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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 배고프다! (시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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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 감독이 한 말들은 우리들에게 강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서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더 많이 승리하고픈 강한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데서 언제나 부족함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무엇에 배고픈가 하는 사실이 바로 그 자신을 나타내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삭개오라는 한 배고픈 사람이 등장합니다.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세리장, 부자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리장이요 부자입니다.
삭개오는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불행한 사람이었을까요?

가장 처음으로 나타나는 삭개오의 모습은 자기를 실현한 성공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아주 번창한 도시 여리고의 세리장입니다.

세리장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제국에 바치면서 그 중간에서 생기는 많은 유익으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당시의 유럽과 지중해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로마 권력과 결탁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정세를 잘 이용해서 살아가는 사람. 소위 성공한 사람, 출세한 사람, 권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습과 함께 있는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아주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동족과 담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자입니다. 그는 담을 두른 큰 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과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를 날마다 넓혀 나가기 위해 힘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자기 하나 잘 사는 길을 택한 사람입니다.

매국노 내지는 민족반역자의 이미지가 그것입니다. 역사의 비극 속에서 개인의 선택은 항상 비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할수록 더 큰 죄인이 되는 모순된 처지였습니다.

사회적 소외의 모습

역사의 고통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일제시대의 많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친일파 명단에 올라가 있습니다. 비극적인 역사가 개인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개인의 자기실현과 사회적 성취가 모순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자기 성취가 되면 될수록 모순은 커지고 고통이 커지는 것입니다. 직업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죄책감은 커지고 공허함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직업 속에서 인생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는 소외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직업이란 단순히 돈벌이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소외되고 왕따된 상황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여리고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사실 그의 재산은 사기와 강탈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소외
민족을 지배하는 로마를 위해서 일하고, 로마의 힘을 빌어서 권력을 누리고 부자가 된 그를 “반민족주의자, 민족반역자”로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종교적 소외
그에게는 종교적 고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을 등진 죄인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런 형편에 처한 삭개오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를 아무도 이스라엘 동족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고통을 겪으며, 길을 갈 때도 뒤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욕설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뒤에서 누가 따라오면 과격한 테러리스트가 자신의 등 뒤에서 칼을 꽂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우울했으며, 허무감과 분노와 절망감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가 어떤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2007년] 4월 16일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의 끔찍한 총격 사건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범인인 조승희라는 학생을 보면서 그가 무슨 고통을 겪으며 살았는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그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가? 그가 무엇에 그토록 고통을 느끼고, 분노를 하였나? 일단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992년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부모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존을 위해,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일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의 고통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문화적 적응의 고통, 정체성 혼란의 고통, 열등감의 고통, 가난의 고통, 외로움의 고통, 인종 차별의 고통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고립된 행동 자체가 사실은 도움의 요청이었지만 극도의 개인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아무도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 주지 못했습니다.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의 내적인 갈망
여러분, 물질적인 부유와 사회적인 소외와 종교적 소외의 불균형 속에서 늘 고민하는 삭개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물질적인 부가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원래 삭개오는 물질에 배고픈 사람이라서 물질을 추구하다 보니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더 큰 배고픔이 찾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동족으로부터 소외되고 사회적 인정에 배고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무의미를 깨닫고, 삶의 공허를 느꼈습니다. 근본적인 삶의 목적에 대해서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이때 예수님의 소문이 삭개오에게 들려왔습니다. 그에게 예수를 보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견고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해 나가던 삶의 허무함 속에서 새로운 삶을 동경했습니다.

그는 답답한 현실 가운데서 다른 탈출구를 찾았습니다. 삭개오의 삶은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늘 ‘이렇게는 안되지. 이대로는 안되지.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지. 세상이 좀 바뀌어야지’ 하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나도 이렇게 죄짓고, 소외당하고, 갈등 속에서 살지 말고 구세주가 오셔서 새 나라를 이루셔서 나를 좀 편안히 살게 해 주시면 좋겠다’ 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예수님을 찾은 것은 더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의 갈망은 예수님의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예수님, 세리인 자신의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은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급해서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

그는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상황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 속의 열망이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가는 행위는 그의 사회적 지위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체면 차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 있는 그에게 다가온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를 중요한 사건을 그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의 의미 질문은 궁극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조건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한 인간을 보시는 주님
예수님은 그 곳에 오셔서 뽕나무 위의 한 신사를 쳐다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쳐다보신 한 인간 그는 누구입니까?

한 인간을 구별하여 보시는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군중의 한 명으로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인격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야’ 하시며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지목하여 보시고 지명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명하여 부릅니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우리의 긴급한 상태도 잘 아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영적으로 배고픈 한 인간 삭개오를 알아보셨습니다. 그의 고민을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통을 읽으셨습니다. 그의 회개와 참된 삶을 향한 겸손한 갈망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말을 한 마디도 주고 받지 않았는데도 삭개오 행동 하나 속에서 그의 깊은 고민을 다 알아차리셨습니다. 삭개오의 영혼의 긴급한 상태를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지나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갈급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극단적인 소외와 고통 가운데 계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에 동정을 가지시고 함께 괴로워 하시고 함께 기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먼저 삭개오의 친구가 되어 주셔서 찾아 오셨습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삭개오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굉장한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물질의 복을 더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에겍 더 큰 권력을 약속하는 분이 아닙니다. 함께 하셔서 친구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같은 부류가 되어 주십니다.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죄인과 함께 거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집에 들어간 것은 먹고 마시는 일과 숙박하는 것까지도 포함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삶의 핵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처신은 이번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도발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왜 그럴까요? 과연 함께 식사를 하고 한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식사를 하심의 의미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궁극적인 관심사’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야말로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합의 가장 구체적인 행동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상징입니다.
사람은 단지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만 밥을 먹지는 않습니다. 한 사회에는 ‘식탁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이 시작되던 1960년대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흑인 청년 몇 사람이 의도적으로 한 식당의 흑인금지 구역에 앉아 샌드위치와 콜라를 주문하였다가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현대화되고, 계몽되었으며, 민주적이라는 미국사회에서도 누가 어디서 누구와 먹는지에 관한 ‘식탁의 법칙’이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흑인들은 결코 백인들과 섞여서 식사할 수 없었습니다. ‘인종적으로 분리된 점심식탁’의 법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밥상은 이와는 정반대로 누구에게나 ‘열린 밥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소위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사회의 질서에 대한 커다란 모독이자 노골적 반란행위였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곧 그를 인정하며 그와 함께 삶, 즉 생명을 나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은 당시 유대종교의 법과 질서에 대한 전면적 도전행위였습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철저한 이분법적 사회였습니다. ‘깨끗한 자 대 부정한 자,’ ‘거룩한 자 대속된 자,’ ‘의인 대 악인’의 구별에 근거한 사회였습니다.

당시에 ‘죄인들’이라 불렸던 사람들은 가난한 자, 눈먼 자, 절름발이, 앉은뱅이, 문둥이, 창녀, 세리, 귀신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사회적•종교적 비난을 무릅쓰고 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과 열린 식탁의 친교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삭개오와 같은 부류가 되셔서 함께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욕을 먹으셨습니다. 동류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진정한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함께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삭개오를 군중들과는 다른 눈으로 보시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배고픈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신음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가서, 어디에서 우리의 고통을 위로받을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절망 가운데 해메고 있었습니다. 다만 절망을 해결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절망을 물질로 보상 받으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절망을 종교적 신념과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로서 보상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무슨 일로 고통을 당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쉽게 정죄하는 것은 사람을 제대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명쾌했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 2:17).

예수는 인간이 세운 법의 기준에 의해 죄인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는 똑같이 임한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회개

사람의 비난에 게의치 않으신 예수님께 삭개오는 자신의 마음을 드립니다. 다시 율법을 지키겠다는 결심입니다.
여러분, 기뻐하는 삭개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기뻐하면서 신이 났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새로운 결심을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자신의 깨달음과 결심을 말하는 삭개오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을 것입니다. 그의 이마와 눈동자가 빛났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 결심이 삭개오를 아주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단순한 뉘우침과 후회가 아닌 참된 회개의 증거입니다. 참된 회개는 반드시 과거의 잘못과 단절하는 행위로서 나타납니다.

물질주의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전환”

오로지 세속적인 소유와 물질적인 만족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았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정말로 인생을 만족시킬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무의미를 깨닫고, 삶의 공허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물질의 소유에서 인생의 만족을 찾았지만, 그의 직업에서 오는 다른 부족들, 사회적 소외와 멸시는 그를 더욱 괴롭게 했습니다. 어느 한 가지의 만족은 우리에게 다른 수많은 결핍과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그는 목마른 사슴과 같은 갈급한 처지였습니다.

주님을 만난 순간 모든 사람에게 소유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주님을 만난 순간 모든 사람에게 증오와 미움은 사라집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과거의 집착, 과거의 중요한 것을 다 버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인 것이 채위지지 않고서, 절대적 가치를 깨닫지 않고서는 현실의 애착을 절대로 버릴 수 없습니다.
그는 전에는 재물에 의지하여 인생의 성을 쌓았습니다. 자기 만의 성을 쌓았습니다. 재물에 의지하기 위해 동족도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성의 주인인줄 알았으나 사실은 자신의 감옥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재물의 성, 반사회적이고 반민족적인 자기 감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욕망과 탐욕과 고독의 감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가 더 넓은 세계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죄인이 자유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내 울타리가 무너지는 곳에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죄인을 위해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모든 관계를 화평하게 만듭니다.
우리 속에도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야 한다. 우리가 ‘성령께서 거하실 영원한 처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예수님의 엄청난 복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인정입니다. 이 죄인도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

예수님은 계속해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님의 구원은 버림 받은 자를 다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 작은 자들, 사회적 약자들(어린아이, 소경, 세리), 멸시받고 천대 받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직접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어서 죄값과 죄책에 괴로와 하는 자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며 죄를 용서해주고 사랑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삭개오가 먼저 회개하고 결단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가 먼저 결단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삭개오를 회개하게 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회초리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주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셔서 함께 식사도 하고 함께 대화 함으로써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부자인가 가난한가, 선하냐 악하냐, 배웠느냐 못배웠느냐, 남자냐 여자냐, 어떤 가문이냐,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 어떤 인종이냐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난 사람과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 진정한 배고픔에 만족을 받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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