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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체의 한계를 극복할 때 (왕하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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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도의 한 왕이 평복을 입고 지방을 순찰하는데, 어떤 거지가 와서 무엇을 좀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이 왕은 그 거지에게 말하기를 “네가 먼저 무엇을 내게 주면 나도 네게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거지는 왕에게 줄 것이 별로 없었다.
생각다 못해 앞 동네에서 구걸한 옥수수 한 되 가운데서 아까워서 다섯 알만 집어주면서 “제게는 이것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때 그것을 받은 왕은 뒤에 따라오던 재정대신에게 “금자루에서 이 옥수수알만한 금덩이를 5개 꺼내게”라고 한 뒤 그것을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 순간 거지는 속으로 크게 후회했습니다.
“아하!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옥수수 주머니를 아예 다 사람에게 드릴 걸! 그랬으면 그만큼 금덩이를 받았을 텐데. 내가 왜 다섯 알만 드렸던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오래 살고 싶지만 그것이 힘들 때가 있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데 그것 또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들 낳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딸을 계속 낳을때가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생각지 않는 좋은 일을 만날 때가 있고, 또 갑자기 어려운 일을 만나 어쩔줄 몰라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 겪음으로 인해 우리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구나, 우리의 인생이 약하고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나아만의 얘기가 바로 그런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나아만 장군의 지금 처한 상황입니다.

#1절: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였더라”

나아만의 지금 위치는 어떤 자리였습니까?
그 당시 세계최고의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즉 아람나라의 군대 총사령관이나 국방부장관쯤 되는 고위관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과거에 자신의 나라인 아람을 위기에서 구한 일로 인해 왕에게 아주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다”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외형상의 모습은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군대장관이지요, 왕에게 인정받고 있는 크고 존귀한자이지요, 큰 용사였습니다.
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런 위치에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렸다는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그가 가진 돈이나, 지위나 아람의 의사들의 의술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해볼 수 없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인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에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만족할만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적으로는, 겉으로는 만족할 만한 상황이고 남이 부러워할만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속에는 인생의 고민이 있고 삶의 궁극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나아만 장군처럼 겉으로는 좋아 보이고 만족해 보이지만, 남에게 말 못할 속사정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개인도 예외없고, 어느 가정이나 어느 교회, 나라나 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이 조금 여유있는 가정에서는 건강이 문제가 됩니다. 건강이 괜찮은데 자녀들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오시는 날까지 완벽한 교회는 이 지상에서는 없으며, 유토피아적인 완벽한 나라도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지위가 아무리 높고 명예가 있고 권세가 있고 권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편리함을 주는 것이지, 가장 불행한 비극을 막아주지는 못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었고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본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시면 사람들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도 생각지 않는 어려움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교회를 다니신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려움을 만난다는 것은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방향을 바꾸라는 사인입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이용하고 그 문제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문제가 우리에게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합니다. 그 문제로 인해 신앙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는 그 어려운 일로 인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죠.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수많은 문제들을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이 그런 어려움을 만날 때, 피할 길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그 길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에서 노예로 잡아온 작은 하녀의 말이었습니다.
#3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더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엘리사 선지자였습니다.
나아만은 그 작은 하녀의 말을 듣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들려옵니까?
성경말씀으로도, 기도할 때 들려주시는 음성으로도 들을 수 있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또 다른 경우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발람선지자는 나귀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아만은 작은 하녀가,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붙들어온 그 하녀가 한말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작은 아이가 바보같은 소리를 하네, 이 큰 아람나라의 모든 의사들도 못 고친 병인데, 뭐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그 병을 고친다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네” 그렇게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든 일에 영적인 눈을 열어야 하고 영적인 귀를 열어야 합니다.
나에게 좋은 말만 하는 자뿐만 아니라, 나의 영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기분 언잖은 말을 해도 그것을 귀하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좇겨 갈 때에 시므이란 사람이 마주 좇아 나와서 다윗에게 저주 함/ 피흘린 자야, 비루한 자야 가거라 가거라, 왕에게 한 필부가 그렇게 조롱하고 저주합 / 같이 가던 다윗의 장군 중에 아비새란 사람이 다윗에게 말함 / 저자를 죽일까요, 어떻게 왕에게 저런 말을 하면서 저주를 합니까? / 그때 다윗이 무슨 말을 합니까?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다

여러분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 마음의 자세와 겸손이 우리를 살릴 수 있고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이 신앙생활하시는 우리 교우들의 말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분들의 말이 하나님이 말씀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나에게 지나치는 예수님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 들음으로 인해 내 삶이 바뀌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그분들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로 보여야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엘리사의 말과 나아만의 행동입니다.
나아만은 그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이 왔다는 말을 듣고도 밖에 내다보지도 않고 한마디 말만 합니다.
#10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은 노발대발합니다. 여러분 지금 누가 답답합니까?
나아만입니까? 엘리사입니까? 누가 문둥병에 걸리고 누가 고침 받아야 합니까?
모든 상황이 나아만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누가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좋은 자존심은 지켜야 하지만 나쁜 고집은 버려야 합니다. 좋은 전통은 지켜야 하지만 나쁜 전통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1-12절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멕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겉으로만 보고 육신적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내 생각이다는 것입니다. 이 요단강물보다 아마나와 바르발이 더 낳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물을 보고 이야기 한 것일까요? 어느 강물이 더 깨끗한 것을 보고 말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과 일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일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만약 나아만이 자신의 생각대로 그대로 돌아갔다면, 그대로 가서 아마나와 바르발강에 가서 자신의 몸을 씻었다면 낳았을까요?

내 생각이 때를 따라 좋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계산해 보니까 그럴듯하게 보일때가 있습니다.
교회일이나, 기관이나 선교회일도 때를 따라, 내 생각이 좋아 보이고 화려해 보이고 그렇게 해면 될 것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대면서 내 생각을 주장합니다.
요단강보다 아마나와 바르발의 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얼마나 더 좋은데요. 1급순데요.
그런데 그것은 내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고, 엘리사의 생각이 아니고 내 생각, 나아만의 생각, 안되는 생각입니다. 망하는 생각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물이 얼마나 깨끗하냐, 유량이 얼마나 되느냐, 강이 얼마나 크냐 그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포기할 수 있느냐, 내 고집을 꺽을 수 있느냐, 하나님 말씀앞에서 내 모든 것을 뒤로 할 수 있느냐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생각과 상식과 노하우에, 안 맞는 말이라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면 순종할 수 있고, 내 생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느냐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이론적으로 보면 나아만의 말이 맞습니다. 요단강물은 적고 좁고, 물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7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리고 아람나라의 장군인데 그렇게 대접하는 것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그런데도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느냐, 내 자존심이 깍이고 체면이 무너지는 데도,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견딜 수 있느냐, 내 생각을 버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느냐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갈 때 그 종들이 이야기 합니다. 한번 해보자고, 안 되도 본전 아니냐고
#13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니이까”
그 유량이 적고 흙탕물인 그곳에 목욕했을 때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나아만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요?
6번째 몸을 담글 때 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흙탕물이 몸에 묻고, 몸이 더 지저분해 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7번째 몸을 담그고 일어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4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공동번역 “새살이 돋았다”

하나님의 역사는 7번째까지 몸을 담글 때 일어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때, 하루에 한번씩 육일 동안, 열두 번 돌 때까지도 아무런 흔적이 없었습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6번째 몸을 담글 때 까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 역사들이 일어났습니까?
13번 끝까지 다 돌았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졌고, 요단강에 7번 끝까지 몸을 담갔을때, 문둥병이 낮고 그 살결이 아이피부 같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대로 끝까지 순종할 때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느 한 선교사님이 아프리카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어느날 어린 아이가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얘야, 얼른 땅에 바짝 엎드려라!” 그 아이는 대꾸하지 않고 즉각 땅에 엎드렸다.
“자, 이제 내게로 빨리 기어와” 아이는 시키는 대로 기었다.
“이제 일어나서 나에게 뛰어와!”
그 아이는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와 안겼다. 그리고 나서야 자기가 놀고 있던 나무를 쳐다봤다. 거기엔 길이가 5m나 되는 무서운 독사가 아이를 물려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만일 그 아이가 아빠에게 짜증을 내고 “내 생각에는” “지금 놀고 있는데 … 당장 가야 됩니까?”하며 꾸물거렸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내 인생이 축복받고 잘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내 생각대로 하면 실패합니다. 내 방법대로 하면 넘어집니다.
모든 문제에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수학문제도 공식을 이용하고 적용하면 풀립니다. 공식을 이용해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개인과 가정에 언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까?
내 생각을 버릴 때 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설 때 입니다.

우리교회에 언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까?
우리 개개인의 생각의 한계를 극복할 때 입니다.
내 생각이 사라지고, 성령께서 우리교회를 주장하고 다스리실 때, 능력이 나타나고 부흥이 일어나고 초대교회의 그런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에는” 이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 대신에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축복된 삶입니다.

끝까지,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이 역사를 눈으로 볼 때까지, 문둥병이 나을 때까지,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까지, 우리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그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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