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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비결 (요일 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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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류학자가 산에서 독수리 알을 가져다가 닭장 속에 넣고, 그 알이 부화하는 모습을 관찰해 보려고 했다. 독수리새끼는 병아리들과 함께 부화했다. 독수리는 병아리 틈에서, 병아리 흉내를 내며 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독수리의 몸은 병아리들보다 훨씬 크고, 날개도 튼튼하게 되었다.

  조류학자는 독수리를 날려보았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 땅에 내려와 병아리 흉내를 내었다. 어느 날 조류학자는 병아리와 닭에서 떠나, 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독수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 생각을 않고, 땅에 기어 다녔다.

  자신이 새 중의 왕인 독수리임을 알지 못했다. 난감했다. 이 독수리는 평생 닭장 속에서, 닭 흉내를 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하늘에서 어미 독수리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조류학자는 새끼 독수리에게 애를 쓰며, 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새끼 독수리는 어미 독수리의 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서서히 큰 날개를 펴고, 힘차게 하늘로 날아갔다.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준 말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의 사랑하는 방식은,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게 전수되어왔다.

  아무리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은 지적인 학습을 통하여, 감동 받는 법은 드물다. 우리는 대게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감동을 받는다. 사랑을 배우는 데는 지적인 학습은 거의 효과가 없다.

  그런데도 부모님들은 사랑을 지적인 학습으로, 자녀들에게 사랑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랑을 배우는 데는, 감화적인 방법과 반복적인 방법이 영향력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생동안, 본 대로 사랑하게 되어 있다.

  현대인들이 잘못된 사랑을 하는 이유는, 올바른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TV를 보면 대부분 잘못된 사랑을 보여준다. 그래서 잘못된 사랑을 하게 된다. 올바른 사랑을 하려면 좋은 모델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델을 통하여 받아들인 사랑 외에는, 할 수 있는 사랑이 거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랑의 모델을 가지고 있나? 닮고 싶은 모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델을 안다. 그분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지 못한다.

1. 어떻게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나? (요일4:15-16)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예수님을 받으려면, 삶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해야 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함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주인으로 인정함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일이다. 확실히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다른 구주를 생각할 수 없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자신을 삶의 구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 아니다.

  지식을 얻는 일과, 개인적으로 구주로 영접함은 다르다. 성경에 대해 많이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공부는 많이 했지만, 성경을 통하여 자신이 부족한 사람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회적 요소가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탈현대주의 사회(post modernism)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던 현대시대와 다르다. 비과학적인 논리도 수용하는 시대다. 이성보다는 감각을 더 중요시 하는 시대다.

  현대의 절대주의가 해체되고, 다원주의가 득세하는 시대다. 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데, 큰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다원주의란?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한 길이 있다는 말이다. 계룡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오직 한 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계룡산에 오르는 길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오를 수 있듯이, 예수님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오직 예수’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고 한다.

  다른 방법들도 넓은 마음으로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오직 예수’라고 주장하면, 아직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는 ‘독선주의’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요14:6) “…내가 곧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된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는 그리 인기 있는 학과는 아니다. 종교학과는 기독교만 아니라, 세계의 각종 종교들을 동등하게 가르치는 곳이다. 이 학과 출신으로 유명하게 된,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쓴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전혀 다르다.

  오강남씨는 지금 캐나다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으로 갑가기 유명해졌다. 오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공자나 석가모니와 같은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불교, 힌두교, 노장사상을 공부하며, 지적 황홀감에 빠져드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성령 체험은 부처님의 성불 체험과 같이, 성불하신 예수님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계시의 성취 등, 예수님에게 사용되는 이런 단어들은 오 교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단지 자신의 노력으로 구도에 성공한, 한 사람으로 본다.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명하게 된 또 다른 사람은 김동환씨인데, 그는 서울대학교 사상 가장 높은 점수로 졸업했다. 다니엘 학습법을 써서 유명해졌다. 그는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종교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불교나 유교를 깊이 공부하면서, 인간이 만든 종교의 한계를 보았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절감하고 감사했다. 다른 종교들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가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찬송가411장 3절 가사를 좋아하는데,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서,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X3) 성경에 써있네”

  예수님은 내가 잘못하면 잘못할수록 혼내지 않으시고, 내가 연약할수록, 죄를 더 많이 지을수록, 더욱 귀하게 여겨주시고 사랑하여 붙들어 주신다니, 이는 어떤 종교에서도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매우 똑똑한 두 사람이,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한 사람은 세계의 여러 종교들을 공부하고,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은 똑같다고 생각했고, 또 다른 사람은 세계의 종교를 공부하면 할수록, 기독교의 절대성이 부각되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다원주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영접 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어떤 사상과 종교 이론을 들이대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죄는 지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이라는 시인이 없다면, 그 말들은 모두 무의미한 말들이다. 기독교의 ‘오직 예수’라는 주장은, 편협한 독선주의가 아니다.

  많은 열쇠가 있다고, 내 집에 그 열쇠들이 다 맞지 않는다. 내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많은 여자들이 있다고, 그 여인들을 다 품고 자는 것이 넓은 마음이 아니다. 가슴에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내, 내 남편밖에 없다.

  내 아내만을 사랑함을 독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부와 같은 사랑이다. 다원주의 사고는 현대 가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만 사랑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다양한 가족형태를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다원주의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생각으로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데 장애가 된다.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게 만들어, 사회와 나라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야 한다. - 시인하라.

하나님께서는 외형이 아니라, 마음을 중요하게 보신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과 정들어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정이 들어야, 올바른 신앙생활이다.

  황혼이혼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70이 훨씬 넘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이혼을 청했다. 자녀를 낳으며 수십 년을 살아온 합법적인 부부이지만, 그들에게는 정이 없었다. 예전에는 법으로만 살았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점점 마음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신앙에는 감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현대 신앙인의 문제는 신앙생활을 머리로만 하려고 한다. 성경을 통해, 신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다.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는지, 예수님의 탄생도 죽음도, 부활도 재림도, 이론적으로 잘 안다.

  그러나 가슴은 냉랭하다. 신앙은 점점 이성주의에 머무르고 있다. 성경의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 다윗은, 가장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다. 잃었던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왔을 때, 춤을 추면서 나왔다. 많은 찬양시를 썼다.

  왜냐면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으로 교제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종교적 교리가 아니었다. 이론이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좋아하셨다.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찬양을 많이 드리자.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하나님께 찬양을 통해 올려드리자. 기쁠 때엔 춤을 추고, 눈물이 흐를 때, 억제하지 마시기 바란다. 음악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감정을 담으라는 뜻이다.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신앙과 찬양과의 관계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신앙이 형식화 될 때는, 찬양이 예술이 되어 버린 때였다. 신앙이 뜨거워졌을 때, 부흥이 일어날 때는 뜨거운 찬양 운동이 일어났다. 홍해를 건넜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변가 합창이, 성경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첫 찬송이다.

  이 찬송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한 목소리로 찬양하던 노래였다. 그러나 성전이 멸망할 당시에는 대중찬송이 거의 사라졌다. 성전에서 찬양 맡은 자들의 정교하고 예술적인 찬양만 있었다. 중세에도 성당 안에 대중찬송은 사라지고, 전문 찬양대의 아름다운 찬양만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같은 대중 찬송을 부활시키며, 종교개혁을 진행시켜 나갔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찬양을 듣는 것을 넘어서, 나의 감정을 찬송가운데 담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가 찬양하는 분이 하나님이 분명하다면, 감정표현을 억제하지 마시기 바란다. 찬양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게 만들어 주는 좋은 도구다. 사랑을 표현하려면 묵상하라. 타종교의 묵상은 심령을 비우려는 노력이지만, 기독교의 묵상은 채우기 위해, 하나님과 친밀하려고 비우려는 노력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말씀을 받는 방법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성경 말씀

성경의 말씀은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다. 성경의 말씀을 받으려면,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성경을 고대문서로 보면 감동이 없다.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한다. 연애편지를 읽듯이, 사랑의 눈으로 음미하면서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이 율법책이 되고 만다. 제가 이스라엘로 유학을 떠날 때, 아내가 준 편지를 비행기에서 읽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때 나를 너무 무시한다. 어린애 취급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다.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성경은 율법책으로 전락한다. 여기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저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받았다. 그래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율법으로 받았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했을 때, 그들은 쓰러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사랑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말씀 외에는, 하지 않으신다. 다영이에게 제가 잠자기 전에 이빨을 꼭 깨끗이 닦으라는 말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은 사랑의 말씀이다.

(2) 성령으로 말씀하심

성령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묵상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듣는 귀가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영적 민감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을 무의식적으로 포기되고, 기도가 점점 형식적이 된다.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듣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질 때, 신앙생활은 생명력이 넘친다. 하나님의 음성은 사람들의 대화처럼, 매순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사도 바울도 소아시아 전도를 위해 애쓰면서 기도했지만, 한동안 아무런 음성을 듣지 못했다.

  자신의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1-2번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했다.

우리는 죄악 된 본성과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음성처럼 분명히 들을 수 없다. 그렇지만 애쓰고 훈련하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고막을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심령을 울리는 세미한 음성이다. 어떤 때는 간절히 원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목마른 사슴처럼, 기대와 갈증이 있어야 한다.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 두 가지 다른 음성과 혼동하기 쉽다. 영적 존재인 사단과, 자신의 내면의 음성이다. 특별히 감수성이 예인한 여자들은 이런 음성이 잘 드리므로 조심해야 한다.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

①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다른 음성을 듣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한다.

② 하나님은 백성가운데 거하시므로, 모임을 사모한다. 다른 음성은 자기도취에 빠져 연합을 꺼려한다.

③ 말씀을 사모한다. 다른 음성을 성경에 무관하심하고, 직통계시로 자기 멋대로 변조한다.

④ 교회에 덕을 세우고, 다른 음성은 교회를 혼란케 하고 분열케 한다.

⑤ 인격이 온유하고 겸손해진다. 다른 음성은 점점 교만해지고, 강퍅해지며, 혈기가 들어난다.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돈독했다. (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막9: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기도하실 때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늘 체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은 불안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인간의 사랑을 받는데 실패했어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하여, 사랑의 영을 받아야 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고 했다. 그러므로 사랑의 영을 간구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을 믿고 좇을 때, 부족한 우리도 변화 받고, 사랑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았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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