 즉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핍박’을 뜻합니다. 이 핍박은 서머나가 다른 도시에 비하여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데 남다른 열심히 있었다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 즉 서머나 시민들이나 당국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로마 황제를 비롯하여, 헬라와 로마의 수많은 신들을 부정했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보였고, 로마와 황제와 로마의 신들에 대한 신성모독자로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는 성만찬을 행하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요 나의 피다”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서머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 식인종이라고 여겨 더욱 더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남녀 기독교인들이 늘 함께 모여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이것을 들은 서머나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을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부도덕하고 방탕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가족들 중에 기독교 신자가 있는데, 그들이 주님과 복음 때문에 이교에 젖은 가족들과 차별을 두자 “기독교인들은 가정을 파괴하고 가족관계를 악화시킨다”고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절하니까 “기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불충한 시민들이며 잠재적 반역자들”이라면서 핍박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말세론을 말하면서 ‘이 세계가 불탈 것이요 종국에는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니까 기독교인들은 ”방화자”라면서 누명을 씌워서 핍박했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가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난을 당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오랜 감옥 생활로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은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화형당하여 죽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폴리갑이 이 서머나의 감독이었는데, 폴리갑만해도 이 지역에서의 열두번째 순교자였습니다.

② 또 오늘 본문에 보면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습니다. 이 “궁핍”은 ‘게을러서 오는 궁핍’이나, ‘천재지변으로 오는 궁핍’이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가 당한 궁핍은 조금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요. 힘든 세상에서 잡초처럼 살아나 그 지역이나 상권을 장악하는 유대인들이었기에, 당시 번창하는 항구도시 서머나로 몰려들었습니다. 거기서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던 그들은 후발 주자로 성장하는 기독교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는데요. 그 주된 방법이 일체의 경제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에게는 식량을 팔지 않았습니다. 옷이나 옷감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왕따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혼자였고 외톨이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외롭고 먹고 살기위한 어떤 경제활동도 못하게 되니까 기독교인들은 도시를 떠나 공동묘지로 가서 굴을 파고 거기서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서머나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한 환난과 궁핍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과, 유대인들의 미움을 산 일로 인하여 실생활에서 당했던 극심한 환난과 궁핍이 서머나 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머나 교회는 어떻게 주님께 충성했을까요?

3) 환난과 궁핍을 충성으로 이긴 서머나 교회

현재 서머나 시의 한 가운데는 서머나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당의 문패에는 “Sen Polikarp(성 폴리갑)”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머나 교회는 일명 폴리갑 기념교회로도 불린다는 말입니다.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주후 155년 2월 23일 토요일에 순교했습니다. 마침 운동 경기의 축제 기간이었기에 서머나는 시민들과 주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극도로 흥분한 가운데 소리치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운동경기의 결승전이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목회자인 폴리갑을 비롯하여 무신론자요 식인종이요 부도덕하며 가정을 파괴하며 황제와 로마를 반역하는 기독교인들을 화형시키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은신처에 피해있던 폴리갑은 곧바로 체포되었습니다. 서머나를 통치하던 로마의 총독은 한때 폴리갑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는데요. 그가 폴리갑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가이사(황제)가 주(主)시오!’ 라고 한 마디만 하고, 그에게 제물을 드리시오. 그러면 죽음을 면할 것이오.” 그러나 폴리갑은 그 청을 거절했습니다. 총독은 폴리갑을 흥분하여 소리치는 군중들 앞으로 끌고 가기 전에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하고 가이사에게 제사를 드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택하라!” 그러나 폴리갑은 그 마지막 기회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난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 왔는데 주님은 단 한 번도 나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소.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해 주신 내 왕을 욕하고 배반할 수 있겠소.” 총독이 그를 불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폴리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잠시 타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이는 당신이 다가올 심판날과 영원한 형벌의 날에 악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지체하는 겁니까? 자, 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그리하여 폴리갑은 흥분한 군중 앞에 세워졌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폴리갑을 화형할 화목을 손수 날라오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유대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법을 어겨가면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화목을 가져와 쌓는 데 앞장 섰습니다. 군인들이 폴리갑을 화형 기둥에 묶으려 하자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라. 불을 견뎌내게 힘을 주신 주님이 이 불길 속에서도 나를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게 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폴리갑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서머나 교회당에는 19세기 말 프랑스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폴리갑의 순교 장면이 입구 전면에서부터 걸려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림 속에는 장작 불길에 휩싸인 폴리갑을 향해 칼을 든 사람이 찌르려고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의 눈은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그의 얼굴은 평화롭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폴리갑 왼편에는 손이 묶인 사람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듯이 숙연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폴리갑 앞에도 이렇게 순교한 사람이 많았고, 그 뒤에도 많았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던 서머나 교회는 그 환난과 궁핍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그들은 주님과 주님께서 주신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 그들도 변치 않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헌신했으며, 그것이 생명을 내놓는 일이었지만, 생명을 내놓을 지언정 주님을 향한 사랑은 포기할 수 없어 순교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충성입니다. 서머나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은 변치 않고 충성할 대상은 오직 로마 황제 뿐이라고 했지만, 오직 충성은 로마 황제에게만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진정한 충성은 오직 주님께만 하는 것이라면서 그들은 볼에 타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4) 충성의 댓가

오늘 본문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왕관(디아데마)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께 죽도록 충성한 성도를 왕처럼 높여주시고 실제로 왕처럼 통치하게 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스테파노스)을 뜻합니다. 당시 올림픽과 같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씌어주던 면류관은 월계수 나무 잎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이 월계수 나무 잎으로 만든 면류관은 금방 시들어버렸습니다. 늘 푸르러 그 명예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못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시들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아니하고, 늘 그 빛이 나고 영광스럽고 명예스러운 것입니다. 충성한 성도에게 이와 같은 상급을 주신다는 것이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제가 소아시아 교회들을 순례하면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이 바로 서머나입니다. 소아시아의 다른 교회들은 바울 사도가 직접 세웠거나 그에게서 복음을 받은 분들이 그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이 분명하고, 그 교회의 목회자나 교인들 가운데 제법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작 그 교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나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만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나라인 터키에서, 이슬람 도시인 서머나에서 말이죠!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 충성하여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니까, 하나님도 서머나 교회를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도록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면류관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3. 죽도록 충성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도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충성해 주셨습니다. 즉 충성은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충성의 최고 표현으로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신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도 그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려 충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적들에게 포위되어 아주 위험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 뒤에는 강이요 앞에는 적들이 포위를 하여 좁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부하들은 나폴레옹을 피난시키기 위해 추운 강물에 뛰어들어 인간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 위로 나폴레옹이 지나가게 하여 그를 무사히 도피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이 병사들의 인간 다리를 이용하여 강을 건넌 후, 추운 강물에 뛰어들어 자신을 위하여 인간 다리를 만들어 준 병사들에게 ‘이제는 강에서 올라오라’고 말했는데,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살펴보니 그들은 이미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왕을 구하기 위해 그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한 그들 때문에 나폴레옹은 한 없이 울면서 퇴각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에 대한 여러분의 충성은 어떻습니까?

프랑스 군대의 포병 부대에 최고의 명사수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절약하여 조그마하고 아담한 집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그 집은 담쟁이 덩굴이 우거지고, 각종 꽃들과 아름다운 나무들로 둘러싸인 정말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그가 이 집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다리던 때에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졌고, 그는 군인이 되어 최고 명사수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를 공격해 온 독일군들이 하필 그의 마을에 주둔했고, 프랑스 군대는 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독일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프랑스 군을 지휘하던 사령관이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저기 저 집이 보이나?"
병사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 집을 사령관이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집이 독일군의 지휘부이네. 잘 겨냥하여 한 방에 날려버리게."
그러자 그 병사의 눈에는 잠시 아쉬움이 스쳤으나, 그는 있는 기량을 다하여 독일군 지휘부 건물을 겨냥했습니다. 그리고 포를 쏘았고, 무서운 굉음을 내면서 그 아름다운 집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아주 잘 했어!"하며, 사령관이 병사를 돌아보았을 때 장군은 그의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나? 무슨 일이야?"
그러자 충성스러운 병사는 대답했습니다. "사령관님! 저 집은 바로 저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충성하십시오. 그러면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주님께 충성한 서머나 교회처럼, 불과 몇 십년 전 대형교회로 손꼽히던 영국의 교회들이 없어지거나 고풍스러운(?) 술집으로 변했는데도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변치 않고 여전히 우뚝 서 있는 서머나 교회처럼, 주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충성하십시오! 주님만 사랑하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유혹도 뿌리치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여러분의 전부, 여러분의 목숨까지 드리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영원히 변치 않는 복을 받으며, 그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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