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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어생활이 변해야 합니다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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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종류

1974년 1월에 정 아무개라는 사람이 이웃에게 "현 정부가 부정부패해서 곧 망할 것이다."고 말했다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붙잡혀 징역 7년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죄목은 '유언비어 날조' 혐의였습니다. 이때는 술 먹다가 옆 사람에게 한 말도 유언비어 날조 죄가 되어 감옥에 가는 시대였습니다. 요즘 이런 식으로 한다면 감옥 갈 사람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 한 마디 잘 못 했다가 감옥은 안 가더라도 큰 손해를 보거나 혹은 남에게 큰 상처를 준 일이 없습니까?

우리는 늘 이런저런 말을 하며 삽니다. 그런데 말에 대해 알고 말 하는 사람과 알지 못하고 말하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기 전에 말의 속성과 능력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에는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이 있고 '저주의 말'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말'이 있고 '부정적인 말'이 있습니다. '힘이 되는 말, 격려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상처 주는 말, 힘들게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언어습관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과 성품, 가치관이 다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자주 하는 말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정신이 뿌리 깊게 박힌 서양 사람들은 말끝마다 축복의 말을 참 많이 합니다. "God bless you." "행운을 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알면서도 못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말 하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말에 인색한지 모릅니다. 기왕이면 좀 좋은 말을 하지 꼭 이상한 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 주고 힘 빠지게 만듭니다. 긍정적인 성품을 가진 분은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다. "해봅시다." "잘 될 겁니다." 부정적인 성품을 가진 분들은 꼭 이렇게 말합니다. "에이, 안 돼." "그런 것 왜 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분들은 힘이 되는 말, 격려하는 말을 잘 합니다. "당신은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힘내세요." 그런데 반대의 자세를 가진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넌 안 돼." "너 같은 게 할 수 있나 봐라." 기왕이면 살리는 말, 축복의 말, 긍정적인 말, 힘이 되고 격려하는 말을 해야지 죽이는 말, 저주의 말, 부정적인 말, 상처 주고 힘들게 하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말에는 실제로 그렇게 되는 능력이, 그런 큰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의 힘

그래서 두 번째로 ‘말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는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분들도 이 사실은 너무도 잘 압니다. 몇 해 전 에모토 마사루라는 일본 사람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써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결정체 하나하나가 모양이 다른 것을 보며 “그렇다면 물의 결정도 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물을 얼려 결정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랑’이나 ‘감사’라는 글을 보여준 물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이 나타나는데 ‘악마’라는 글을 보여준 물은 중앙의 시커먼 부분이 주변을 공격하는 듯한 형상을 보였습니다. 또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 물은 깨끗하게 정돈된 결정을 보여주지만, ‘망할 놈,’ ‘바보,’ ‘짜증나네,’ ‘죽여 버릴 거야’ 같은 부정적인 말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폭력을 당하는 듯한 형상을 드러냈습니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말이 몸의 70%를 차지하는 물의 성질을 바꾸고 그 변화는 몸에 나타난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말이 씨가 된다.”라는 격언이 정말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말끝마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 정말 죽을 일만 생기고, “망할 놈”이라고 계속 혼내면 정말 망하고, “잘 될 거야.”라는 말을 계속하면 정말 잘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격언에도 “어떤 말을 만 번 이상 되풀이하면 반드시 미래에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 영향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사람들은 옛날부터 잘 알아왔기에 임산부도 뱃속에 있는 태아를 생각해서 말을 가려했던 것이요,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화초에게조차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말의 힘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왜냐? 바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고 또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도 말씀(로고스)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말의 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말씀의 능력은 대단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하는 말 또한 그 힘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야고보서도 말의 힘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를 써가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재갈’의 비유를 듭니다. 함께 봅시다. “우리가 말(물론 언어가 아니라 타는 말이지요)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그렇습니다. 말을 가까이에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상상 외로 엄청나게 덩치가 큽니다. 그런데 그 엄청나게 큰 말을 작은 재갈 하나로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또 4절에는 ‘키’를 비유로 듭니다. 엄청나게 큰 배를 그 작은 키 하나로 마음대로 운전합니다. 이어서 5절에는 ‘불’을 비유로 듭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많은 나무를 태우고 산 전체를 태운다는 것입니다. 이 세 비유 모두 작은 것이 큰 것을 좌우한다는 내용인데 우리 혀도 이와 같아서 온 몸에서 보면 혀는 지극히 작은 지체지만 그 작은 혀가 온 몸을 살리기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는 것이지요. 앞의 두 비유, 즉 재갈과 키는 혀를 잘 조정만 하면 온 몸을 잘 조정하고 살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뜻이지만 뒤의 불의 비유는 말 한 마디 잘 못 해서 완전히 망하는 부정적인 비유입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재갈이나 키처럼 잘 조정해서 나 자신도 살리고, 문제도 해결하고 남에게도 힘을 주고 능력을 주는 아름다운 도구로 사용하기 바랍니다. 우리 말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힘 있는 말을 잘못 사용해서 작은 불씨가 온 산을 태워버리듯 우리 자신을 망치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다면 우리 또한 이 혀 하나 때문에 불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불교의 그림인 불화(佛畵) 한 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불교의 지옥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활활 타는 불 속에서 귀신들이 사람을 묶어 놓고 커다란 집게로 혀를 뽑고 있는 끔찍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로 죄 지은 사람들에 대한 벌이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장면이 없습니다만 오늘 본문 6절에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을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마지막에는 혀도 지옥 불에 타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말로 범죄하면 이 세상에서도 내가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할 뿐 아니라 장차 지옥 불에 우리 혀가 타버리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혀의 힘을 긍정적인 곳에, 살리는 일에, 돕는 일에 사용하기 바랍니다.

말의 분량

세 번째로 생각해 볼 문제는 ‘말의 분량’입니다. 우리의 말의 양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말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적어도 안 됩니다.

우선 말이 많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생’이란 초대교회에 있었던 교사들을 뜻합니다. 교회학교에만 교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는 성도들 모두에게 말씀을 가르치던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 교사들은 자연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목사가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득이하게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우리에게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2절에 나온 대로 우리가 말을 너무 많이 하다보면 자연히 실수가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면서 귀는 두 개, 입은 하나만 만드셨는지 아십니까? 말하는 분량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들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분들이 “예수장이들은 참 신기하다. 똑같이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인데 어떻게 남들보다 말을 몇 배 더 하냐?”고 합니다. 그래서 “말 많으면 공산당, 말 많으면 예수장이”라고 했나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말을 많이 하게 되고 또 잘 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야고보서 말씀처럼 선생이요 목사요 예수장이라 어쩔 수 없이 말을 많이 한다고 핑계 대지 말고 가급적 말을 줄이기 바랍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가 많아집니다. 무엇보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귀 기울여 남의 말을 잘 듣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안 듣는 모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가끔 교회에서 회의를 할 때 자기는 실컷 말해놓고 남이 말할 때 안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말할 때 남들이 안 들으면 화내는데 정작 자기 말 다 끝나고 나서는 남의 말을 안 들을 뿐 아니라 남이 하는 말허리를 마음대로 자릅니다. 안 될 일입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싶은 분들은 아무쪼록 말을 듣는 것의 절반 이하로 줄이도록 노력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말은 너무 많이 해도 문제지만 너무 안 해도 문제입니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동사건의 범인이 조승희라는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지금 큰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만 이 범인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그 충격은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특히 범인이 1차 범행을 한 후 방송국에 보낸 동영상은 정말 충격적인데 그 동영상에서 자신을 예수님에게 비유하고 순교자로 비유하면서 수많은 말을 늘어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본래부터 그렇게 말을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의 가족이나 동료학생들이 증언하는 조승희의 모습은 어렸을 때부터 말이 없고 혼자만 지내던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입니다. 말이 없다는 것은 그의 성격, 즉 폐쇄성을 뜻합니다. 이 경우 말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그 속에 극심한 분노와 공격성의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상 시 말이 없지만 그 분노와 공격성이 일순간 폭발되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지요.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선물인 말을 적절하게 잘 사용해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말이 너무 많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우리가 아무리 많이 해도 괜찮은 말들도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들을 ‘사랑의 천국방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잘했습니다, 믿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 모르고 그랬는걸요, 나 때문입니다.” 등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말을 안 하고 삽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 중에 무뚝뚝한 것이 무슨 멋있는 줄 아는 분도 있습니다. 남자들이 무뚝뚝하니 여자들도 따라서 무뚝뚝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잘 안 하니, 그래서 의사소통도 안 되고 감정의 교류가 안 되니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말을 잘 안 합니다. 감사가 메말랐거나 체면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잘 안 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용서의 말도 잘 안 합니다. 상대방을 격려하거나 신뢰하는 말도 잘 못합니다. 어떻게 될까요? 내가 적극적으로 나쁜 말을 해서 상처주고 아프게 하는 일은 없는지 몰라도 해야 할 말을 안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아픔이 됩니다. 캐배트 로버트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구상의 30억의 인구가 매일 밤 굶주림에 지쳐 잠자리에 든다. 그런데 인정과 격려가 담긴 짧은 말 한 마디에 굶주려 매일 잠자리에 드는 사람은 자그마치 40억이나 된다.” 혹시 내 주변에 정말 필요로 하는 말을 듣지 못해서 공허하고 아픈 가슴을 안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 내 남편이나 아내, 자녀나 성도들은 없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적절한 설명을 안 하고 무조건 상대방에게 강요하면 참 힘들어집니다. 혹시 우리가 자녀들이나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부모니까 무조건 순종해라, 윗사람 말 무조건 따라라.”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설명과 설득이 필요합니다. 또 적절한 말을 통해서 내 생각이나 감정도 전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속으로만 품는 것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내 의견도 조심스럽게, 또한 적절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불편한 마음, 분노 등을 말로 표현 못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마음속에 꼭꼭 쌓아놓기만 하면 참 위험합니다. 잘못하면 속병 나거나 한 순간 폭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말을 적절하게 잘 하기 바랍니다. 너무 많지도 그렇다고 너무 적지도 않게 잘 사용하십시오.

우리의 언어습관

지난주에 <삶의 변화 시리즈> 첫 번째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우리의 생활에서 어떤 부분이 달라져야 할 지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그 첫 번째가 우리의 언어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언어습관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언어가 바뀌지 않고는 거룩도 성화도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앞서 설명한 대로 언어의 종류를 잘 가려서 사용해야 합니다. 살리는 말, 힘이 되는 말, 긍정적인 말을 골라서 하십시오. 말의 엄청난 힘을 긍정적인 곳에 잘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말의 분량을 적절하게 조정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만 잘 해도 우리의 언어생활은 크게 달라집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말을 알려 드립니다. 이론적인 것만 말씀드려서는 안 되겠기에 아예 이 말만은 하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드립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하는 말은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예까지 들어가며 설명했는데 만약 이런 말이 우리 성도들 입에서 나온다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첫째, 직선적인 말투와 공격적이고 거친 말투입니다. 제가 처음 우리 교회에 부임했을 때 제일 당황스럽고 적응 안 된 것이 이런 말투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돌려 말하는 법이 없고 언제나 거침없이 콱 찌르듯 직선적으로 말합니다. 또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할 말이 있으면 표현을 부드럽게 하기보다 아주 공격적이고 거친 표현들을 써서 깜짝깜짝 놀라게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내 말을 들으면 상대방이 어떤 느낌이 들까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단 말부터 던져놓고 봅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이런 말투를 잘 쓰는데 정작 자신들은 잘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 경상도 사람뿐이겠습니까? 어느 동네 사람이든 상관없이 해서는 안 될 말투입니다. 기왕이면 부드러운 말투와 완곡 화법을 쓰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말할 분도 있겠지요. “치아라 마, 원래 생겨먹은 것이 이런데 우짜란 말이고?” 상당히 어색하지요? 그렇습니다. 원래 생겨먹은 대로 살 분들은 고치지 마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원하는 분들은 고치십시오. 영원히 경상도 백성으로 살 분들은 그냥 두십시오. 하지만 천국백성으로 살 분들은 고치십시오. 같은 말이라도 말투나 표현방법에 따라 상대방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말로 총이나 칼보다 더 깊은 상처를 상대방에게 입힐 수 있습니다. 언제나 말을 하기 전에 내 표현방법이 어떤지 생각해보고 하기 바랍니다.

둘째, 남의 말 잘 안 듣고 내 말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의 분량’에 관해 말씀드릴 때 이미 나왔지만 우리는 귀가 두 개요 입은 하나인 것처럼 남의 말을 귀 기울여 잘 듣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안 듣거나 무시하는 모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회의나 모임 때 지극히 조심하기 바랍니다. 앞으로 교회 회의 때 이런 잘못된 말투가 나오면 아무리 발언내용이 좋아도 제가 막겠습니다. 안 됩니다.

셋째, 항상 부정적인 말투입니다. “안 돼, 못 해, 그건 안 됩니다.” 하는 말투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정말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될 거라는 말부터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부정적인 말투는 습관성입니다. 항상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매사에 안 된다는 말만 합니다. 그래서 남이 해보려고 할 때도 돕기는커녕 오히려 힘 빠지게 하고 방해만 됩니다. 옆에서 함부로 판단하고 구경꾼처럼 손가락질만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회 일이 남의 일입니까? 다른 부서라고, 내 소관이 아니라고 마치 남의 일 하듯 함부로 비난하고 판단하고 함부로 말합니다. 얼마나 무책임합니까? 교회의 모든 일이 다 내 일 아닙니까? 애정을 가지고 격려하고 함께 도와야 합니다. 교회에는 “안 된다, 넌 못 한다”는 부정적인 말이 아닌 “한번 해 봅시다, 잘 될 겁니다, 당신은 잘 할 수 있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말이 어울립니다.

이사야 6:6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제일 먼저 스랍(천사?) 중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핀 숯을 들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제단의 숯불로 우리 입을 정하게 하는 일입니다. 입이 정결해지고 언어가 정화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거친 언어나 공격적인 말을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옛사람을 아직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이 언어가 정화되지 못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저도 그리고 우리 성도들 모두도 제단의 숯으로 우리 입술이 정화되어 언어가 바로 서야 하나님께 쓰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는 것처럼 어떻게 한 입에서 찬송가 저주가 나올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오늘 혹시 우리의 입이 이런 이상한 입이 아닙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는 자들의 언어생활은 잘 쓰면 좋고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식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쓰임 받느냐 못 받느냐를 결정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조건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 성도들의 입술은 모두 정화되어 아름답고 귀하게 사용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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