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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향의 영광을 얻을 자 (히 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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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본향의 영광을 얻을 자     
♣ 본 문: 히브리서 2:5~12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소신과 주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결과의 예로, 몇 년 전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히딩크 감독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 동안 그 사람이 추진하는 계획에 대해 비판의 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주관대로 대표 팀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예상 밖의 향상된 기량을 보이며 한국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올려놓았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소신이나 주관이 자신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독선으로 나타나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고통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무신론 사상가 볼테르의 경우, 그는 한 기독교 과학자로부터“앞으로 시속 80km를 달리는 자동차가 나올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볼테르는 비판하기를“기독교는 이처럼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만일 사람이 기계를 이용하여 80km를 달린다면 사람의 귀 고막이 터질 것이고, 뇌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볼테르가 확신한 자신의 상식은 스스로 무지한 자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어떻습니까? 일반 여객기가 시속 800km~900km로 날고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항공기회사들이 합작으로 만든 콩코르드 비행기는 시속 2,179km로 날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보통 우주선은 시속 16만km나 된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인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신성모독 죄로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황청이 확신하고 있었던 상식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400년이 지난 몇 년 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때 갈릴레오를 정죄한 잘못에 대하여 속죄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틀림없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나의 소신, 나의 지식이 사실과 전혀 다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대한 불신자들의 인식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 불신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지식 밖의 세계 즉 “장차 오는 세상인 하늘나라”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한 장차 오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나라 존재의 비밀을 알려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주목적을 땅에서 받아 누리는 축복에 두는데 그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인 유아기적 신앙입니다. 땅에서 받아 누리는 축복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에게 덤으로 주어지는 것일 뿐 그것이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고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신 모습에 대하여 성경은 기록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하셨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아직까지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있습니다.

무지한 개인의 아집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은 “어리석다”(시편 14:1)고 하셨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내세를 부인하는 것은 자동차의 시속 80km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볼테르와 같고, 엄연히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지구를 돌지 않는다고 주장한 카토릭 교황청의 무지함과 같습니다.

플라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마음의 병자이다. 눈이 병들면 볼 수 없고, 귀가 멀면 듣지 못하듯, 소경이 빛을 보지 못하듯, 고장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고귀한 장차 오는 세상 즉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1.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본문 5절~6절에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히브리서 2:5~6)라고 하셨습니다. 장차 올 세상 즉 영광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는 천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위하여 준비된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요한복음 3:16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 얻는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12)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길에 대하여 A.W. 토저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이르는 많은 길 중의 하나가 아니며, 여러 길 중 최선의 길도 아니다. 그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인류의 문화와 문명에 기독교만큼 큰 영향을 끼친 종교가 없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과 만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2. 고난 받는 사람입니다.

본문 9절에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영광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은 십자가 고난 뒤에 주어졌습니다.

본문 10절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족했던 어느 부분이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5~6)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5:8~10 말씀에 기록하시기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하셨습니다.

장차 오는 영광에 우리들이 참여하려면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로마서 8:17~18말씀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고 했습니다. 

장차 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땀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피 흘림도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영광이나 장차 올 하늘나라의 영광 모두가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33~36에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마지막 로마에서 순교한 바울 사도는 일생동안 이러한 각오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18) 이 성스러운 각오와 다짐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 순교자의 상징인 주기철 목사님은 1940년 여름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뵈오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해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그러므로 예수를 믿되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편안하게만 믿으려 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1:8에 말씀하시기를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하셨습니다.  장차 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땀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피 흘림도 있어야 합니다. 장차 올 하늘나라의 영광은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18)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후의 영광입니다. 땅속에서 막 캐어낸 광석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뜨거운 용광로를 거치면서 불순물이 다 제거된 후 비로소 가치 있는 순금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인격이나 지식이나 기술, 예술 등 인간의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고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시기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67)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경영의 귀재라 불리는 마스시다 고로스께는 임종시에 “나는 세 가지의 행운을 누린 자이다. 첫째, 조실부모한 것이고, 둘째, 건강이 약한 것이고, 셋째, 초등학교를 중퇴한 것이 그것이다. 열한 살 때 부모를 잃었으니 일찍 철이 들었고, 건강이 약함으로 건강관리를 잘해서 95세를 살 수 있었으며, 배운 것이 부족하기에 열심히 듣고 배운 결과 경영의 귀재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해마다 한차례씩 여리는 교단 총회가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있었습니다. 컨벤션센터 1층“김대중 홀”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에 대한 간단한 약사(略史)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할 때 입었던 수의(囚衣)와 이희호 여사가 손수 털실로 뜬 양말,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일명 김대중 옥중서신, 김대중 전대통령 저서 등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에도 죽지 않는 인동초(忍冬草)를 유난히 좋아하며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불굴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굳센 삶의 기록을 보면서 “인생은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도 예외 없이 고난을 겪게 됩니다. 걱정근심 없는 곳은 공동묘지뿐입니다. 근심이 있습니까? 걱정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고난을 대하는 태도에는 대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 체념형입니다. 이 유형은 역경을 만나면 쉬 포기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소극적이고 비생산적인 사람입니다.

둘째, 도피형입니다. 위기만 벗어나고 보자는 유형입니다. 시련을 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영광의 면류관이 없습니다.

셋째, 돌파형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창조적이고 진취적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통해 문화와 문명이 발전해왔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좀 어렵다하여 낙심하며 한숨 쉬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영광이나 장차 오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모두가 고난의 터 위에서 피는 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장차 오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요한계시록 2:10)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최선을 다하라 즉 사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땀 흘림이 없는, 눈물 흘림이 없는, 피 흘림이 없는 최선은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잠깐입니다. 성경은 밝히기를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8)하셨습니다.

이 고귀한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삶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샘솟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강 같은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건강의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삶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개같이 잠깐 지나는 세상이 끝나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 나라에서 쇠함이 없는 상급을 받게 됩니다. 이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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