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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기도하게 하소서 (사 5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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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났던 총격사건은 미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과 아픔이었습니다. 30명이 넘는 젊은 영혼들이 쓰러져간 참사였고 무엇보다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한 어느 대학의 교수가 자조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라고 이런 젊은 학생이 없겠는가. 다만 그 손에 총이 들려있지 않을 뿐이지.”

  우리 마음속에도 이런 미움과 분노,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없을까요? 우리 사회는 점점 살벌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상막해지고 있다고 해도 틀림없습니다. 1999년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두 남학생이 총격사건을 저질러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그들을 분노하는 10대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혐오감과 증오감으로 가득 찬 청소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경험했던 한 고등학생이 쓴 글로도 알려져 있고, 혹은 어떤 목사님의 글로도 알려져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은 우리가 아주 역설적인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성질은 더 급해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더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지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하며 미워하기는 너무 자주 하고 있다.
생활비를 버는 법을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었지만 시간 속에 삶을 채워 넣는 것은 실패했다.
달에는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길을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우리의 편견을 부수지는 못했다.
자유는 더 늘어났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평화를 더 많이 이야기하지만 지역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어떻게 보면 풍요의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 같아도 우리의 마음은 더 분주하고, 우리의 생각은 더 작아지고 남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가 어떤 면으로는 외부를 향해서 절제하는 것 같아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 순간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을 지닌 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글에 이렇게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역설적인 시대,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축복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는 생명운동입니다.
기도는 자기를 반성하는 운동입니다.
기도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하는 운동입니다.
기도는 불화와 다툼을 극복하는 사랑의 운동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들을 기도로 극복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영혼의 숨쉬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친구사이에 요즘 무슨 운동을 하냐고 물으면 숨쉬기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농담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숨쉬기 운동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육체의 숨쉬기 운동은 생명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조 비테일이 쓴 ‘인생의 놓쳐버린 교훈’이라는 책에서 1분 안에 기분이 좋아지는 방법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라. 천천히 깊게 큰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어라. 크게 숨을 들이마셔라. 폐의 움직임을 느껴보라. 그대로 몇 초 동안 숨을 멈추고 길게 천천히 편안히 내셔라. 다시 한 번 반복해라. 필요하다면 계속 반복하라. 답답한 기분을 해소하는 데에는 몸속에 산소를 불어넣는 것이 그만이다.”

  집에 있을 때 큰 호흡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또 산책을 하다가 크게 호흡을 하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쉬는 것은 얼마나 좋은 운동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가장 하기 편안한 운동이 숨쉬기 운동입니다. 그런데도 숨쉬기 운동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임종을 앞두고 있는 분들을 만나면 수십 년 동안 숨쉬기 운동이 쉬웠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숨을 토해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생명이 숨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은 어떨까요? 우리 영혼의 건강과 목숨도 바로 영혼의 숨쉬기인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즐겁습니까? 기도하는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하려면 결심 또 결심해야 가능합니까? 기도하려면 자신과 싸움하듯이 해야 합니까? 기도는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다가 예배드리러 와서야 대표기도 할 때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죽어가는 자가 다시 숨쉬기를 하면 생기가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우리 신앙에 생기와 능력이 생기려면 우리는 다시금 영혼의 숨쉬기 운동인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우주의 설계자 아니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 접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접촉하면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만드신 분과 접촉하면서 내게 사랑하는 기쁨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유 그 자체이신 하나님과 만날 때 진정한 자유를 허락받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나를 창조하신 분, 우주를 만드신 분, 생명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고 그분의 모든 능력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내 신앙이 없어졌다고 탄식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나는 자꾸 의심이 생기고 회의하는 마음이 든다고 불평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예수 믿는 것이 기쁘지 않다고 투덜댑니다. 교회 생활이 감사하지 않다고 하나님 앞에 항의합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할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6)
 
  이 말씀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만나려고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내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숨쉬기는 육체의 짐이 아닙니다. 숨쉬기가 육체의 짐이 되는 순간, 육체는 깊은 질병이 든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짐이 아닙니다. 기도 자체가 우리영혼을 살리고,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부여해주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놀라운 것은 육체적인 숨쉬기는 멈추면 재생할 수가 없습니다. 5분, 10분 이상 숨이 멈추면 다시 숨을 쉬지 못하고 육체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영혼의 숨을 조금 쉬다가 다시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되살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영혼이 살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영혼이 썩어가고 질병이 들어 모든 것이 무능하다고 낙담할 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의 은총을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니라” (이사야 55:7)
 
  하나님은 너그럽게 용서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서야 합니다. 이제 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로 가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이제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품으면서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기도입니다.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 나오면 ‘오늘 내가 만날 사람이 왔는가? 누가 나를 보는가? 목사님이 나를 알아주는가?’를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나올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왔어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이름 불러도 좋습니다. “하나님, 저 OO 왔어요. 하나님 만나러 왔어요. 하나님과 대화하려 왔어요. 하나님 사랑하고 싶어 왔어요. 하나님 저를 사랑하는 말씀 다시 듣고 싶어서 왔어요.”

  기도할 때는 체면과 형식을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면 됩니다. “하나님 만나러 왔어요. 하나님 저 왔어요. 하나님, 저 아시잖아요? 하나님 제 모습 아시지요? 제가 어떤 인간인지 아시지요? 하나님 사랑하고 싶어요. 제 인생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싶어요. 제가 갖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제 마음속에 미움이 자꾸만 생깁니다. 이 미움을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제가 갖고 있는 어려움을 어떻게 해야 이겨 나갈 수 있을까요? 도와주세요. 저와 함께 동행해주세요.”
 
여러분이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때로는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나와서 그냥 문제를 토해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면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앉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앞자리에도 계시고, 뒷자리에도 계시고, 2층 예배실에도 계시고, 지하에서 스크린으로 예배드리는 곳에도 계시고, 교회 본당이 아닌 선교관에서 스크린으로 예배드리는 분들에게도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자신이 예배드리는 고정자리가 늘 맨 뒷자리로 고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만 예배드리는 마음에 차이가 납니다. 언제나 뒤에만 앉으면 ‘누가 지금 예배를 잘 드리는가, 누가 제대로 기도하는가, 누가 찬송을 제대로 부르는가.’하고 예배의 감시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조금 일찍 나와 예배실 앞에 앉아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왔어요.”
 
  예배실의 앞자리가 다 있는데도 굳이 뒷자리에 앉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저 왔어요. 하나님과 이야기 하고 싶어요.” 바로 이런 마음이 기도하는 마음이고 복된 마음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드릴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여기서 내 생각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내 길보다 높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뛰어납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내 삶 전체를 내놓으면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당신의 지혜를 갖고 싶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능력을 갖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순간, 내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로 바뀝니다.
  기도하는 순간, 내 걱정이 하나님의 걱정으로 바뀝니다.
  기도하는 순간, 내 근심이 하나님의 근심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내안에 있는 미움과 분노가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앞에 서지 않으면 속에 있는 한 맺힌 것들이 풀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토해내야 합니다.
 
모세가 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까? 모세 자체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위대하셨기 때문에 그의 생애가 위대해진 것입니다. 그의 생각과 마음이 위대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애굽기 33:11)
 
  모세가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토해낼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타고났기에 노래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도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누구와 함께 여행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야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서 떠날 수가 있습니다. 사랑했던 친구도 내 마음을 몰라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친구,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성령님입니다.
  여러분 안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 앞에 토해내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가슴으로 받아드리면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삶의 문제,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교회의 문제,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역사로 바뀔 것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마음 놓고 기도하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갈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옵소서. “하나님, 저 여기 있잖아요. 제 모습 봐주세요. 주님 저를 알잖아요.”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과 음성을 듣고 주님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당면한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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