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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城) 쌓기를 그쳐라(2) (창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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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인류의 언어가 하나라고 했습니다. 구음(口音)이 하나라는 말은 인류가 한 조상에 의해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언어가 하나라는 말은 바벨탑 사건 전에는 모든 인간들의 의사소통의 매개체가 통일성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므롯 자손들의 시날 평지 바벨탑 사건 이후부터 언어를 혼잡케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의 이 지상 왕국 건설을 위한 경영을 중단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Ⅰ. 불신앙적 동맹은 신권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장 4절에 『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후예들이 유리방황하는 저주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는 무지의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번성하여 널리 퍼지고 충만하는 것이지 결코 불신앙적인 제국 내지는 불신앙적인 집단을 형성하는데 있지 아니합니다.

1)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축복의 명령에 대한 도전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이 위대한 축복의 명령을 준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자손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 』라고 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을 스스로 도전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앙적 도전입니다.
창세기 9장 11절에 『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 9장 13절에 『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고 했습니다.
작금에 현대인들은 이 땅에서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불신앙적 이데올로기는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문화, 예술,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까지 깊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발칸반도의 유고 사태는 기본적으로 서구 기독교 문명과 동구 그리스 정교 즉 슬라브 문명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주의를 표방한 불신앙적 동맹운동이나 시장단일화를 위한 경제적 동맹이나 종교의 탈을 쓴 인본주의적 동맹운동은 신권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과 신학이 다르고 교리와 행정을 달리하는 단체들이 통폐합하는 이른바 기독교 단일화 운동, 더 나아가 종교적 단일화 내지는 종교 일치화 운동은 혼잡 그 자체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이 도무지 흩어짐을 원치 아니하고 하늘 꼭대기까지 닿게 해 보자는 ① 불신앙적인 예술의 세계, ② 불신앙적 교육의 세계, ③ 불신앙적 과학의 세계, ④ 불신앙적 창작의 세계 등은 현대판 니므롯 자손들에 의해 혼잡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불신앙의 동맹 그것은 혼잡입니다. 불신앙적인 동맹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집단으로 그 기능을 성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이것은 창세 이후로 적지 않은 체험과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얻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거나 하나님의 자리를 훔치려고 애쓰지 말고 온 세상으로 흩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해야만 합니다.
다시는 너희를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7-18절에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그것이 온전히 드러날 뿐입니다.

Ⅱ. 무신론적 인본주의는 신권에 도전 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장 3절에 『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4절에 『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서로 말하되 』라는 말은 인간들의 합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 우리 이름을 내고 』라는 말은 직역하면 '우리 이름을 새기고'라는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표준이 되어서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 사실이 곧 법이 되고 절대적 가치의 표준이 되는 사회는 지극히 위험한 사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절대적 가치와 표준이 되는 성경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운동은 인간의 명예욕을 보여주는 공명(功名)주의 운동입니다.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늘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바다를 정복하여 인간들이 스스로 하늘과 땅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공간의 개념을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공적 재화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땅은 체코슬로바키아 사람 모두에게 공적재화라고 주장하자 독일은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신 땅인데 이것이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만의 땅이냐, 독일 땅이기도 하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에게 내 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을 로마의 행정장관이 언제부터인가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군에 의해 고토를 버리고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이미 아랍화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연고권 싸움이 중동의 화약고를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이 싸움은 이스마엘 자손과 이삭의 자손의 대결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복의 개념을 단순히 투쟁해서 이기는 사람이 먹는 정글의 법칙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개념을 망각하는 싸움이 되어서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싸움이 되어야지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싸움은 범죄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불신앙적 제국과 하나님을 도전하는 집단 건설을 위한 피 흘림에 있지 아니합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고 했습니다.
노아의 자손들은 인간의 욕구를 채우려는 정신적인 기초 위에서 시날 평지에 바벨탑 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시 23:3).우리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도 감수합니다(마 19:29).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았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행 15:25-26). 바울은 주 예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습니다(행 21:1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복음의 동역자 바울의 목숨을 위해서 자기의 목이라도 내놓았다고 했습니다(롬 16:4).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했습니다(골 3:17).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벧전 4:16).
로마서 14장 7-8절에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 했습니다.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대요리문답 1). 그러나 무신론적 인본주의 늪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철저히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① 인본주의 종교가 나오고 ② 인본주의 문화와 ③ 인본주의 철학과 ④ 인본주의 예술과 ⑤ 인본주의 과학과 ⑥ 인본주의 교육과 ⑦ 인본주의 정치제도가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절대적 가치 속에 하늘 꼭대기까지 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이제는 인간 스스로에게까지 위해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악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마침내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공명주의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이 파괴되고 있다는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몇 년 전에 일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놀라운 사실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충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은 바로 쥐 아기가 태어났다는 세계적 토픽 뉴스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산부인과 의사인 세베리노 안티노라는 최초 무정자증 남성의 미성숙 정자를 쥐의 고환에서 추출한 정소에 넣어 시험관에서 배양시켜 인공수정 한 후 불임남성의 부인 자궁에 이식해 출산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일본 돗토리(鳥取)대학 연구팀이 이미 쥐의 정소를 이용한 정자 숙성법을 성공한 상태이고 단지 출산까지 이어지지 못한 까닭은 일본 산부인과 학회의 불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쥐를 이용하여 잉태를 시키려는 발상에 대해 과연 이것이 사람이 할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러한 반성경적인 문제들에 대해 오늘의 세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교회는 과학문명이 주는 편의주의적 마취제를 맞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생명과학이라는 미명아래 일부 과학자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도 인공유산(낙태)이라는 것이 들어왔습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원치 아니하는 자식을 낳을 때도 있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한데다 이미 기존의 자식이 많은 경우에 그 자식을 유산시키기 위해 간장을 들이키고 높은 언덕에서 뛰어내리고 했던 것이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어머니 태에서 출생하여 효자가 되고 이 사회에서 지도자로 훌륭하게 성장한 예는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아이가 이 나라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말입니다.

전 세계에서 낙태를 통해 죽어가는 태아는 연간 5,000만 명에 달하며 이것은 세계 1,2차 대전 중에 전사한 자들을 모두 합친 숫자보다 많습니다. 우리나라 만 해도 연간 1,500명 이상이 낙태 시술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의 여성 60% 이상은 낙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성감별에 의해 여자아이를 낙태시키는 경우라고 하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낙태 현장에 가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살인 행위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낙태는 알고 보면 자기이름을 내기 위한 엽기적 형태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아 선호 사상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가장 계획적이고 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농경시대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즉, 연약한 여자에 비해 남자들의 강한 힘이 가져다주는 일차적 목적 외에 조상숭배라는 유교 문화의 뿌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웃지 못 할 사실은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선험적 고정관념에 의해 남아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진 것이 문제입니다.
가문과 부모의 이름 때문에 생명을 죽이는 일은 오히려 가문과 부모의 이름에 지우지 못할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남자들의 사회적 기득권과 조상숭배의 가치보다 더 엄청난 가치의 윤리 실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은 더 많은 생명을 위한 희생이지 결코 생명의 가치 그 자체를 경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결단코 인간 스스로 자기 생사를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명주의의 시녀가 되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일들이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생활전반에 걸쳐 그 위험수위가 넘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과 대를 하늘에까지 닿게 하자는 과학지상주의 동맹과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불신앙적 동맹과 우리 이름을 내자는 무신론적 인본주의 동맹은 파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혼란으로 인한 바벨탑 공사의 중단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한계를 두고 계십니다.
본문 11장 5절에 『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7절에 『 자, 우리가 내려가서… 』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 인간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록하기 위하여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 불신앙적 동맹주의와 무신론적인 인본주의를 이 시간에도 보시고 계십니다.
과학문명의 드높은 만세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바벨탑을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과 대를 통하여 하늘의 도성으로 올라오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과 대를 통하지 아니하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 꼭대기에 오르고자 하는 발상이 과학 지상주의의 착각이요 이것을 현실화하기 위한 불신앙적 동맹과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의 수치입니다.

이 세상 과학지상주의 파멸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불신앙적 동맹과 무신론적 인본주의는 그들 스스로가 장만한 무덤에 영원히 장사될 것입니다. 끝없는 고통의 베개를 베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미 FTA 8차 협상 마지막 날(2007. 3.12)에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이 미국 측에 을지문덕 장군의 '여수장 우중문 시'(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이제 그만 만족함을 알고 돌아가라'고 충고한 내용)를 전했다고 합니다.
동일하게 우리는 과학문명의 끝없는 욕망 앞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땅에 살았던 불세출의 명장의 시를 음미해 봅니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오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도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그대 전쟁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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