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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픔을 아는가?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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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 목사님의「하루의 은총」이라는 시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뜻을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루만 산다면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부질없는 생각들로 둑을 쌓고 욕망의 물들을 채우려 함에 오늘이라는 이 소중한 은총을 잃고 삽니다.

누가 왼편 뺨 치거든 오른편 뺨도 주리라 악을 악으로 이긴 적은 없어 선으로 악을 맞으라 말씀이 계셨습니다. 분노의 후유증으로 눈이 멀어질 때 용서의 후유증으로 눈이 밝아지리니 환난이 두렵지 않음은 당신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죄짓기 쉬운 어리석음, 선하기 쉬운 지혜로움, 이기고 지는 사람, 지고서 이기는 사람, 이것은 진정 신비이려니
오늘이라는 하루의 거룩함을 살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원히 숨겨진 비밀입니다. 하루만 산다면 우리는 왕이 되어도 부럽지 않고 걸인이 되어도 천하지 않습니다"

고훈 목사님은 하루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서도 그 하루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깨닫고 사는 사람이 있고 그 하루를 그저 덧없이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하루를 저주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이번 주를 휴가로 보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 자신이 땅에 서서 팔을 벌려 보았습니다. 팔을 위아래로 돌려보고 좌우로 돌려보았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의 한계였습니다.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팔을 벌려 위아래로, 좌우로 뻗쳐 그 손끝이 미치는 곳까지만 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순간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내 자신이 잡을 수 없는 것까지도 잡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크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바르게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에 그 회당 안에는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 하셨을 때 여인의 병이 나았으며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분내면서 왜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을 고치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눅12장에서 영적 무지에 대하여 유대인들을 따끔하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때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을 고하였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시대도 분변치 못하는 영적 소경이라는 꾸짖음에 반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 소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자신들은 갈릴리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것이요 자신들은 경건한 사람들임을 은근히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셨습니다. 빌라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결코 특별한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인간에게 임한 비극이나 재난이 저지른 죄의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나머지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어서 비참한 죽음, 곧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실로암에 있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도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악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실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회개하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죄 값으로 징계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자신을 제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만약 우리도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렇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을 받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되지 않고 회개함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회개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그 길은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로만 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했던 말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리라"고 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일까요?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는 없는 자와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세리들은 정한 세 이외에는 더 거두지 말고, 군병들은 사람에게 강포 하지 말며 무소 하지 말고 받는 월급을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긍휼히 여긴 자는 긍휼히 여깁니다. 아픔을 알아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를 압니다. 

1. 18년 동안이나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18년 동안이나 앓으며 꼬부라져 허리를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병명은 모르지만 병의 원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들려서 나타나는 병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육체적인 질병으로 인하여 사회적 낙오자요, 종교적으로는 죄인으로 멸시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여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 나오는 것조차도 사람들과 회당장은 달갑지 않게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여인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18년 동안이나 허리를 펴서 하늘 한번 쳐다보지도 못하고 괴로움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런데 보라 십팔년을 병약함의 귀신들린 한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꼬부라져서 전혀 자신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이 여인은 허리가 굽어져 있어서 자기 자신조차 일으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상태는 단순히 이 여인의 육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상태가 이랬다는 것입니다. 즉 병에 붙들린 여인은 구부러진 허리와 구부러진 신앙과 인격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외적인 것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고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영혼까지도 좀먹어 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적인 믿음을 키워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귀로 알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아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욥은 고난이라는 광야를 통해 이전에 비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체험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이 휘어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본 후에 또 다른 이웃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몸이 불편하며 사람들로부터도 달갑지 않은 대우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회당에 나온 여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8년 동안을 사단에 매여 고통을 당하는 여인의 아픔을 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인의 믿음과 아픔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인아 네 믿음이 좋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면 "여인아 병으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이 심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신 후 여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여인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여인의 아픔이 사라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치유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실제로 우리들 주변에는 육신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런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있어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나누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분내는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회당장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라고 했습니다. 여기 "분내어"라는 말은 단순하게 화를 냈다는 것이 아니고 "격분하다. 분통을 터뜨리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18년 동안을 병으로 고통을 당한 여인을 치료했더니 그것을 보고서 대단히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회당장이 화를 내었습니까? 회당장은 단순하게 회당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아닙니다. 회당의 모든 예배를 주관하며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만 하는 지도자입니다. 회당장이 볼 때 예수님의 안식일에 하신 치유사건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지 않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회당장이 화를 낸 것은 영적 무지함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6절에서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제자들에게 들은 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 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뜻을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 무지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항상 화평과 온유함이 따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하기 때문입니다.

호4:6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게 되면 격분하여 의를 핍박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무지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육적 질병과 영적 무지함에 있는 자들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의 괴로움과 고통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감싸 주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질병의 아픔과 영적 무지의 아픔을 알고 돕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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