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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살과 뼈 (사 2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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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아멘

서신서의 말씀: 사도행전 10:34~40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24:36~43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다.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아멘


지난주는 부활절이었습니다. 부활절 까지는 부활을 향해서 부활을 목표로 살고, 부활절이 지난 다음부터는 거꾸로 살아야 됩니다. 부활로 부터 삽시다. 부활을 출발점으로 다시 삽시다. 이 삶이 없으면 십자가의 의미도 부활의 의미도 옛날이야기로 그치고 부활의 의미와 생동력은 죽어 갈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부활을 삽시다.

부활 얘기하면 반드시 죽음이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 죽음 이전에 고통도 있고 고통 이전에 이 세상에 태어남도 있습니다. 태어나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것이 유한한 인간존재의 운명입니다.

죽은 다음에 부활을 해서 우리에게 부활의 축복이 주어진다고 말씀 했는데 아무도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믿을 뿐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사람. 부활의 주인 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우리가 아는 예수그리스도라는 그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의 부활이 무너지면 우리 신앙은 다 무너집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믿는 것 자체가 오늘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린다는 자체가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십자가 이후에 온 부활. 그 부활은 확실합니까?

그 부활은 보증돼 있습니까? 부활의 능력을 오늘 우리가 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배 때마다 기도 때마다 찬양 때마다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시작돼야 합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하신 분의 말씀을 믿습니까?

부활하기 전에 죽어야 하고 죽으면 부활하고 부활한 다음에는 부활한 능력으로 살고. 우리가 아는 진실입니다. 우리 교회 강단에 오셔서 몇 번 설교도 하셨고 또 유명도 하시고 저 개인으로 보면 제 선생님 되시는 몰트만 교수가 최근에 쓴 책을 보냈는데 부활의 이야기 죽음의 이야기를 자기가 신학적으로 파고들고 또 목회하면서 느낀 점,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죽음과 부활 얘기한 것에 대한 배경을 썼더라고요.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제 남동생한테 유일한 독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그 아이가 네 살 때 자동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제 동생의 삶은 고난과 아픔의 삶을 살았습니다. 네 살 때 자동차에 치어 죽은 조카. 하나님은 어떻게 네 살배기의 죽음을 처리 하실까?

우리 아이에게 부활은 무엇인가? 두 번째는 한 살 많은 형님이 계셨는데 이 형님은 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정신 장애로 무의식 속에 살다가 누가 부모인지도 모르면서 열네 살 때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죽음과 부활은 어떻게 되나.

열여섯 살이 됐는데 2차 대전이 발발했던 시절입니다. 제 고향 함부르크에서 제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학교를 마치고 밤길을 거니는데 연합군이 투하한 폭탄의 파편에 바로 옆에 손잡고 가던 열여섯 살 동료 친구가 파편에 맞아 길에서 즉사 했습니다.저는 살아났습니다.

왜 하나님은 죽음을 주셨고 죽음 다음에 올 부활의 축복은 뭘까? 그리고 전쟁 와중에서 저는 영국의 포로수용소에 끌려가서 3년 동안 지내면서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죽음은 뭡니까? 부활은 뭡니까? 하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서 저는 과학자가 되려는 꿈을 접고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자가 되기로 해서 오늘까지 살았습니다. 그 얘기를 쓰면서 진실로 죽음은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합니까? 누구의 권위로 누구의 약속으로 무엇을 근거하여 죽음에서 부활이 나옵니까? 평생 신학적 테마입니다.

여러 가지가 많이 섞였지만 성경 말씀을 다 읽어보아도 성경 말씀에 특별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전체는 신앙과 죽음과 부활, 좁혀 말하면 죽음과 부활. 이 두 얘기를 중심으로 해서 살붙이고 옆으로 쓰고 뒤로 쓴 얘기이지 성경 말씀 전체가 죽음과 부활 얘기입니다.

다른 말로 십자가와 부활. 그건 하나님이 우리 인간 사회에 와서 벌인 하나님 자신의 사건. 그 사건 속에 우리를 다 초청하셔서 같이 죽자. 같이 살자. 그 이야기가 성경말씀 전체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놓고 우리가 수난절도 지켰고 지난주에는 부활절도 지켰습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이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죽고 믿지 않는 사람도 죽고 그 말을 우리가 자연사라 이야기 합니다. 늙으면 죽고 아프면 죽고 명이 다하면 죽고 예수 믿는 사람도 죽고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나이만 들었다고 심장기능과 몸의 기능이 다했다고 죽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은 피조물에게 주어진 유한한 운명의 결과이기는 하나 운명의 핵심에는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죄가 장성하고 죄의 결과 때문에 죽음이 옵니다.

자연적으로 죽기도 하지만 그 죽음 속에 죄의 결과인 죽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부활의 은총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자연적 죽음이 막아지는 게 아니라 죽음을 만들어낸 신학적 의미, 신앙적 의미, 철학적 의미, 도덕적 의미인 죄 때문에 죽었으므로 죄를 없애주시면 죗값을 치르면 죽음이라는 결과가 없지 않겠습니까?

죗값을 치르신 십자가 그 보혈로 우린 죗값이 다 치러지고 용서 받고 이젠 죽음이라는 것이 의미를 잃게 됩니다. 부활이 뭐냐 하면 자연사 안한다. 그게 아니라 이 죽음에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죗값 치르고 죽음을 유발했던 죄를 용서하시고 죽음도 무효화 시키시고 죽었으니 어떡합니까?

무효화 시키시고 죽었던 죽음은 무효. 다시 살릴 때 어떻게 살리느냐 하면 전에 살았던 삶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을 다시 만드십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저는 부활을 믿는데 아까 몰트만 선생님 얘기를 드렸습니다만 네 살 때 자동차에 죽어간 조카는 어떤 식으로 부활해야 합니까? 날 때부터 정신장애로 고통 받는 우리 아이는 부활할 때 다시 정신 장애자로 부활해야 됩니까?

길거리서 폭탄으로 죽은 사람은 죽은 모습, 아니면 죽기 이전 중에 무엇으로 부활해야 됩니까?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고 싶으십니까?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던지 그건 하나님과 우리 결단의 문제이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분명히 부활해야 하는데 부활은 무슨 모습으로 변화하느냐 하면 육으로 부활합니다.

영으로 부활합니다. 현재까지 살아있는 인간이 영육을 합친 만물의 영장이라는 영이 따로 있고 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영육을 합친 전체적인 인간이듯이 부활도 전체적인 인간으로 부활하는 것이지 제 몸속에서 제 살이 죽었다고 살죽고 혼만 쏙 빼다가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혼만 살고 육이 죽는 것도 아니고 죽으면 몽땅 죽고 몽땅 부활합니다.

그 얘기를 오늘 예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는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가 있어라. 제자들이 당황했습니다. 엊그제 죽었던 예수가 선생님이 살아나셨는데 살아나신단 얘기는 저희들한테 하신 적이 있고 자기들이 평소에 그 얘기를 들었으나 평소에 옛날부터 들은 얘기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사람이 죽으면 육이 썩고 죽으면 죽음이라는 육체가 감옥인데 그 감옥 속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혼을 감옥 속에 담고 있다가 육이 죽으면 영이 감옥 문을 열고 나가서 해방을 받고 자유 합니다. 부활은 영혼이 합니다. 육체는 썩습니다.

그래서 영이 해방 받아 본래의 모습대로 죽음이 없는 영원무궁한 영원불멸 죽지 않는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육은 썩고 영만 부활합니다. 이게 이제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영육이원론, 영혼부활론입니다. 그 얘기는 다 들었습니다.

그러면 괴로우면 빨리 죽는 게 낫지 뭐 하러 오래 삽니까? 어차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게 혼이 해방 받는 거라면 뭐하려 육체 같은데 제 혼을 왜 속박 합니까? 혼을 왜 감옥에 오래 가둡니까? 차라리 진지하게 말하자면 빨리 죽고 해방을 누리자. 영원의 해방. 영원불멸. 이런 얘기는 제자들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예수님께서 오늘 부활하신 주라고 하고 딱 나타나는데 제자들의 첫 반응입니다. 이것은 영혼이다. 아니 오늘 성경 말씀대로 하면 유령이다. 귀신이다. 귀신 되어 우리 주님이 나왔구나.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등과 아픔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부활한 유령은 살이 없다. 유령은 뼈가 없다. 유령은 먹는 것도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손자국을 만져 보아라.

내 발자국도 만져 보아라. 내 몸도 만져 보아라. 살았던 그대로 방식 십자가에 달렸던 방식 그대로다, 하고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부활은 인간 전체 부활이지 어느 부분만 부활이 아닙니다.

단, 제가 아무리 육체가 좋아도 전 죽을 수밖에 없고 지금은 썩을 육체를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끝날 육체를 가지고 제가 다 쓰면서 삽니다. 성경 말씀은 육으로 부활하되 부활한 몸의 육은 썩지 않는 몸이다. 성경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내 못 자국을 보아라. 팔 자국을 보아라. 발자국도 보아라. 몸도 다 보아라. 몸은 몸인데 썩어야 됐던 몸이 아니라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그것도 육으로 부활하셨는데 그것도 육으로 부활하셨는데 썩지 않을 육을 입고 부활합니다.

어느 모양으로 부활했는지 그건 그때 우리 눈이 바꿔주면 됩니다. 이런 사실을 가리켜서 오늘 예수께서는 나는 유령이 아니다. 저도 유령 예수는 믿고 십지 않습니다. 귀신 예수는 싫습니다. 제가 왜 귀신을 섬겨야 됩니까? 내가 왜 유령과 살아야 됩니까?

저는 몸을 부딪치고 살고 싶습니다. 같이 울고 싶고 같이 웃고 싶고 끌어안고 살고 싶고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이지 어떻게 영혼만 삽니까? 귀신으로만 삽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다.

어떻게 증명하시려 합니까? 예수의 증명 방법입니다. 먹을 것 좀 없냐. 우리가 먹던 물고기 조각이 있습니다. 구운 물고기가 있습니다. 가져와라. 예수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물고기를 맛있게 드셨습니다. 아주 드라마틱한 얘기지요. 물고기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함께 드는 부활하신 주 보셨습니까?


귀신이 어떻게 먹습니까? 우리 제사지낼 때 귀신도 먹으라고 마실 거 먹을 거 같다 놓습니다만 그건 상징적인 얘기이고 오늘 부활하신 주님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는 맛있게 저희와 함께 먹는 예수님의 부활을 저는 봤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저는 봤는데 어떤 분의 얘기는 그럼 죽는 게 뭐고 부활은 뭐냐고 했더니 겨울과 같고요 부활은요 봄입니다.

겨울에 다 죽었는데 겨울을 이기고 지나갔더니 그 속에서 새싹이 나와서 새로운 나무가 움텄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부활하는데 내가 먼저 부활할 테니 나와 함께 죽으면 부활에 동참합니다.

사도바울 선생님은 자연사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죗값으로 죽은 사망을 얘기하고 죗값은 사망입니다. 그랬는데 부활하고 보니까 우리한테 주님이 주신 명령가운데 꼭 염두에 둬야할게 있습니다.

죄 지면 죽기 때문에 죄를 안 짓고 죗값을 사망으로 치른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용서를 빌어야 됩니다. 부활하신 분의 부탁입니다. 죗값이 사망이 아니라 이제는 사망 죽음의 값이 죄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면 죽음을 알고 죽지 않으려고 죽기 싫어서 우리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제가 죽지 않으려고 약도 많이 먹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운동도 합니다.

또 제가 죽지 않기 위해서 많은 사람의 죽음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제가 살겠다고 내 집단이 살겠다고 우리끼리 살겠다고 인간이 살겠다고 얼마나 많은 자연을 파괴합니까?

자연도 구원의 대상인데 생명도 제 구원의 대상인데 내가 죽지 않으려고 수많은 죽음 식물의 생명 동물의 생명 수많은 생명을 내가 죽이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가슴 아파 하신다. 죽을 때는 죽어라.

반드시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신학적으로 보면 첫 번 아담과 하와가 태어났을 때 그때 창세기 얘기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생명을 창출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 무라고 하는 말 라틴말로 nihilo. 그렇습니다. creatio ex nihilo. 무에서 창조했습니다. 오늘 부활의 말씀에는 두 번째 창조는 무에서 창조하지 않으시고 두 번째 창조는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말 옛것이라는 말. vetere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creatio ex vetere 그 말은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곳에서 부활을 창조해 냅니다. 무에서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이 이젠 죽음에서 부활된 생명을 만드십니다.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된 제2의 창조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삶은 부활의 능력 힘입어서 살아가는 제 2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뼈와 살은 있습니다. 부활했다고 거듭났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뼈와 살로 상징되는 우리 세계의 내적. 인간 가정 저 자신 모든 삶을 옛날방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새로운 부활의 희망 가지고 살아갑시다.

그러면 오늘 살아가는 삶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음을 향해 살면 괴롭지만 승리했다, 부활이 이겼다, 하나님이 부활의 알을 깨고 새 생명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면 지금 삶이 아름답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꿰뚫고 들어오면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좀 사십시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서 제가 들은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큰 투명한 물통 하나를 가지고 와서 그 물통을 학생들한테 보여줍니다. 보여주고 제일 먼저 뭘 집어넣었냐 하면 골프공을 가득 채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묻습니다.

가득 찼느냐. 가득 찼습니다. 두 번째 골프공을 가득 채우고 골프공속에 빈 공간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조약돌을 가져다가 흔들면서 조약돌을 다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조약돌이 또 가득 찼습니다. 찼느냐. 그것도 가득 찼습니다. 세 번째, 더 작은 게 뭘까. 그래도 틈새가 있습니다.

골프공과 조약돌. 아주 가느다란 모래 한주먹을 가져다가 모래를 퍼붓고 또 뒤흔들었습니다. 가득 찼느냐. 찼습니다. 어느 것이 가득 찬 거냐. 골프공은 골프공대로 가득 찼고요 조약돌대로 가득 찼고요 모래는 모래대로 가득 찼습니다. 선생님이 하시고 싶은 얘기 같습니다.

가장 큰 골프공이 뭐냐 하니까 하나님 이야기 내 가족, 나라, 민족. 거대한 우리 삶의 영역을 골프공이라 했고 조약돌은 나 혼자 가족과 함께하는 직장이나 집이나 자동차나 교육이나. 모래는 뭐냐 제가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느끼고 살아가는 가장 작은 관심사들, 이해관계들. 그런데 제일 먼저 여러분의 가장 작은 이해관계라 이름 하는 모래들을 먼저 채웠다면 그 모래 속에 조약돌 들어갈 여유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가장 큰 비전인 골프공은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먼저 큰 거 채우고 두 번째 작은 거 채우고 마지막 자기 자질구레한 약속들 축복들 채우면 하나님은 모든 게 채워지도록 질서를 잡아놨습니다.

이 분의 얘기는 사랑하는 여러분 큰 거 중요한 거 우선순위를 잘 찾으십시오. 어차피 부활의 능력은 다 주십니다. 부활의 능력대로 사는데 커다랗고 아름답고 거대한 세계를 집어넣고 그 속에 작은 욕심들은 나중에 집어넣어도 채워집니다. 마지막 이분이 쓴 얘기들을 보면 마지막 넣을게 하나 남았습니다.

그건 뭐냐 하니까 순서대로 다 넣는 사람은 또 다른 여유가 있는데 둘이 앉아서 커피 한잔씩 나누시고 또 한잔은 퍼서 그 모레에 부어 보십시오. 커피 한잔도 들어갑니다. 큰 것부터 시작한 차곡차곡 채워놓는 그 인간의 여유. 이분은 커피로 표현했습니다만 커피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죽음이라 이름 하는 곳에서 알을 까고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창조를 했는데 새로운 창조를 한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 다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그 부탁하신 분의 눈으로 안경을 쓰고 제가 마태복음을 읽어 보겠습니다. 들의 백합화 당신들이 가꾼 일 없지 않느냐. 살아있다. 공중을 나는 새들도 여러분이 기르지 않지만 살아있다.

하물며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대 인간들의 생명을 살리지 않겠느냐 죽어도 내가 새로운 재창조를 할 텐데. 이제 여러분은 산다. 죽어도 산다. 부탁입니다.

지금 살아있을 동안에 가장 작은 인간의 욕심 먼저 채우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고 세상 나라와 세상의 의를 구하여라. 그대들이 하고 싶은 모든 욕망을 다시 채우면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욕망 버리고 살아라. 그 뜻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의를 구해라. 그리고 그곳에 작은 곳들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하나님은 여유 있으신 분 우리한테 부활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보고 그 나라와 그 의로 먼저 채우면 그대는 채울 공간을 주마. 크게 살자. 중심을 세우고 살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말고 살고 이 삶을 하나님이 주신 삶이라고 삽시다.

부활이 있지 않습니까? 죽음에서 새로운 창조를 했답니다. 그것이 신비스런 부활인데 그 부활을 우리는 오늘 성령을 통해서 약속 받았습니다. 그렇게 삽시다. 부활을 삽시다. 아름답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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