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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관용으로 갈등을 극복하십시오 (창 1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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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창 13: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창 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창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창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 13: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 13: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갈등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 노사 간, 이념 간의 갈등은 상호간에 적대감을 재생산하면서 국가의 에너지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열린 '갈등 관리 워크숍'에서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지 못하면 낭비와 손실이 초래되어 마침내 사회 파탄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는 대통령의 목소리에서 파괴적인 갈등으로 인해 국가적인 위기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볼 수 있습니다.

  1913년 7월 북극 탐험을 떠난 바렛 선장이 이끄는 칼럭 호는 대부분의 선원들이 얼어죽거나 영양 실조로 죽었고, 한 명은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대원들은 서로 노획물을 몰래 감춘다고 비난했고, 실제로 사냥감을 잡은 사람은 몰래 감추고 혼자 먹거나 조금밖에 잡지 못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갈등이 증폭되자 마침내 한 대원은 격분해 동료를 총으로 쏴버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고, 얼마 후 한 대원이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상호 불신과 갈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이 칼럭 호와는 정반대로 1914년 남극 대륙의 꿈을 안고 새클턴의 인듀어런스 호가 27명의 대원을 태우고 출항했습니다. 탐험 327일째인 1915년 10월 27일, 새클턴의 배 역시 남극의 부빙에 배가 난파하면서 칼럭 호와 같은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난파된 지 1년 후,위슬리 선장의 마지막 항해 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1916년 8월 30일 모두 무사하다!" 이들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새클턴의 리더십 아래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조카 롯과의 갈등을 경험하였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윈 롯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해 고향을 떠날 때 큰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붙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다보니 롯도 어느새 큰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가축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금과 은이 풍부해졌습니다.  그런데 부요해진 롯이 어느날 돌아보니 자신이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아브라함과 경쟁을 해야만 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지내다보니 물도 부족하고 풀도 부족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어느날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크게 싸우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목축이 주업인데 서로 좋은 풀과 물을 차지하려고 하다가 심하게 싸운 것입니다. 소유때문에 관계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롯과의 갈등을 풀기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관계를 소유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아브라함은 다툼이 아닌 관용을 가지고 먼저 다가갑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창 13:8)'  우리는 원수가 아니고 가족이니 서로 다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먼저 싸우지 않기 위한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제안을 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대폭 양보한 제안입니다. 자신이 어른임에도, 자신에게 우선적인 권리가 있음에도 롯에게 먼저 선택할 기회를 줍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관용을 드러내며 갈등을 풀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창 13:10,11)' 

  롯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냉정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갈등을 풀고자 먼저 손을 내밀면 그리고 관용을 드러내면 꽁한 마음을 풀고 "아닙니다. 큰 아버지, 아랫 사람들을 잘 다스리겠습니다." 하든지 "큰 아버지가 먼저 선택을 하시지요. " 해야 마땅한데 롯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얼른 좋아보이는 땅을 선택합니다. 물이 넉넉한 땅, 에덴 동산처럼 푸르고 아름다운 땅을 선점해서 아브라함을 떠나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관계의 갈등을 겪을 때 보여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관용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갈등을 풀기 위해 구체적으로 관용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습니까?

  1. 관용은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집착에서 옵니다. 집착하면 눈이 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 놓고 왔지만 어린 조카 만큼은 버리고 올 수 없었습니다. 동생이 젊은 나이에 죽고 그가 남긴 어린 혈육인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늘 롯을 곁에 두고 아꼈습니다. 좋은 것을 챙겨주고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롯이 함께 잘 살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여 도와주었습니다. 이제 롯이 장성하였고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롯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롯을 떠나 보내야 할 때가 지금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껏 롯을 붙잡고 있던 손을 펴서 롯을 떠나 보냅니다.  지금까지 곁에 두고서 아끼고 사랑하며 보살펴 주었던 사람을 놓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유욕이 강해서 사람마저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과잉보호합니다. 곁에 끼고서 모든 것을 다 해주려고 합니다. 조금만 자신의 영향력을 벗어나려고 하면 불안해합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유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성숙한 사랑은 소유물처럼 여기지 않고 더욱 성장하도록 떠나 보내주는 것입니다.

  관용은 집착을 버림으로 시작됩니다. 집착은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집착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훈련은 참 중요합니다.  이 때 롯에 대한 집착을 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또 모리아 산에서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에 대한 집착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착을 버림으로 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집착을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와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면 혹시 집착이 그 원인이 아닌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도록 꼭 붙잡고 있는 손을 펴서 떠나 보내야 할 시기가 지금이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불안해도 안타까와도 더 성장하도록 반드시 떠나보내야 합니다. 집착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움켜쥔 손을 다 펴시기 바랍니다.

2. 관용은 축복해서 보내는 것입니다.

  관용은 너그러움에 있습니다. 관용은 베풂에 있습니다. 관용은 덕스러운 것입니다. 덕은 살리는 것입니다. 덕은 배은 망덕한 사람에게도 축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별입니다. 아름다운 만남도 귀하지만 아름다운 이별은 더 귀합니다.

  아브라함은 관용은 떠나는 롯을 축복해서 보낸 것입니다.롯과 헤어진다고 해서 영원히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 헤어지면 영원히 다시 볼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막 대합니다. 저주하며 헤어지려고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조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을 잘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을 떠나 보냈습니다. 어떤 분은 떠나면서 교회를 비난하며 떠납니다. 어떤 분은 떠나면서 목사를 비판합니다. 자신이 떠나는 이유를 정당화하려고 상처를 주고 떠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가 떠나는 일은 가슴 아픈데 그런 비난을 들으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저는 같이 비난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오히려 힘을 다해서 축복을 해서 떠나 보냅니다. 저를 찾아와 떠난다고 말하면 진심으로 축복기도를 합니다. 교인들을 통해 누가 교회를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하면 심방을 가서 진심으로 축복을 해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만남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떠나보냅니다. 그러니까 떠나면서도 감동을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떠나고 나서 다른 사람을 전도해서 보내 줍니다. '그 목사님은 다르더라 떠나는 사람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해 주더라. 나는 떠났지만 너는 그 교회가면 좋을 것 같다.'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 될 때 인간관계가 풍성해집니다. 아브라함은 기꺼이 롯이 잘 되기를 위하여 양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자기만 잘 되기를 기대하여 좋은 땅을 혼자 차지하고 황무지 같은 땅을 아브라함에게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면 롯을 아주 잘 되어야 하고 아브라함은 비참하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관용을 베푼 아브라함은 더 풍성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롯은 비참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처럼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상처를 주고 떠나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주를 하고 떠나는 사람도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관용은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대하며 그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고 있습니다. 롯이 장성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독립할 때가 되었다는 것 등을 인정하고 잇습니다.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나의 입장, 나의 방식,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한번은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야전 사령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맥클레런 장군이 전장에 나가고 자리에 없어서 몇 시간동안 사령관실에서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멕클레런 장군이 돌아왔지만 그는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한 마디 말도 없이 2층 숙소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한참 후 부관이 나타나 "장군께서는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탠턴 국방장관이 직속상관인 자신과 대통령까지 무시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가지 치밀어 올라 "대통령 각하 저렇게 무례한 놈은 제 생전에 처음입니다. 저런 놈은 당장 직위를 박탈해 버려야 합니다."

링컨이 잠시 침묵하더니 "아닙니다. 맥클레런 장군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기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장군때문에 전쟁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말고삐라도 잡아 주고 그의 군화라도 닦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링컨은 장군이 잠도 못자고 전투에 시달렸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령부를 떠났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관용을 베푸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리고 관용을 베풀면 우리의 가슴이 넓어집니다. 사람을 얻게 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됩니다. 나아가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관용을 베풀다보면 낙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관용을 베풀다보면 내가 손해를 본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손해를 보았습니다. 좋은 땅을 롯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관용을 베푸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롯은 매정하게 그의 곁은 떠나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돌아온 것은 물도 귀하고 풀도 귀한 산지뿐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런 땅에서 가축을 방목하며 살아갈 일이 암담했습니다. 게다가 그 땅에는 사람도 별로 살지 않아서 아무도 아브라함의 곁에서 그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이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크게 손해를 본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큰 축복이 임했습니다. 홀로 남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관용을 베푸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유심히 보시고 찾아와 복을 주셨습니다.  그는 영적인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부요하게 됩니다. 롯은 소돔의 멸망과 함께 평생 일구어 논 재산을 다 잃습니다만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관용을 통하여 행복을 맛보게 되었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영향력잇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갈등이 있습니까?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계십니까? 혹시 손해보기 두려워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직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갈등이 계속되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갈등은 쉽게 해결될 것이며 하나님은 여러분의 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관용하는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집착을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에게 손해를 입히고 떠나는 사람까지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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