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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 때부터 소경된 삶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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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이 세상에는 오늘 본문의 시각장애인처럼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선천적인 장애인과 각종 사고와 질병 등의 원인으로 인한 후천적인 장애인이 있습니다. 2005년도 장애인 실태 조사의 결과를 보면 모든 장애인의 89%가 후천적인 장애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후천적인 장애 원인 중 질환이 54.4%이고, 사고로 장애인이 된 경우가 36.6%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언제 어디서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될지 모르는 예비 장애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하겠습니다.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바덴은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늘 매사에 감사하는 자세로 임하여 국가를 위해서도 크게 공헌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살게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하고 있을 때, 한 번은 어느 지방으로 여행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밤새 구두를 도둑 맞은 것입니다. 그는 몹시 화가 나서, 어느 놈이 내 구두를 훔쳐 갔느냐고 화를 내면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세상에 훔쳐갈게 없어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도 훔쳐가게 하시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어서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신발을 내어주며 교회에 같이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는 마지 못해 교회에 끌려가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기분이 언잖았습니다. 자연히 찬송을 해도 기쁘지 않았고 기도도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덤덤한 자신의 모습과는 달리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기쁨으로 찬송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놀란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 없겠구나.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신발은 또 사서 신으면 되지 않는가. 괜시리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께 원망불평을 늘어놓았으니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그는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던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장애인이 되는 원인이 죄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그의 부모가 바르게 살지 못해서 혹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불교신자의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평소에 건강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면 “무슨 죄로 저렇게 하나님께서 데려갔을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도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4).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죄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홍수 심판 때 노아의 가족을 빼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전멸했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 유황불이 비오듯 쏟아지며 롯의 가족이외에 그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심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5:24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이 장애인이 되든지 갑자기 죽든지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1. 장애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삼중의 장애를 가지고 인생을 살면서 고통을 당했던 헬렌 켈러 여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들을 수 없는 것보다 말할 수 없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볼 수 없다는 고통이다. 아! 내가 볼 수만 있다면...”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시각장애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면 적어도 그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고 돕고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가?”라고 하면서 그를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영적으로 어두운 ‘영적 시각장애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비록 시각장애인이었으나 마음의 눈을 뜨게 되어 후에 “내 육체의 눈을 잃어버림보다 더 큰 비극은 마음의 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보다 더 비극적인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눈 앞에보면서도 메시야이심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35~41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2.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된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6~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왜 이런 방법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예수님이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덕지덕지 붙여도 묵묵히 순종했고, 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이 사람이 끝까지 순종한 것을 볼 때에 그는 믿음이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모든 복을 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만큼 순종하고, 믿음 만큼 축복 받고, 믿음 만큼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시각장애인처럼 우리도 순종함으로 복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붙이신 것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는 예수님이야말로 사람을 진흙으로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메시야로 와서 해야 할 일을 예언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누가복음 4:16~1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3~5을 보면,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듣고 궁금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했습니다.

장차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쇠하지 않고 썩지 않는 영생하는 몸으로 완전히 회복되며, 각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는 장애인이 없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천국에서 살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 받으며 항상 승리할 줄 믿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장애인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불치의 병으로 오랫동안 누워있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남과 같이 교회에 출석도 못하고 전도나 봉사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점점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어느 날 소녀를 심방한 목사는 “비록 병상일지라도 열심히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단다.”라고 권면했습니다. 수개월 후에 이 소녀는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드러났습니다. 소녀의 베개 밑에서 기도 제목 쪽지가 발견되었었는데, 거기에는 56명의 동네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56명이 모두 최근에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녀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 앞에 빨간 십자가로 표시를 해놓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뷸라’라는 간호사는 몇 해 동안 성실하게 일하다가 관절염으로 더 이상 병원에서 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다리와 한 쪽 팔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된 그녀는 수년 동안을 침대에 누워 절망에 빠진 채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애인일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침대 곁에 전화를 설치하고 날마다 친구들을 전도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위로하고 실망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사랑의 전화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는 36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비록 침대에 눠워지내야 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무능력한 장애인이라고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랑을 베풀던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았습니다.
자신이 설령 장애인이 되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주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장애인들은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도움으로 말미암아 장차 하나님 앞에 갔을 때는 상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4. 장애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2:1~5을 보면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11~12절을 보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장애인을 돕는 친구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14:12~14을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지금 여기에 있는 너희 형제 중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돕는 것이 곧 예수님을 돕는 것이며, 장애인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항상 정상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그가 쓴 20여권의 저서는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많은 보수와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지체아 보호시설인 ‘데이브레이크’의 직원으로 취업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정신지체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능력 있는 교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십니까?” 그때 헨리 나우웬은 빙그레 웃으며 “나는 그동안 성공과 인기라는 이름 꼭대기를 향해 오르막길만 달려왔습니다. 어느 날 한 장애인을 만난 후 내리막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르막에서는 나만 보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장애인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장애인을 대할 때 나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기거나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동정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의 인격을 존중해주시고, 나의 형제로 친구로 가족으로 생각하며, 주님께 하듯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정필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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