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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톨이가 되 여인의 이야기 (요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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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가 되 여인의 이야기 (요 4:4-9)

2주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은 조승희라는 23세의 한인 청년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난무한 가운데 아직도 그 사건의 이유와 동기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으면 혹자는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범인과 배후가 누구이든지 우리들은 충격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특히 범인으로 주목받고 자살하였다는 조승희라는 청년의 이야기는 더욱 큰 충격과 아픔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에 대하여 사람들은 외톨이였다는 말로 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였으며 고립된 생활을 해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은 안경을 쓴 짧은 머리의 범인 사진을 방송하며, 조군이 비정상적인 행동과 폭력 성향을 보여 왔고 그의 기숙사 방에선 독설과 불만으로 가득찬 어수선한 내용의 글이 발견됐다고 전했습니다.

외톨이가 되었던 한 청년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분노는 적개심이 되어 무차별적인 총기 난사로 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려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는 자의에서 였든 타의에서 였든 외톨이로 살았습니다. 특히 홀로 있으면서 그는 자신의 환경을 비관하며 우울증에서 힘들어 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로 그 마음을 가득히 채워나갔던 것입니다.
그의 왜곡된 마음과 억눌린 분노는 더욱 그를 외톨이로 살게 했으며 급기야는 피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으로 그의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성숙한 시민사회라는 미국의 언론보도 중에는 그를 또 다른 희생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추모현장 옆에 그의 빈소도 함께 채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끔찍한 살인사건만으로 보지 말고 좀더 밀착해서 사건을 드려다 보면 자신 만의 세계에 뭍혀 살았던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왜곡된 마음으로 가득한 분노를 담고 살아야만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조승희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한 여인도 조승희처럼 외톨이라는 사실에 결코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스스로로부터 철저히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아픈 역사속에서 유대인들 사회에서 고립된 외톨이로 태어나 살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3년 경 북이스라엘이 앗수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들의 혼열 정책으로 인하여 생겨난 사람들입니다. 북 이사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 성에 이방 민족들이 강제 혼인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나온 혼열인들이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과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방 사람들과 혼인하여 살았던 비겁한 사람들로 규정되어 차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들 전체가 이미 유대 사회에서부터 고립된 외톨이였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의 인생은 처절했습니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채 여러 번 새로운 남편들을 만나 행복을 찾아 헤메였지만 돌아온 것은 멸시와 비난이었고 사람들로 부터의 따돌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울분과 증오는 더욱 그를 고립적인 삶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사람들을 회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인 기피증이라 할 만큼 그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를 못했습니다. 스스로 회피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돌렸던 외톨이였습니다.

조승희과 사마리아 여인, 두 사람의 공통점은 외톨이였다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곡된 마음 일수도 있고 억눌린 분노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조승희라는 사람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습니다. 자신의 비극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극적 아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사마리아 여인은 다릅니다. 같은 상황에서 출발했지만 이 여인은 진정한 기쁨과 행복한 삶의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승희라는 청년은 왜 비극적인 결말로 그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을까요?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게 하여 그 인생의 새로운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사마리아 여인이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께서 그를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회피하는 사마리아인들의 땅으로 예수님은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땅조차 밟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로 가면 지름길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사마리아를 돌아 먼 길을 택하곤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을 경멸하고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만나기를 싫어하는 죄 많은 여인도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이 조승희라는 청년과  이 여인의 결말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왜 예수님은 조승희라는 청년을 만나주지 않았는가? 주님께서 그 청년을 만나주셨다면 그 청년의 상처를 치유받고 마음속에 억눌린 분와 왜곡된 마음을 돌이켜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여인을 찾아 가서 만나주신 예수님은 왜 그 외톨이 청년을 그냥 내버려두신 것일까?  그러면서 은근히 주님을 탓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청년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청년을 사람들이 만나 주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기우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청년은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심한 갈등과 번민을 가지고 힘들어 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사람들이 만나주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외톨이가 되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누가 만나주어야 합니까?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이 그를 만나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늘의 예수가 바로 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톨이가 되어 힘들어 하고 있는 그 친구를 내가 만나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비극은 곧 나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 시대의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홀로된 외톨이들을 찾아가는 예수가 바로 여러분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세밀한 눈으로 사랑의 관심으로 주위를 둘러 보아야 합니다. 지금 누군가에게 외톨이가 되어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는지, 혹은 스스로 외톨이가 되어 왜곡된 마음과 억눌린 분노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없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 외톨이가 지금 나의 가족들일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나의 친구들이며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성도일 수 도 있습니다.
외롭게 홀로 있는 누군가에게 찾아가 주시며 손 내밀어 주시는 예수님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외로움도 견디어가겠소 바로란 소릴 들어도 좋소..

성경에 보면 또 다른 외톨이가 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가정은 불우하였습니다. 아버지는 4명의 아내를 두었고 배다른 형제가 12명이나 있습니다. 가정은 평온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자기 어머니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에 덩달아 거의 막내로 태어난 그도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과 애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형들의 시기 거리가 되고 미움을 받아서 그만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상처받은 한 아이의 마음속에는 형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싹텄을 것입니다. 억눌린 분노가 그 마음을 가득 채워갔을 것입니다.
누군지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요셉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와 미움, 복수심은 그를 외톨이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주인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옆에 그와 같이한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그는 삐둘어진 인격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심이 가득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심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당장 고통스러운 상황들은 받아드리기 힘들었지만 조금 후에는 마음에 평온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하심과 섭리하심이 있음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름 사람들에게도 적대적인 관계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평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그를 외톨이로 따돌렸는지는 몰라도 그는 형제들에게 적대적인 반감을 품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요셉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니 그가 형통하였다고 말입니다.

조승희씨는 왜 자신의 상황을 비극적인 결론으로 끝맺어야 했을까?
반면에 요셉은 어떻게 그 인생의 비극을 새로운 성장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관계’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승희씨는 관계에서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실패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성공하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성공하였습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컨설턴트인 존 팀펄리는 "자신의 꿈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루는 길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연결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제는 무엇을 아느냐(Know What)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Know Who)가 더욱 중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려면 ‘ㄲ’ 자로 시작하는 7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꿈(비전 목표), 꾀(지혜), 끼(재능), 깡(용기, 열정), 꼴(기품), 꾼(성실, 전문성) 그리고 끈(관계)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NQ로 살아라]는 책을 쓴 김무곤 교수는 "혼자 노는 백로보다 함께 노는 까마귀가 낫다"고 말합니다.

어린 시절에 선생님이 갑자기 반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보는 시험인데 선생님은 부담 같지 말고 아는 대로 만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재셨습니다. 그만 하는 소리와 함께 빨리 문제를 풀지 못한 학생들은 시간을 더달라고 하였지만 선생님을 시험지를 이내 거둬가 버리셨습니다.
나중에 안 것은 그것이 IQ검사였던 것입니다. 결과를 보고 머리가 좋으니 공부를 잘하겠다고 성공하겠다고 머리가 나쁘다고 우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다고 모두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IQ 보다 EQ(감성지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IQ도 아니요 EQ 도 아닙니다. NQ(관계지수)를 중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공을 위해 관계지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지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언제나 교류하는 사람입니다. 누구하고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정신의학자들도 정신건강에 가장 좋은 것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잘 지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휴먼 네트워크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지수가 높은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외톨이가 된다손 치더라도 비극적인 결론을 맺지는 않습니다.
요셉과 같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론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조승희씨의 비극은 그가 외톨이였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지수를 높이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1993년 5월부터 94년 7월까지 떠들썩했던 사건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지존파입니다. 그들은 외톨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금공장에서 살인 생매장 인육먹기 살인훈련등을 하면서 왜곡된 마음과 억눌린 분노를 터트리며 살인행각을 저질렀습니다.
“개한마리 죽였을 뿐이다.” “야타족을 다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마음속에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끔찍
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후에 그들 중 부두목은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좀 더 일찍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자신들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마지막 사형이 집행되기 전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없지만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성찬을 받았을 때 그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외톨이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가정환경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된다면 어떤 고난도 환경도 견디며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지수를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지수가 높아지시기를 바랍니다.
IQ(지능지수)와 EQ(감성지수)가 개인적인 부분이라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은 관계지수 또는 공존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연락처를 알고, 많은 사람을 아느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관계지수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연합의 지수로, 혈연이나 지연의 이기적인 맥이 아닌 타인과 협동하는 우리 공동체의 기본이며, 삭막한 인간관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우선적으로 개발해야 할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NQ로 살아라]의 저자 김무곤 교수는 관계지수를 높이기 위한 기본조건으로 다음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You First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둘째, Understand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잘 기울이고,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숙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Win-Win 남이 잘 되야 나도 잘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No give, No take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잘하고 먼저 베풀라는 것입니다.
가정사역 연구소의 송길원 목사는 네트워크(Network)의 영어 첫자를 이용해  NQ 7계명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N은 Need로 상대의 욕구와 질문에 민감하라는 것입니다.
E는 Encouragement로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며,
T는 Thank you로 매사에 감사하라는 것이며,
W는 Wow로 작은 것에도 감격 감탄하라는 것이며,
O는 Ok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생각만이 아니라 표현도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R은Remember로 상대의 이름과 관심을 기억하고,
K는 Kindness로 늘 친절을 베풀며 삶을 살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누군가가 여러분의 손을 붙잡기를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가까이에서 힘들어 하며 손짓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보시기 않겠습니까?
때로 내 삶이 외톨이처럼 외롭고 힘들어도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관계지수를 높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기우리고 친절을 베풀면서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행복하고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오늘은 작은 예수들이 되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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