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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마 사람인 우리를! (행 16: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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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살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내 딴에는 생각해서 한 일인데 고맙다는 말이나 칭찬 한 마디 없이 오히려 책망과 비난만이 쏟아질 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잘 해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 어찌 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마음처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상대방을 슬프게 만들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정마저도 말라버린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저 나 한 몸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고 심지어는 어려움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울 정도로 이 세상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이 당한 일이 바로 그랬습니다. 계속해서 뒤를 따라 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귀신이 들려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서 귀신을 몰아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닌 욕설이었습니다. 모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알아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흠뻑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해서 조금도 억울해 하거나 몸부림치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찬양하며 기도했더니 놀랍게도 옥문이 열렸습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이 뜻이 있겠지 하고 조용히 기다리다보니 그 다음에 벌어진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과 그 온 집에 복음을 전하게 된 일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다 함께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일에 이어서 다음날 이어진 이야기를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될 때 펄쩍 뛰면서 반발을 합니다. 심지어는 너무도 억울한 나머지 그 억울함을 풀겠다고 목숨을 끊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억울함을 어떻게 풀길이 없으니 마지막 수단으로서 목숨을 끊음으로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했음을 나타내 보이려는 나약한 사람의 모습일 뿐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마구잡이로 복수하겠다고 대들기도 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주 논리 정연하게 반발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 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소리 내어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고 그 온 집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세일 뿐입니다. 언제 풀려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언제까지나 갇혀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에게 복음도 전했고 그들이 모두 기쁨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세례까지 받았으니 그렇다면 사실은 내가 이렇게 두들겨 맞고 갇히게 된 것은 너무도 억울하다고 하면서 한 미다 할 법도 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 감옥에 갇힙니다. 그건 간수장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바울을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상관에게 가서 바울은 억울하게 갇혀 있으니 풀어주자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자기는 그저 감옥을 지키는 간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로마 관리들이 부하들을 보내어 그 사람들을 풀어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기뻐하며 얼른 달려가 바울에게 이 말을 전했습니다.
"관리들이 선생님과 실라를 풀어 주라고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이제 나오셔서 평안히 가십시오."

하지만 바울이 하는 말이 정말 가슴이 떨릴 이야기였습니다.
"로마 시민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매질하고 감옥에 넣더니, 이제 와서 슬그머니 우리를 놓아 주려는 겁니까?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라고 하시오!"

이게 사실이라면 이제 로마 관리는 큰 탈이 났습니다.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매질하고 감옥에 넣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상부에 보고라도 된다면 그들은 당장 파면될 뿐만 아니라 국법에 의해서 처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로마 시민이 갖는 권한이 크다는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 시민은 재판에 의해서만 매질하고 가둘 수가 있습니다. 재판이 없이는 결코 로마 시민을 가둘 수도 매질할 수도 없게 함으로써 로마 시민의 자부심을 살려주는 것이 당시 로마의 국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말을 들은 관리의 부하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한걸음에 달려가서 바울이 한 말을 전합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관리들이 어찌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눈앞이 노랗습니다. 그래 얼른 달려가서 바울과 실라에게 사과하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그 도시에서 떠나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바울과 실라가 그 도시에 그냥 있다가는 다시금 그들을 고발한 사람들과 마주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과 다시 시비가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요 결국 사실 여부를 확인해서 바울을 고발했던 사람들을 무고죄로 가두어야 하고 그러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자기들도 결코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최선의 방법은 하루라도 빨리 바울과 실라가 그 도시를 떠나도록 하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가서 정말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고 정중하게 그 도시를 떠나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떠나기는 왜 떠나냐고 이렇게 억울할 일을 당하고 어떻게 그냥 떠날 수가 있냐고 우리를 억울하게 고발했던 사람들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왜요?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빌립보 성에서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복음을 전하면서 내가 조금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펄쩍 뛴다면 그리고 내가 당한만큼 갚아야 한다고 한다면 그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의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조금 손해보고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펄쩍 뛴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닫힐 것이요 그렇다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도 막힐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또 전도도 하도록 부르셨다고 마가복음 3장 13절로 15절에 기록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믿음 안에서의 사귐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 안에서 서로 교제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억울하고 속상한데 입을 다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물론 우리들을 죄 가운데서 건져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러나 막상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죄목을 신성 모독죄가 아니었습니까? 언제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도 억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모욕과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비난하고 외쳐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 앞에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을 때 우리 역시 용서할 수 있고 억울하고 분해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수가 있고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가 있게 되더란 말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렇듯 오해를 살 수도 있고 그래서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은 억울하지만 그 억울하고 분한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찬양하고 기도하였더니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과 그 온 집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 더 은혜로운 결과를 얻을 수가 있었고 다음날 아침 그만 감옥에서 풀어주라고 하는 관리의 말을 전하러 온 사람들에게 조용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관리들의 실수를 지적한 결과 원하는바 사과도 받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빌립보 성을 떠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을 품어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끝까지 성도들을 돌아보며 격려하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감옥에서 나온 바울과 실라는 그냥 빌립보 성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떠나기 전에 아직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빌립보 성의 성도들을 격려하는 일입니다. 사실 바울과 실라가 그렇게 붙들려가 매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루디아와 빌립보 성도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나 걱정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바울이 감옥에서 기도한 것 이상으로 그들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을 만나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도우셨는지 알리고 격려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 바울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루디아의 집으로 달려갑니다. 비록 하루 만에 다시 만났지만 그 반가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지난밤에 이루어진 모든 일을 전하고 또 자기들이 어떻게 풀려났는지를 그리고 로마 관리들이 와서 자기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자기들을 풀어주며 제발 빌립보에서 떠나달라고 간곡하고 부탁하더라는 말을 다 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이제 빌립보를 떠날 수밖에 없노라는 말을 전하며 격려할 때 성도들의 감격이 아주 컸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함께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의 도우시는 역사와 기도 응답의 역사를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서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며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됩니다. 그저 함께 모여서 잡다한 세상 이야기나 나누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어떤 일이 우리 앞에 닥칠지 모릅니다. 평범하게 지나가는 것 같으나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만히 돌이켜 보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서로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놀라운 힘이 됩니다. 더 큰 은혜 가운데 살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속상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 아픈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서로 위로하며 또 함께 기도로 돕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기쁨도 아픔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열고 함께 사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우리가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마음을 열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활짝 열고 함께 하는 것이 귀한 것이요 그럴 대상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너무도 소중한 일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성도들을 만나 격려하였다고 하는 것은 결코 어떤 불만을 털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밤새 근심하고 염려했을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전하면서 이것이 바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전해들을 때 성도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격려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설사 그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참으로 잘했노라고 수고가 많았다고 격려하여 준다면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큰 힘이 될 것이요 앞으로 더 잘 해 보겠노라고 다짐하게 되는 계기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수아 9장에 보면 기브온 사람들이 거짓으로 멀리서 온 사람들인 것처럼 속이고 이스라엘 백성과 화평조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사흘 후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원망을 합니다. 그럴 때 족장들이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우리가 속아서 조약을 맺었다고 해도 그 약속을 우리는 지켜야 한다고 하며 백성들을 달랩니다. 어떻게 최고 지도자로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고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분명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실수를 했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족장들은 그 누구도 여호수아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결정이라고 해도 그 결정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여호수아의 손을 들어줍니다. 비록 속아서 한 약속이라도 그 약속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족장들의 말이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던 여호수아를 다시 세워주는 귀한 격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그 누구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아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때 서로를 격려해주고 힘을 불어넣어 준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자칫 다시 일어설 수도 없을 만큼 망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새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격려입니다. 그래서 격려하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전혀 아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기운이 넘쳐 날 때도 있지만 힘이 다 빠져버려서 주저앉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격려입니다. 그리고 가장 힘들 때 격려해 주는 사람만큼 고마운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잘못했다고 야단치고 비난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다 이런 격려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함께 있느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되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신다고 하는 것 역시 귀한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있는 바울이기에 그 역시 빌립보 성도들을 떠나기 전에 다시 찾아가 만나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격려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시도록 하십시오.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마음이 가득할 때 이런 격려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누가 나를 비난하기보다는 격려해줄 때 더욱 고맙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누구를 비난하기보다는 격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오히려 나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찾아 격려하며 앞서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또한 격려함으로 힘을 북돋아주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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