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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쓴 뿌리 때문에 (시 52:4~5, 히 1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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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간으로 지난 16일 오전 버지니아 공대에서 사상 최악의 캠퍼스 총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32명의 희생자와 1명의 범인 모두를 애도합니다. 우리 노회는 이번 한 주간을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수요일에는 영락교회에서 함께 추모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범인인 조승희씨는 8세 때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습니다만 이 가정도 자녀 때문에 간 것 같습니다. 누나인 이 집의 딸은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도 버지니아공대를 들어가서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기 이민이나 조기 유학의 허와 실을 보면 실패한 이민도 많습니다. 조기 유학자들 가운데는 우울증이나 마약중독으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는 조승희라는 범인의 자신의 심적 문제가 많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영어를 못해 벌레 같다고 했답니다. 자신은 항상 외톨이였습니다. 부유층에 대한 적대감과 복수심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살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정신과에 구금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모세처럼 이끌고 예수처럼 죽는다.”고 했답니다. 성경에 대한 서툰 지식이 오히려 정신을 혼란하게 했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백성을 이끌지 않았고, 예수님은 그렇게 죽지 않으셨습니다. 서툰 지식이 얼마나 해를 끼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응어리가 방아쇠를 당기게 하였습니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속에 있는 자신의 문제입니다. 자신 속에 자라는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로 마음의 안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폭력은 질투가 맺은 가장 흉한 열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질투, 시기 등을 극복하기 못하여 결국 피를 뿌리는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나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는 모세를 말했습니다. 모세는 생모와 양모 사이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는 ‘유기감’(sense of rejection)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에 애굽인들 사이에서 ‘소수민족 콤플렉스’(minority complex)를 가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조승희는 한국인-미국인(Korean American)으로 살았지만 모세는 히브리인-애굽인(Hebrew-Egyptian)으로 살았습니다. 출애굽기 2:22에는 그가 아들을 낳았을 때에 게르솜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다.”는 뜻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뿌리 없음’(rootlessness)를 느겼을 것입니다. 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에 백성을 구하러 가라고 할 때에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학습된 무력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말을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승희도 영어 발음이 이상해서 따돌림을 당했답니다. 많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모세도 일종의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극복하고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 쓴 뿌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건맨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뿌리는 나무의 생명입니다.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잘려나가고, 줄기가 꺾이고, 밑둥만 남아도 뿌리만 있으면 살고 다시 싹이 날 수 있습니다. 나무가 아무리 무성해도 뿌리가 잘려나가면 자라지 못하고 이내 시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자기의 마음에 쓴 뿌리들을 안고 삽니다. 자신이 만든 쓴 뿌리도 있고, 환경이 만든 쓴 뿌리도 있습니다. 자신의 크고 작은 비뚤어진 내면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위인이라도 쓴 뿌리는 다 있습니다. 끝없는 내적 갈등과 육신의 쓴 뿌리는 무장된 자아, 항복되지 못한 자아의 산물입니다. 오늘 이런 비극 앞에서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쓴 뿌리를 극복하고 밝은 자신을 찾기를 바랍니다.

첫째, 쓴 뿌리는 쓴 맛을 일으킵니다.

  뿌리가 쓴데 줄기나 잎이나 열매가 쓰지 않겠습니까? 뿌리가 쓰면 모든 것이 쓴 것이 정상입니다. 인간의 내적 갈등은 삶의 맛을 변질시킵니다. 채소 가운데 뿌리를 먹는 채소가 있습니다. ‘뿌리채소’라고 합니다. 무, 당근, 우엉, 감자, 고구마, 연근, 토란, 도라지, 마늘 등 이 뿌리채소입니다. 인간에게 유익한 채소들입니다. 그런데 인삼이나 당근 같은 채소는 뿌리를 통하여 주위의 모든 영양분을 다 빨아들입니다. 염류나 당류나 물속의 유기물질 등을 다 빨아들입니다. 좋은 것도 빨아들이지만 나쁜 것들도 빨아들이기 때문에 나쁜 땅에서 기른 것들은 먹을수록 해가 된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도 쓴 뿌리와 같은 내적 갈등이나 병적 심리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생의 쓴 맛을 일으킵니다. 인간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쓴 맛은 보이지 않는 내면이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우리 안에 성숙한 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물 갖고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유년기의 상처’ 혹은 ‘심리적 갈등’ 혹은 ‘마음속의 아이’라고 합니다. 내적 치유에서는 이것을 ‘쓴 뿌리’라고 표현합니다. 왜 사람들은 인간관계가 어려울까요?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체로 유년기 때 상처로 인한 ‘마음속의 아이’가 쓴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원래 순하다고 합니다. 흰옷을 좋아하고 이웃을 사촌이라 했습니다. 이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온통 분노가 가득 찬 모습입니다. 조금만 건드리면 내면의 응어리가 폭발합니다. 마음도 강퍅하고 점점 표현도 거셉니다. 우연히 비행기 화장실에 가서 글씨를 유심히 보니 “Smoking in Lavatory is prohibited by Law”라고 썼는데 한국어로 번역을 “화장실에서의 흡연은 법으로 처벌 받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좀 순하게 원문대로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라고 해도 될 것을 “처벌 받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너무 표현이 무시무시한 것 같아요.
  쓴 뿌리가 잠재하고 있으면 파괴적이 되고, 충동적으로 변하고, 돌출적인 언행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내면 심층에 현실에 대한 불만과 복수심과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냥 모두가 밉고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이런 무지비한 폭력이 자행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은 나누는 삶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욕심 그 자체가 쓴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욕심으로만 살면 절대로 단 맛을 내지 못하고 삽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쓴 맛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서 3:11에는 “샘이 어찌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고 합니다. 왜 샘이 쓴 물을 냅니까? 그 샘의 근원이 쓰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단 물이 없는데 어떻게 단물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내면에서 단물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자기 감정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모두를 들뜨게 만듭니다. 자기가 기분이 나쁘면 모두를 가라앉게 만듭니다. 이런 감성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알아서 자기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삶의 맛을 더해주는 양념입니다. 감정은 삶에 응답하며 삶을 맛나게 해주는 향료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이 단 감정이냐, 쓴 감정이냐에 따라서 맛이 달라집니다. 쓴 감정은 쓴 맛을 낼 것이고, 단 감정은 단 맛을 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진하다가 마라라는 곳에서 쓴물을 만납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술 광야로 남하하여 엘림에 이릅니다. 예배하러 가는 백성들이 쓴 물을 만납니다. 그 많은 백성들이 천신만고 끝에 만난 물이 쓴물이었습니다. 출애굽하자마자 쓴 맛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쓴 뿌리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의 쓴 경험은 대부분이 자신의 쓴 뿌리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쓴 물은 하나님의 손으로 단물로 바뀝니다. 우리의 쓴 뿌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단 뿌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지혜란 라틴어로 ‘sapere’ 즉 ‘음미하다’, ‘맛보다’라는 뜻입니다. 지혜란 맛을 보고 아는 능력입니다. 이게 단 맛인지, 쓴 맛인지, 장차 단 맛을 낼 것인지, 쓴 맛을 낼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것을 압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지혜가 있어 단 맛을 낼 것을 알고 선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닷물이 점점 싱거워진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과일들이 철이 없으니 사람도 철이 없고, 바닷물이 싱거워지니 사람도 싱거워진답니다. 싱거워진 바닷물을 당장 입맛으로 느끼지 않지만 앞으로 해류를 바꾸고, 생태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담수의 양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온난화로 빙하가 많이 녹기 때문입니다. 맛이 변하지 말 것들이 변하니 문제입니다. 인간과 인생은 오히려 맛이 변하지 않아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의 쓴 맛이 단 맛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쓴 뿌리는 쓴 열매를 맺습니다.

  히브리서 12:15 하반절에는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라고 합니다. 쓴 뿌리는 괴롭게 합니다. 쓴 뿌리는 남을 더럽게 합니다.
  뿌리의 가치는 뿌리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뿌리가 아무리 튼튼해도 열매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쓴 뿌리는 쓴 열매를 맺습니다. 쓴 뿌리가 무엇입니까? 해롭게 하고 멸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쓴 뿌리는 결국 자기 스스로를 멸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보세요. 가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문제로 하나님과 동생에게 불평과 불만과 시기가 가득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에게 더 인기가 있으므로 질투심이 생겼고 자만심이 가득했습니다. 가룟유다는 금전에 대한 탐욕과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쓴 뿌리입니다. 쓴 뿌리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까지 다 망가지게 만듭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불만이 가득하여 동생을 죽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살해할 것을 모의하다가 결국 자기가 죽습니다. 가룟유다는 세상에게 버림을 받고 자살을 합니다. 우리 속의 쓴 뿌리는 누구나 자신과 타인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를 해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로마서 11:17에는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이라고 합니다. 뿌리가 무엇입니까? 돌 감람나무이지만 뿌리가 참 감람나무에 있으면 그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쓴 열매를 맺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당해야 합니다. 천국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사막의 교부들의 말들을 적은 책이 있습니다. 한 은둔자가 말했습니다. 사탄은 죄의 열매를 낳은 세 가지 힘이 있습니다. 첫째는 망각입니다. 둘째는 나태입니다. 셋째는 이기적 욕구입니다. 망각은 나태를 낳고, 나태는 이기적 욕구를 낳고 이기적 욕구는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그러므로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망각, 나태, 이기적 욕구 이 모든 것들이 다 쓴 뿌리들입니다. 쓴 뿌리는 죄의 뿌리입니다.
  성경은 원망을 ‘뿌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뿌리는 땅 속 깊은 곳에 심기어 보이지 않지만, 뿌리의 상태는 알 수 있습니다. 쓴 뿌리는 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원망이 있으면 상처와 고통을 줍니다. 용서하지 않고 분노를 품고, 외톨이가 되고 패배감을 느낍니다.

  잠재된 분노나 용서하지 않은 앙심이나 회개하지 않은 양심은 원망의 뿌리입니다. 삶을 오염시키는 독입니다. “나는 원래 화를 잘 내는 사람이야.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라고? 이게 나란 인간이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생겨먹었다 치더라도 타인에게 엄청난 피해를 줍니다. “나는 뒤는 없어”라고 하면서 별 소리를 다 합니다. 뒤가 없으니 상처를 주고 자기는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뒤가 있는데, 잊혀지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쓴 열매들입니다.

  마태복음 7:18에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뿌리가 있습니다. 좋은 땅에 심긴 나무입니다. 이런 좋은 나무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열매들은 성령이 없으면 맺을 수 없는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쓴 열매는 성령의 열매는 아닙니다.

  건축자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가 하나님의 사랑을 부여주고, 인격적 방법으로 예수님을 알게 하려고 창설한 것이 ‘해비타트’입니다. 이 기관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단 뿌리는 단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맺어야 열매입니다.

결론

  다이아몬드는 원래 돌맹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돌맹이가 아니라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간직한 생명력이 있는 돌맹이입니다. 이것을 깎고 다듬어 영롱한 빛을 내게 만듭니다. 자아라는 거듭나지 못한 쓴 뿌리를 깨트려야 비로소 빛을 냅니다. 우리 모두가 영롱한 빛을 낼 수 있습니다.

  죽음이 쓴잔이긴 하지만 잔 밑에는 단 것이 들어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 쓴 뿌리를 제거하는 아픔, 육체를 죽이는 고통은 쓰지만 그 결과는 답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자신을 죽이는 일만이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2:7에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면 쓴 뿌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하고 단 맛을 내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늘 풍성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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