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라 (요 6:1-15)

  • 잡초 잡초
  • 345
  • 0

첨부 1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라 (요 6:1-15)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자모실에서 예배를 드리던 한 젊은 엄마가 속상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모실에 있다 보면 자연히 자기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보는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참 똑똑한 아이를 보았답니다. 그 아이를 보다가 자기 아이를 보니 괜히 짜증이 나서 괜히 머리를 쥐어 박았답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가 머리 좋은 것을 기뻐하고, 머리 나쁜 것에 낙심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 처럼 근거없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가치관입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근거없는 교만에 사로잡히거나 불필요한 열등감을 갖고 사는 지 모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이것은 경험에서 나온 말이고, 역사책에서 배운 것입니다. 행복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쓰임 받는 것도 성적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똑똑한 제자도 있었고, 좀 둔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똑한 제자를 기뻐하셨까요? 아닙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머리가 좋은 제자를 꼽으라면 가룟유다 빌립 도마 정도인데, 한결같이 예수님의 근심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5,000명이 더 되는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빌립을 떠 보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빌립에 대하여 걱정이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빌립이 너무 똑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상대로였습니다. 빌립은 그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떡 한 조각씩 나눠줘도 200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즉각 계산해 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와, 대단하다!”하고 입이 벌어졌을 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100명 점심 식사를 준비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 지 금방 계산이 되십니까? 식당을 하시는 분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얼마가 드는지 얼른 계산이 안 나올 것입니다. 5,000명이 먹을 것을 금방 계산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는 속으로 ‘아직 빌립은 멀었구나!’ 하셨습니다. 똑똑한지는 몰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자질은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안드레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점에서 안드레는 빌립보다 인간적인 능력으로 뒤떨어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 니다. 빌립 같은 사람은 그런 일은 안합니다. 사람이 오천 명인데 그것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먹여야 할 사람은 5천명인데,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어차피 소용없는 일인데 왜 수고를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드레를 귀하게 보셨습니다. 안드레는 똑똑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강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먹이고자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역시 막막하였지만 사람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며 먹을 것을 가진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한 아이가 가진 도시락 하나 밖에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지간 사람이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겠지만, 안드레는 그것이라도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여기에는 계산과 논리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충성스러움 만이 있었습니다. 그런 안드레를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한 주간 본문을 묵상하다가, 이것이 제 이야기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굳이 따지라면 빌립 쪽 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계산이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따져서 무슨 일이든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빌립을 보시는 주님, 안드레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제게 ‘나는 네가 안드레 같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무리들을 먹이시려고만 했다면 이런 과정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굳이 빌립을 떠보려고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실 때 소년의 도시락을 받아들고 축사하고 먹이시는 복잡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있어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왜 오병이어를 통하여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제자들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을 일을 내다 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여야 하는 상황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인간의 판단으로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빌립 같은 사람은 얼핏 자질이 뛰어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함께 주의 일을 해 보면 실망합니다. 본문의 빌립처럼 주님의 일에 대하여 계속하여 “안된다, 못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똑똑한 빌립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보여 주고 싶으셨습니다.

안드레도 예수님의 마음은 알았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으로 5천 명을 다 먹이실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져왔으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하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예수님의 권위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안된다, 못한다” 는 말은 예수님께서도 못하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주님도 못하실까?’ 생각합시다. 이것이 주님이 정말 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명령인가? 그 점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건널 때 자동차를 조심하는 것보다 더 조심할 것은, 하나님이 내리지 않으신 결론을 자신이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된다, 안된다”를 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먼저 “된다, 안된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된다 안된다는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명령이냐? 주님이 하시려는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주님의 계획이 이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절)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찬송합시다. 감사합시다. 주님은 어떻게 하실지 다 아십니다.

  마더 테레사가 고아원을 세울 때 "테레사와 이 적은 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에게 테레사와 이 적은 물질만 드리면 하나님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은 오히려 기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드러낼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약한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약한 것을 기뻐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10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약한 것을 보는 눈을 새롭게 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나와 함께 계시고 그 분이 친히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나면 차라리 내가 약한 것이 훨씬 기쁘고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고 하셨던 것이고 또 우리가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때때로 여러분의 약한 것 부족한 것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속상한 일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하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미국 뉴욕에서 정신과 의사로 개업하고 있던 배경희 집사님이 한국에 다녀 가신 후 글을 쓰셨는데 저를 가리켜서 "앞에서 보아도 목사고, 옆에서 보아도 목사고 뒤에서 보아도 목사더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저를 창찬하시느라고 그런 글을 쓰신 것 같았는데, 사실 그 표현은 저의 열등감의 하나였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영락없는 목사다! 모범생이다!’ 이런 평가가 제게는 세상적인 매력은 없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이리 보아도 목사요 저리 보아도 목사가 아니라, 이리 보면 가수같고 저리 보면 연예인이나 만능 스포츠맨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저 자신이 영락없는 목사로 비취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들어 생각해 보니 사실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잘 놀지 못해도 너무나 좋은 아내를 얻었습니다. 살면 살수록 깨닫늗 것이 교회 섬기는 일 하나나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재주가 없으니, 한 눈 팔 데가 없었고 시간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목사의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설교에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까 하는 생각보다, 말씀을 전하는 내가 어떻게 평가될까 하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의 좋은 설교에서 은혜를 받기는 커녕 괴로웠습니다. 비교의식에서 나온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린도전서 1장 27-29절 말씀으로 저의 열등감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하나님도 잘난 사람 유능한 사람을 택하여 쓰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생각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강박 관념이었습니다. ‘공부 잘해야 하고 유능해야 하고 항상 앞서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에 진심으로 아멘이 되지 않아서 3일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그 만큼 내 마음의 열등감이 크고 완고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설교가 편해졌습니다. 다른 목사님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인간적인 능력으로 장래성을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역사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보리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은 이름도 없는 ‘아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로 주님은  5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
‘아이’라는 말은 인간적으로는 안드레 보다 더 무능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할 때, 어른 데리고 일하겠습니까? 아이 데리고 일하겠습니까? 당연히 어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예수님은 어린 아이 데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시려고 예수님이 쓰신 사람은 ‘아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능력을 보시고 우리를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약한 것을 쓰시는 것인가? 그 점에 대해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것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한 것도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가 더 놀랍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따금 새벽 기도회 시간이 되었지만 몸이 너무 피곤하여 오늘만큼은 쉬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 때마다 일부러라도 벌떡 일어납니다. 교인들의 새벽 기도 자리가 빈 것을 보면 목사인 저도 마음이 허전한데, 담임 목사인 제 자리가 빈 것을 보는 교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허전하겠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새벽기도회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교인들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비록 졸더라도 가겠습니다. 사실 담임 목사로서 제가 할 일이 새벽기도회 자리 지키는 정도인 것임을 깨닫습니다. 교회 부흥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벽 기도 용사들에게 힘을 주고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 때, 너무 피곤하여 눈만 감으면 졸다가 갑자기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도 감리교 목사이셨습니다. 6.25 전쟁 때 순교하셨지만 일제 시절 목회한다는 것은 먹고 살기도 어려우셨습니다. 그래서 잠깐 장사하러 시장에 나가셨던 적이 있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께서 “여보, 교회로 돌아갑시다.” 하셨답니다. 그 말을 들으신 할아버지께서 짐을 정리하고 다시 교회 일을 하시게 되었답니다. 제게 있어서는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그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께서 하실 수 있었던 일은 굶더라도 목회의 길을 가셨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분이 오병이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는 뵙지 못했지만 할머니는 어려서 뵌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머니는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산에 올라가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했는데, 어느 날은 기도하던 자리에 호랑이 발자국을 보기도 하셨답니다. 저를 목사로 바치신 것도 할머니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할머님의 기도, 그것이 그 분이 드릴 수 있었던 오병이어였습니다. 그 분들은 그것으로 충분하셨습니다.

  한국을 위하여 일하는 스티브린턴 선교사는 4대 째 선교사입니다. 스티브린튼 박사는 지난 수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사랑의 구호품을 싣고 북한으로 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나귀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스티브 선교사님이 오늘날 하나님이 쓰시는 충실한 나귀로 만들어진데는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5년 4월, 유진벨목사 부부가 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들 부부는 평생을 목포, 광주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한국에 묻혔습니다. 딸인 사로트선교사도 결혼하여 일생을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스티브선교사의 어머니 로이스선교사는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 원장으로 평생 결핵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로이스선교사는 최근에 호암상을 수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코 우리가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예하고 따른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병이어의 순종입니다.

출애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 난민 집단이었습니다.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떠돌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나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힘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직선으로 가면 1주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 동안 뺑뺑뺑 돌렸습니다. 40년 동안 불기둥 구름기둥만 바라보고 아침마다 만나를 먹고 살았던 3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청난 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는 일에 훈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일에 훈련된 300만 명! 엄청난 힘입니다. 목회를 해 보니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교인 100 명만 있어도 세상을 뒤집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 100명만 훈련되어 세워질 수 있다면 세상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300만 명이 그러니, 그 카리스마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가나안 사람들이 소문만 듣고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야에 몰고 나갔더니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물! 물! 죽겠다! 힘들다! 고기를 달라! 부추를 달라! 한 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광야 생활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더니 싸우지도 않고 가나안 사람들이 다 문걸어 잠그고 숨어버린 것입니다.. .

성도 여러분,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그저 사람 머리가 똑똑한 것과 비교가 안됩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평생 누구도 그런 경험을 못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바라보고 나갔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을 그렇게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능력, 그리고 소유, 또 지금 현재의 처지와 형편에 결코 무너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주님은 이미 계획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하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