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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잠할 수 없는 소식 (왕하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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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할 수 없는 소식 

I. 본문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은 북 왕국 이스라엘 아합의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부터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북 왕국은 이스라엘이 되고 남 왕국은 유다가 되었는데,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은 남 왕국에 의해서 계승되지만 정치적으로는 북 왕국이 훨씬 더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거기에 아합이라는 인물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사람은 신앙이 별로 없는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의 아내가 된 이세벨은 멀리 페니키아 지방에서 바알 신을 섬기던 여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종교가 받들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에 선교사적인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시집 온 여자였습니다. 이 두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 점점 잊혀져가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패역하고 불순종하던 이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두 종을 보내시어 어두움의 시대와 맞서게 하십니다. 능력의 선지자로 알려진 엘리야와 갑절의 영감을 더해달라고 매달리던 엘리사, 이 두 선지자에 의해서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 본문에서는 바로 그 두 선지자 중 엘리사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나라 가운데 하나가 다메섹이라고 불리는 아람 나라였습니다. 아람 나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위쪽에 위치한 신흥국가인데, 아주 포악하고 기동성이 있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진하려는 이스라엘과 남하해서 비옥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다메섹의 충돌이 매우 잦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이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입니다.

II. 아람 군대의 침공

엘리사 선지자가 도단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보니 성주위에 수많은 군대들이 에워싼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선지자가 탄식하며 낙심하는 종을 위해 하나님 앞에 빌자 종의 눈이 열려지게 되었고 성을 에워싸고 있는 군대보다 더 많은 하늘 군대가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도단성에서 엘리사를 포위했던 아람군대는 엘리사의 한 번의 기도로 모두 장님이 됩니다. 그들이 다른 성으로 이끌어져서 포위되어서 모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었는데도, 엘리사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람 왕 벤하닷이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A. 포위된 사마리아 성

그 군대가 오늘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수도인 사마리아를 포위하게 되었으니, 아합 왕은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사 이 사람의 목이 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리라”고 분기충천(憤氣衝天)하였습니다. 그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엘리사에게 떠넘기면서 엘리사를 향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속이 타들어갈 지경이었습니다. 변경에서 일어난 공격이 아니라 이미 전선에 밀려서 사마리아까지 포위할 정도가 되었고 왕까지 그 성에 갇히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이 위급한 상태였습니다.

적군들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제일 커다란 문제는 보급물자가 끊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보급로가 끊어지게 되자 그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었습니다. 돈을 주어도 식료품을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오늘은 네 집 애를 삶아 먹고, 내일은 내 집 애를 삶아 먹자.’하는 참극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약속을 해놓고 내 애를 함께 삶아서 먹었는데, 이튿날 “이번에는 네 차례니까 네 아들을 내 놓아라.”고 하니까, 그 약속을 어기고 아들을 어디엔가 감췄습니다. 그래서 나도 저 집 애를 먹을 수 있도록 왕이 재판을 해 달라고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선지자가 다음 날이 밝으면 곡식 값이 다시 떨어지고 사람들이 풍족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성경의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할 시급성과 태만한 의무의 심각성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B. 문둥병자 네 사람

성 밖에 오늘 문둥병자 네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문둥병은 그 당시에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질병으로 분류가 되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한 질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곳에 같이 거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에 갈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엄격한 격리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네 명의 문둥병자가 오늘 사마리아 성 밖에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전선이 서로 대치된 가운데 그 중간 지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도 굶주렸으니 보급로가 끊어진 성 밖의 문둥병자의 상황은 더더욱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굶주린 나머지, 성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성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양식이 없어서 모두 굶어죽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자니 굶어죽을 것이고, 성안에 들어가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으니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의논을 하다가, “우리 차라리 그럴 바에야 손들고 아람군대에게 가서 항복을 하자. 죽이면 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이고, 혹시 산다면 먹을 것을 주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아람군대로 걸어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상 아람군대에 가보니까 놀랍게도, 항복할 각오를 하고 왔는데 손들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음식도, 식료품도, 마실 것도, 그대로 남아있고 심지어는 무기와 말까지 남아 있고, 아람군사는 한명도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유는 황혼이 질 무렵에 하나님께서 아람군대에 이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성이 함락할 날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귀에 어마어마한 말발굽 소리와 대군의 함성소리가 들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아람군대는 즉시 이렇게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스라엘이 가졌을 리 만무하지만, 아마도 틀림없이 다른 나라, 특히 애굽의 대군을 돈을 주고 사서 용병들을 불러온 것이니, 저들과 맞서 싸우면 우리는 멸망하리라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급히 식료품과 군 장비는 물론이고 말까지 내버려두고 황급하게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있던 큰 적군의 진영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던 것입니다.

III. 침묵할 수 없는 소식

네 명의 문둥병자는 허겁지겁 자신의 배를 채우고 금은보화를 마음껏 챙겼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지천으로 깔린 보물들을 챙기고 나니까, 이렇게 기쁜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에 떨고 있을 동포들이 생각났습니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이 엄청난 소식 앞에서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사명감에 불타서, 그들은 더 이상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은 습관적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중요한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행동하기 쉽습니다. 마음에 마땅히 품어야할 정당한 생각은 버리고 품지 말아야할 부당한 생각이나 정서들을 갖고 살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A. 배부르게 됨

이 네 명의 문둥병자가 신속히 전해주었던 기쁨의 소식은 첫 번째로 주린 자였던 자신들이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남아있는 많은 식료품과 음식들은 자기 네 사람을 배부르게 하기에 충분할 뿐 아니라 이 사마리아 성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아상태에서 구하기에 충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 굶주림 속에서 배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동포들에게 전했습니다.

우리는 굶주렸던 네 명의 문둥병자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와 십자가의 은혜로 그분의 생명의 양식을 먹고 배부르기 전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는 문둥병자와 같은 상태였고 게다가 견딜 수 없는 허기짐을 가진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육신으로만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육신은 그릇이고, 그 그릇 안에 우리의 속사람, 곧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 자원을 가지고 육신의 삶을 영위하게 되지만, 우리의 속사람인 영혼은 하늘의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런 이치를 망각하고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인해서 스스로 부요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양식으로 채워질 수 없는 우리의 영혼의 깊은 곤궁함과 굶주림은 마치 아람군대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항복하며 걸어가던 문둥병자와 같은 절대 절명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그 복음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누구도 쉽게 돌려놓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죄를 우리의 마음에 확신시켜주셨고 비로소 우리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을 떠나고 내 마음대로 살았던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시사, 죄로 말미암아 상하고 문둥병자와 같이 망가진 우리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게 만들어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 충만한 양식을 먹으면서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에 만족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말씀 속에서 영혼의 참된 만족을 얻었습니다. 이런 배부름을 깊이 경험했을 때, 이 네 명의 하찮은 문둥병자들은 그 소식을 사마리아 성에 오늘 밤 안에 전파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천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화급함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습니까? 처음 회심할 때 가졌던 그 착한 마음을 기억하십니까? “내 부모, 내 형제 자매, 내 가족들이 주께로 돌아올 수 있다면, 내 이웃, 내 동포가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이 생명마저도 거두어 가셔도 좋습니다.” 그 첫 마음이 여상하였다면, 우리는 지금쯤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이고, 우리의 친구들은 더 많이 주님께 돌아왔을 것이고, 온 땅에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것이고, 함께 생명의 유업을 누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손에 손을 맞잡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불충성에 대한 용서를 빌며 다시금 초심을 회복해야합니다. 우리만 배부를 것이 아니라 허기진 그들도 불러 함께 이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B. 부자가 됨

두 번째로 전할 기쁨의 소식은 그들이 주림을 면했을 뿐 아니라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식으로 배불렀을 뿐만 아니라 지천으로 널려있는 수많은 보물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람 군대가 남기고 간 보물에는 한정이 있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보혈의 공로에는 다함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악 된 세상의 성에 갇혀서 두려움과 영혼의 주림 속에 떨다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은혜의 벌판으로 나왔을 때 거기에는 무엇이든지 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법적으로 하늘나라의 유업을 소유할 수 있는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늘의 유업을 함께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고를 열고 성령의 신령한 위로와 하늘에 속한 유업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고난도 이기며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열려진 하늘의 문을 통해서 우리 속사람, 곧 영혼에 필요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눈부시게 부어져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가난하게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그 임마누엘의 샘에 나아와 그 보혈의 물에 흠뻑 씻고 그것을 실컷 마시며 즐거워하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때는 그들의 가난함을 인해서 우리가 많이 울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는 점점 그런 기도 소리가 사라지고 교회는 각기 저마다의 즐거움에 빠져 있습니다. 제임스 파커(J. I. Packer)가 언급했듯이, 즐거움을 찾다가 천박해버린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진지한 슬픔대신 값싼 기쁨들이 교회에서 환영을 받고 심각한 복음과 진리대신 경쾌하고 가볍고 즐거운 놀이들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조용히 눈을 감고 이 도시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의 영혼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것 말고 우리의 기갈을 면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 영혼에게 잠시잠간의 즐거움을 누려보라고 말하니, 영혼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우리 주님의 아픔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아픔을 깊이 통감했던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예수님께서 언제 사도 바울에게 빨리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사도가 복음 안에 있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자,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 3:5)라고 자랑하며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던 그 생명 없는 무지한 날들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 무지 속에서 주님께서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으니 이제 믿음으로 누리면 된다는 이 기쁜 소식을 몰라서, 예전의 자기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동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지라도 도무지 자랑할 것이 없으며, 부득불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자신의 사명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IV. 우리의 소위를 반성함

이 보잘 것 없는 문둥병자들은 실컷 배부르게 먹은 후에 “우리의 소위가 선치지 못하도다”하며 진지하게 자신들의 태도를 반성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셨던 것은 그런 반성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마음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의 피 값을 주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쁜 소식을 몰라 어두운데 떨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값진 은혜의 보배들을 많이 발견하고 핍절하고 굶주렸던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 안에 있는 복음의 떡으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었는데,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A. 침묵하는 죄

우리는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침묵하는 죄 속에서 살았습니다. 거기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예전에 그렇게 큰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언제부터인가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부패하게 된 이유는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소명을 받은 우리가 모든 개별적인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이 소명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은혜는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우리 안에 갇혀 결국은 부패한 성품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굳어버린 부패한 성품과 더불어 은혜도 함께 우리 속에서 부패하게 되었고 어느새 우리의 마음에서 그런 사랑도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 주님을 만나고 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했는지 기억나십니까? ‘나 같은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입술에 혀가 굳어질 때까지, 우리의 혈관의 피가 식을 때까지, 유리하며 방황하는 교회 울타리 밖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그런 순례자의 삶이 있습니까? 이 세상은 다만 나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 주님 한 분으로만 만족해서 살며 불속이라도 들어가서 물속이라도 들어가서 이 복음을 나누어주며 살겠다고 하는 그런 진지한 몸부림과 외침이 정말 우리에게 남아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 부요해진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길거리에서 말로 사셨습니까? 그 귀한 보혈을 흘려 우리를 사셨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최고로 값진 당신 자신의 생명을 드려서 우리 각 사람들을 구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신 십자가의 보혈을 기억하며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나는 만물의 찌끼와 같은 존재며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이 땅의 물질, 여러분들에게 있는 시간, 여러분들에게 있는 재능,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목숨까지도, 사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한시적으로 위탁한 것들이 아닙니까?

B. 소식을 전파함

오늘 문둥병자들이 자신들을 반성하며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거기서 먹고 마시는 것이 죄악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들의 고통, 아이를 잡아먹으며 겨우겨우 연명하는 그 아비규환(阿鼻叫喚)과 같은 사마리아 성의 비극을 생각했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소위가 선치 못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천대받던 문둥병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반성을 기초로 황급히 이 아름다운 소식을 동네방네 전파했습니다. 미련하고 부족한 우리도 이들과 같이 이 기쁨의 소식을 전해야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은혜의 벌판에 굶주린 자들을 먹일 양식과 가난해진 우리와 그들을 부요하게 할 모든 값진 것들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외치기만 하면 성문을 밀치고 수많은 인파가 그 성에서 쏟아져 나와 이 풍족한 은혜를 누릴 텐데, 그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토마스 선교사(Robert Thomas)가 배를 타고 대동강에 와서 순교했을 때, 복음 한번 외치지 못하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받으며 그가 떨어뜨려 놓고 간 한자 성경 한 권이 이 땅의 복음이 심겨지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인간이 보기에 가장 미련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데 이것이 선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작정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 쏟는 헌신위에, 순교의 희생위에, 조국의 교회가 섰습니다.

몇 해 전, 우리지체들이 시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무 교회 전도 때에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도 모두 도회지로 가고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칠십을 넘은 노인이 복음을 들으며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그 모습을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전해들은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은 예수님을 왜 이제야 전해주는 거야?”하며 우시던 모습은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메아리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이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주님을 섬기다가 하늘나라에 가겠습니까? 그러나 그 노인들도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입니다. 누군가가 먼 동네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복음을 들을 수도 없고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계속 전해야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는 영혼들이 있다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없는 그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감격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대신 감격해주기만 해도 그 동리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부르셔서 하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시며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임한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기쁨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 복음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 했던 처음에 품었던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 그들을 향해 더 이상 잠잠치 말고 복음의 나팔을 울려야합니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진노의 자리에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는 그러한 핍절한 생을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예수님의 넓은 사랑을 그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가서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문둥병자 네 사람이 사마리아성에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할 때, 그들이 전쟁의 두려움으로부터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은혜의 벌판에 달려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우리는 이 기쁨의 소식을 만방에 두루 전파하여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우리와 같이 이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고 아직까지 남겨두신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의 전부를 드려서 땀의 섬김으로, 눈물의 섬김으로, 피의 섬김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복음의 나팔수들이 됩시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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