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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기도와 찬미로 (행 16: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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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무참하게 쏴 죽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지난 주간 미국에서 벌어진 한 한국인 학생에 의해 벌어진 총기난사로 인해 자그마치 32명이라는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면 이 세상의 기둥 역할을 할 귀중한 생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미치광이에 의해서 무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것도 그렇게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정신과 치료도 받았던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또 이민 사회에서 왕따 당하며 살았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멀리 외국에까지 가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수고를 아까지 않고 키워왔던 부모를 생각해 보아도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자기를 키워준 부모를 배신한 것이요 이 땅에 생명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 앞에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내가 힘들게 살아왔다고 해서 나를 붙들어준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마구잡이로 총질을 해댈 수 있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지요?

오늘 본문은 어떻게 보면 그렇듯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비참하게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아름다운 감동에 넘치는 이야기로 끝나고 있다는 것이 어제의 사건과는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비참하게 살아가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바울과 그 일행이 빌립보 성 밖 강가에 있는 기도처로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납니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게 해 주던 여자였습니다.

이 여인은 노예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귀신이 들려 있는 노예입니다. 보통은 귀신이 들려 미치광이로 살아간다고 하면 당연히 그 주인의 입장에서는 그 귀신들린 노예를 죽여 버리거나 내다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예는 귀신이 들려 점을 쳐 줌으로 해서 오히려 주인에게 돈을 벌게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신들린 무당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점쟁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노예이기에 당연히 그 수입은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귀신이 들린 것은 좀 안 된 이야기인지 몰라도 그래도 그 노예로 인해서 돈이 생기니까 그냥 귀신들린 상태로 점을 치도록 여인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바울과 그 일행을 따라오면서 큰소리로 “이 사람들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계시다”라고 외쳐댑니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귀신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알아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는 바른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바울과 그 일행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이 여인은 압니다. 아니 그 속에 있는 귀신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귀신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입니다 라고 외쳐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귀신에게 명령하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 바른 소리를 하는데 나오라고 합니까? 귀신의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입을 열어 예수를 구세주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지 귀신의 증거로 되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가 며칠이고 계속 이렇게 하자, 참다못한 바울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령한다. 그 여자에게서 나오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귀신이 그 여자에게서 나왔습니다. 당연히 그 여자 노예는 맑은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올바른 사람으로 살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의 입장에서는 고마워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노예를 통해서 돈을 벌수가 없게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종의 주인들은 돈을 벌 희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광장에 있는 로마 관리들에게로 끌고 가서는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우리 도시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로마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거나 실천할 수 없는 풍습을 선전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발을 합니다. 그러자  군중들도 합세하여 바울과 실라를 공격했습니다. 로마 관리는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고 매질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저 돈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이 메마른 세상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되고 내게 돈벌이만 된다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오히려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요즘 다단계라고 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높은 수익을 올려준다고 속여서 처음 한 두 사람은 돈을 버는 것처럼 만들어주고는 뒤따라 뛰어드는 사람들을 수렁에 빠뜨리고 그 돈을 가로채는 악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도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돈벌이라고 하니까 거기에 속아서 몰려드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정말 돈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했지만 어디 지금 우리가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어서 그렇게 힘들어 하는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집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 전국에 있는 집들만 가지고 따진다면 모든 국민이 다 들어가 살고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살 집이 없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조금 작으면 어떻습니까? 조금 불편하면 또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좋은 집 넓은 집 하고들 떠들어 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그로 인해서 재산이 더 늘기를 바라고 조금 더 편한 것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수입이 좀 적으면 또 어떻습니까? 그런데 다 남들처럼 아니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하니까 결국 더 더 더 하면서 힘들어 하고 속상해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과 2, 30년 전만 하더라도 먹을 것조차 없어서 힘들어 하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까? 아니 단칸방에서도 일곱 여덟 식구가 한 이불 덮고 살던 그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이들조차도 한 방에 둘이 쓰는 것조차도 불편해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속상해합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명품에 목을 매었습니까? 그런데 애들 말로는 째라고 하나요? 지금도 그런 말을 쓰는지는 몰라도 유명 상품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동차를 타더라도 이왕이면 좋은 차 큰 차만 찾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리고 차의 크기에 따라 신분을 따지는 그런 세상을 과연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렇게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만든 것이 과연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야 아파하든 말든 나만 괜찮으면 되는 세상 그러니 어찌 다른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지 않겠으며 목숨 하나 죽이는 건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는 세상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달라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돈이 좋은 세상이고 인정이 말라가는 세상이라고 해도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는 아직까지 오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살면서도 자그마치 30억 원을 고아원과 같은 곳에 끊임없이 기부해온 한 가수 이야기처럼 우리는 이렇게 이웃의 아픔을 내가 함께 아파하며 감당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조금 손해를 봤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죽이려고 대드는 여기 빌립보 성의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해도 우리도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 주신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우리도 이웃들에게 베풀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사람을 감싸안아주게 될 때 진정 이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결코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뒤따라 다니면서 귀찮게 계속 외쳐대는 여인에게 들려 있는 귀신을 내쫓아준 것이 죄입니까? 그런데 로마 관리들은 고소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고 바울과 실라를 호되게 때린 뒤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간수에게 그들을 잘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간수는 그 명령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깊숙한 감옥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쇠고랑을 단단히 채웠습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실라는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따지고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냐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묵묵히 그 매를 다 맞습니다. 호되게 때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왜 억울하게 그냥 맞고만 있습니까? 당연히 따지고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 그렇게 어수룩해서야 어떻게 사느냐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그랬더라면 빌립보 간수장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작은 일에도 불평을 합니다. 원망을 합니다. 아니 누가 조금 잘못했다 싶으면 그것을 가지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렇게 야단치고 욕하고 매질해서 달라집디까? 물론 잠깐은 되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수록 더 삐뚤어지지 않는가요? 그럴수록 더 마음을 닫아 버리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잘 하는 척 해도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만 더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안 보는 데서는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게 되지를 않습니까?

여러분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가지고 지적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문제가 보이면 조용히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바나바가 정말 위대한 것은 그는 결코 야단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젯거리가 되는 사람조차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권고하고 격려하기를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외면하던 사울도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될 수 있었고 그 바울조차도 외면했던 마가가 베드로 사도의 좋은 조력자로서 수제자가 되고 복음서의 위대한 기록자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일이 있거든 침묵하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거든 입을 다무십시오. 원망할 일이 있을 때 오히려 잠잠하십시오.

지금 바울과 실라가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억울한 매질을 그대로 다 당하고 감옥에까지 갇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매질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따지고 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온 몸이 쑤시고 아파서 잠도 오지 않는 그 밤중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른 죄수들도 그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감옥까지도 흔들릴 정도의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감옥 문이 모두 열리면서 죄수들을 묶고 있던 사슬들도 다 풀렸습니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 감옥 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벌써 도망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칼을 꺼내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큰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당신 몸을 해하지 마시오. 우리는 다 여기 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해서 안으로 뛰어 들어가, 두려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 “선생님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날 밤, 그 시각에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다고 원망만 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바울이 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시비하기보다는 그런 문제가 눈에 뜨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바로 세워주시기를 위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아무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가 이런 저런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저에게 이런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저를 용서해 주시고 혹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는 다만 이렇게 간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오직 감사함으로 간구할 뿐입니다”라고 하며 하나님께 엎드린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사람을 바로 세워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타까워하며 위해서 중보기도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정죄하고 아주 죽일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외면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로 인해서 더욱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더 멀어지게 만들고 더 반발하게 만들고 더 어긋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요? 무엇이 은혜입니까? 내가 받을 수 없는 가운데서 받았기에 은혜가 아닙니까? 죄 가운데 살아왔던 우리가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변화 없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불러 자녀로 삼아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그것이 바로 은혜가 아닙니까? 오히려 그런 나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그것이 바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 사랑을 받았습니까? 아무런 자격도 내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방황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나를 오히려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내게 채워주고 계시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 역시도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힘들어하고 상대방이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오히려 진흙탕 속에 헤매고 있을 때 그 곁을 지켜주고 말없이 그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그 사랑이 오히려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사랑이야말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그 아름다운 모습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억울해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했더니 옥문이 열리고 그로 말미암아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게 되지를 않았습니까? 그 결과 빌립보 간수장과 그 온 집이 다 예수를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을 우리 마음 속 깊이 새기십시다.

지금 내 안에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합니까? 너무도 힘들고 지쳐서 다 집어던지고만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오히려 감사함으로 찬양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위로가 내 안에 가득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나를 옥죄고 있던 감옥 문이 활짝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무엇이 우리를 꼼짝 못하도록 묶고 있습니까? 무엇이 나를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데 감사하십시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 정말 눈꼴사나운 것이 눈에 뜨였을 때 오히려 더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일로 인해서 더욱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누가 원망스럽거든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축복해 주십시오. 그럴 때 오히려 나를 묶어 매고 있는 그것으로부터 내가 풀려 자유롭게 될 뿐 아니라 그것이 복음을 전하게 되는 귀한 기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 감사의 사람, 찬양의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생명을 건져 구원케 되는 귀한 기회를 얻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열려지기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자 보십시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먼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진이 나고 감옥 문이 다 활짝 열렸을 때 간수는 눈앞이 노래졌습니다. 당연히 죄수들이 다 도망쳤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요 그렇다면 자기에게는 간수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이제 죽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감옥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옥 문을 다 열어 주셨고 묶인 것을 다 풀어 주셨지만 그러나 아직 감옥을 나서도 된다고 하는 말씀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무슨 말씀을 주실지 그대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니 간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깜짝 놀라서 바울과 실라가 간수를 부릅니다. “당신 몸을 해하지 마시오. 우리는 다 여기 있습니다.” 그랬더니 간수가 뛰어 들어와 그들 앞에 엎드립니다.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정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입니다. 그래 그들을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와 “선생님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예수를 전할 수 있었고 이미 마음이 열려 있던 간수는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자기 온 가족들도 함께 예수를 믿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는 지진이 나고 감옥 문이 열리고 모든 묶인 것이 다 풀려진 것을 도망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내게 유리한 기회가 아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누가 생명을 건져 구원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그것은 내게 유익한 쪽이 아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또한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접촉하기를 원하신다는 마음이 들거든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달라고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면 어떻습니까?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때조차도 우리가 상대방을 더 세워주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으로 격려한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이 힘들어할 때 그 곁을 지켜주는 그것만으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전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도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참된 변화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사랑만이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감동될 때 그 마음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사람으로 우리 모두가 새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계속해서 축복하고 중보하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기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구역 예배도 단순한 예배시간이 아닌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시간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입술로 증거하고 우리 안에 있는 아쉬움과 고통과 힘든 것들을 함께 나누고 함께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나 됨을 이루게 될 때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혼자였습니까?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았습니까? 너무도 외로웠습니까? 이제부터는 먼저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도록 하십시오. 모든 불평과 원망을 감사와 찬양으로 바꾸십시오. 다른 사람의 문제들, 나쁜 점들이 눈에 보일 때 사랑으로 감싸 안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이런 사랑으로 우리 삶의 모든 묶인 것이 풀려지고 우리 영혼이 사탄 마귀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한 삶을 풍성하게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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