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21)

  • 잡초 잡초
  • 238
  • 0

첨부 1


지난 주간은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으로 세계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더욱 범인이 한국계 이민자였다는 사실에 한국에 있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사는 한국인, 전 세계에 퍼져 사는 한국인 모두가 긴장 속에 지내야했습니다. 미국 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사고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인 33명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학살(massacre)'이라고 불렀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혹시 LA 흑인 폭동과 같은 사건으로 번지는 것이 아닌가?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1903년 한국인 101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발을 디딘 후 100여 년간 피와 땀으로 일궈낸 아메리칸 드림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가운데 한국인 학생이 93,728명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혹시 차별대우를 받지 않을까? 비자를 받는데도 지장을 받지 않을까? 이렇게 많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자세로 사건을 접근해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개인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조승희’라는 학생이 한국계 이민자라는 것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1999년 콜로라도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으로 13명이 희생당했을 땐 범인이 백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볼 때 한국인들이 너무 지나친 죄의식을 갖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판적 안목으로 본다면, 한국인은 하나의 개인적인 사건을 너무 지나치게 일반화하고, 전체화해서 확대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인 평론가 스콧 버거슨(Scott Burgeson)은 이런 한국인의 자세를 ‘천박한 민족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예로, 2002년 의정부 여중생 ‘효순과 미선“양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곧 반미와 미군철수로 이어졌습니다. 매일 시청 앞 광장에선 촛불시위가 벌어졌고, 그해 대통령선거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할 미국인‘이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부시가 그렇게 시켰습니까? 장갑차 운전자의 개인의 실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승희에게 시켰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여러 식당에선 ’미군 사절‘이 아닌 ’미국인 사절‘이라는 쪽지가 붙었었습니다.

만약, 이번에 미국 언론이 이 사건을 국가나 인종문제로 연결시켜 보도했다면 그 파급효과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새삼 언론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두 달 전 어느 방송이 개신교 대형교회와 목사들에 관한 비리를 특별한 근거도 없이 여러해 전에 보도했던 내용을 재탕하여, 왜곡되고 과장하여 편파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 보도로 인하여 교회가 받은 부정적 영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미국 언론은 분명하게 이 사건은 미국 사회가 가진 총기 규제와 개인의 정신적 문제가 맞물려 발생한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조승희라는 학생은 늘 말이 없는 외톨이(loner)였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아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면서 문제가 있는 애니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부목사님의 말입니다. 머리는 좋아 성경을 잘 이해했으나 신앙의 강도는 20%정도였다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과대망상증과 피해망상증 장애자였다고 합니다. 자기를 모세나 예수님에 비유한 것은 과대망상증이고, 그가 NBC 방송에 보낸 비디오에서 “오늘과 같은 참사를 피할 수 있는 천억 번의 기회를 주었다”라고 말한 것은 피해망상증의 증세라는 것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는 것, 특히 특정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인에게서 찾으면 분명한 정신장애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외톨이들이 많습니다. 시력 장애자는 안경을 쓰고, 청각 장애자는 보청기를 끼듯, 정신 장애자는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애써 부정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정신 장애자가 사용하는 무기는 총보다 불을 지릅니다. 그래서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로 199명의 인명 피해를 냈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하여 정신 장애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지나친 불평과 불만을 삼가야 합니다.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타인과 사회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집단화 되면 공산혁명과 같은 폭동이 일어납니다. 불특정 다수인에게 향해지면 이번과 같은 학살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번 총기 사건이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 추모식에서 부시 대통령이 본문 결론이 되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으로 위로했습니다. 

14절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 10:5-6).” 그래서 교인들은 어떤 가정을 방문하면, 서로 인사를 하고 앉자마자 바로 조용히 기도를 합니다. 이 때의 기도는 오직 “이 가정에 복을 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을 빌어서 그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면 그 복을 받을 것이고, 만약 그 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면 내가 빈 그 복이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목회적 안목에서 보면 교인이 믿음의 있으면 교인이 복을 받게 되고, 믿음이 없으면 목사가 복을 받게 되는 셈입니다. 실리적으로 보면 믿음이 없는 교인이 많을수록 복을 빈 목사가 목을 받게 되는 셈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습니다만 내게 돌아올 복이 많으려면 믿음 없는 교인이 많은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내가 누구를 저주했는데 그가 저주받지 않을 사람이라면 그 저주가 내게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절대로 함부로 저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오해하고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내 눈에는 형편없게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께는 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하고픈 사람일수록 더욱 복을 빌어야 합니다. 저주는 하면 할수록 저주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과,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어렵습니까? 당연히 전자입니다. ‘황금의 입’을 가졌다는 교부 크리소스톰도 “우리가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상한 인격을 필요로 한다”고 했습니다. 이웃이 당한 슬픔에 동참하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이번 학살 사건에 세계가 모두 애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한인 사회와 교회는 32명의 희생자를 위해 32일간 릴레이 금식기도를 선포했습니다. 미국 교포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교회들도 위로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웃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 목사들이 있습니다. 동생이 시무하는 교회가 형님 교회보다 더 큽니다. 그 형 앞에서 동생을 칭찬하면 별로 좋은 기색이 아닙니다. 형수는 더욱 그렇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살인이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동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는 것 같아서 형이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목사님들 사이에서도 어느 교회가 부흥되어 교회를 크게 지었다고 하면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마음은 속이지 못합니다.

18-19절입니다. “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지 못할 상황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섰는데 저쪽은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타협을 거절하고 하나님 편에 서야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극단적인 예로, 북한과 화평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예수 믿는 신앙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목사라는 사람들이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원수가 생겼을 때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수는 내가 하겠다” 하십니다. 우리가 하기 힘든 악역은 하나님이 맡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수하려고 하면 오히려 다친다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학살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야곱의 외동딸인 디나가 세겜 성을 구경하러 갔다가 세겜 성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할례도 받지 못한 이방 사람에게 욕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레위와 시므온이 분을 참지 못해 복수극을 벌립니다. 밤에 몰래 들어가서 그 성안에 있는 남자들을 모두 다 죽였습니다. 무서운 학살이었습니다. 이제 야곱의 식구들이 세겜 사람들에 의하여 보복을 달할 차례입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수와 힘에서 밀리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조성된 절대적인 공포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겨우 세겜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사건이 터진 지 7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야곱의 나이 147세가 되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에게 축복을 하면서도 복수의 피를 흘린 두 아들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두 아들을 이렇게 저주했습니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6-7).”

요셉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역사가 찰스 베어드는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샅샅이 찧는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연구해 보니 하나님이 무섭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20-21절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라 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미움의 대상에게 미움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제일 먼저 파괴되는 것은 자신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있는 동안 자기 인격이 파괴되고, 기도가 막히고, 그것이 계속되면 몸에 병이 생기고 암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운 대상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됩니다. 미운 사람의 장점을 보려고 애 쓰고, 자주 칭찬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오히려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다”라고! 하나님을 잘 믿고 다윗처럼 축복을 받으세요. 그것이 원수를 갚는 것이 됩니다. 험한 세상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