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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성한 가지 때문에 (창 49:22~26, 요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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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이 되면 멕시코 서북부 미초아칸주 국립공원에는 ‘황제나비’(mariposa monarca)라 불리는 나비들로 장관을 이룹니다. 영어로는 ‘monarch butterfly’라고 불리는 이 나비들은 캐나다에서부터 장장 2,400킬로미터를 날아와서 이곳에서 겨울나기를 합니다. 대장정에 돌입하는 나비들은 지상에서 50미터의 높이를 유지하면서 낮엔 시속 20킬로미터로 날고 밤에는 양분을 섭취하고 휴식을 취하며 이곳에까지 도착합니다. 이 나비들의 비행기간은 약 15-17일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1975년 캐나다 동물학자인 프레드 우르거트(Fred Urguhart)의 연구에 의하면 가문비나무의 일종인 왜전나무의 숲과 평균 해발 2000~3500미터의 서늘한 지역 즉 시에라 마드레 옥시덴탈(Sierra Madre Occidental)에서 나비들은 겨울을 보냅니다. 멕시코의 마사와 족과 오또미 족 사람들은 이 나비들을 수많은 죽은 아이들의 영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비가 오는 계절이면 축제를 하고 독특한 제의를 마련한다고 합니다.

  여러 해 전 멕시코에 갔을 때에 그 곳을 가 보았습니다. 나뭇가지들 마다 나비들 때문에 나뭇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잎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들은 나비들 무게로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왜전나무의 가지는 나비가 영양을 얻고 휴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나뭇가지입니다. 가지가 무성하고 큰 나무는 나비가 앉아 있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가지들은 한 결 같이 축 늘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느 앞을 못 보는 지도자로 알려진 존경받는 한 중국인 스승의 일화입니다. 스승이 제자와 함께 수도원의 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복숭아나무 가지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에 스승은 가지에 부딪치지 않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제자는 놀라서 “스승님, 나뭇가지를 어떻게 보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눈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감각일 뿐이다. 나는 나뭇가지 사이에 살랑살랑 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뭇가지는 약한 바람에도 흔들릴 만큼 힘이 없습니다. 가지는 작고 힘이 없어 보이지만 힘도 있고 나무가 나무 되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나무가 줄기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겨울에는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지 않습니다. 겨울에 나무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겨울에 가지에 물이 올라 있으면 추운 날에 얼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집니다. 잎의 색소가 노랗게 변하고 떨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반면에 봄이 되면 나뭇가지에 물이 오릅니다. 그래서 ‘물이 오른다’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다시 가지에 생명이 살고 잎이 나고, 활기가 돋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가지는 많지만 줄기는 하나입니다. 가지는 갈라지지만 싸우지는 않습니다. 해가 뜨는 쪽에 있는지 해가 지는 쪽에 있는지 이런 이유 때문에 갈라지지 않습니다. 가지가 많이 나뉠수록 나무는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않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잠잠할 적 없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가지는 많은 게 좋습니다. 나무에 가지가 많은 것은 나무가 풍성하고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무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났습니다. 가지는 나무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붙어 있을 때에 가지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성한 가지가 됩시다. 무성한 가지는 어떤 것입니까? 삼월은 나뭇가지에 물이 오른다고 하여 ‘물오름 달’이라고 합니다. 계절은 좀 지났지만 무성한 가지처럼 물오르는 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무성한 가지는 샘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22에는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고 합니다. 가지가 무성한 이유는 샘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샘 곁에 있다는 것은 무성한 가지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나무에게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물입니다. 나무는 물이 없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나무는 물이 있으면 무성합니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싱싱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는 복 있는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나무가 샘 곁에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샘 곁에 있는 것은 자기 의지대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거기에 심긴 것입니다. 그래서 복입니다. 복이란 내가 추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따라와야 합니다.

  샘 곁이란 은혜의 강가입니다. 우리나라 옛말에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샘 곁은 비빌 언덕입니다. 샘이라는 게 언제 가장 덕이 될 수 있습니까? 샘 곁에 있다는 것이 언제 가장 표가 납니까? 가물 때입니다. 가물 때에는 샘 곁에 있는 가지는 마르지 않습니다. 샘 곁에 없는 가지는 말라버립니다.

  우리는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있습니다. 늘 곁에 있어 너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샘 곁에 있을 때는 샘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그러나 샘이 아니면 무성한 가지도 없습니다. 샘 곁에 있는 무성한 가지가 된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 곁에 있습니까? 우리 곁에 무엇이 있습니까? 흔히 욕하면서 배운다고 합니다. 욕할 만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자꾸 욕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갑니다. 우리 곁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스트레스 컨설턴트의 말에 의하면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최고의 비결은 긍정적인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곁에 부정적인 사람, 비판적인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부정적이 되고, 비판적이 됩니다. 곁에 긍정적인 사람, 적극적인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긍정적이 되고, 적극적이 됩니다. 이런 삶이 무성한 삶입니다.

  좋은 물 곁에 있는 것, 좋은 사람 곁에 있는 것, 좋은 스승 곁에 있는 것, 좋은 친구 곁에 있는 것, 좋은 책 곁에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축복입니다. 우리가 교회 곁에 있는 것도, 교회 가까이 사는 것도, 말씀 곁에 있는 것도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닮아가고, 말씀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을 아시지요?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인 맹자가 묘지 옆에 살 때에 친구들과 장례놀이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 교육을 위하여 이사를 했습니다. 시장 곁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들과 장사놀이만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학교 곁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공부하는 놀이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는 ‘대입삼천’(大入三遷)이란 말이 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좋은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에 배정받기 위하여 위장전입도 해야 하고 열심히 이사해야 합니다. 또 ‘맹모삼천만원지교’라는 말도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이 만큼의 사교육비가 매년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곁에 좋은 환경, 좋은 여건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일입니다.

  좋은 샘이 곁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영성의 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물을 퍼내는 샘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샘에서 무엇을 퍼내고 있습니까?

  창세기 26:19에는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라고 합니다. 당시에 땅을 파서 샘을 얻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팔레스타인은 물이 부족하고 땅을 파도 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을 팔 때에 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래서 축복이고 대단한 일입니다. 무성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오아시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아래에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샘이 있습니다. 지난 번 제가 갔던 수도원도 스케티스 사막 한 가운데 있지만 숲이 우거지고, 새들이 지저귀고,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아래가 물이 흐르는 오아시스 지대라고 합니다. 사막에도 샘이 있으면 물이 흐르고 물이 흐르면 나무가 자랍니다.

  성경은 샘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에는 마른 샘도 터진 웅덩이도 있습니다. 마른 내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고, 갈증만 더해주고, 가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58:11에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최고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물댄 동산이야말로 항상 푸릅니다. 물이 끊이지 않는 샘은 항상 물을 공급합니다. 축복의 상징입니다.

  반면에 우상숭배자는 이사야 1:30에서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라고 합니다.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공급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메마릅니다. 항상 빈곤합니다. 우상숭배자는 마른 가지입니다. 가지가 마르면 아무 잎도 맺지 못합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무성함의 반대가 무엇이겠습니까? 앙상함입니다. 우상숭배자는 앙상함 그 자체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강가, 마르지 않는 샘 곁에서 날마다 무성한 가지처럼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 무성한 가지이기 때문에 담을 넘습니다.

  창세기 49:22에는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고 합니다. 무성하고, 힘 있고, 가지가 뻗어가므로 담을 넘습니다. 에스겔 17:22 하반절에는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라고 합니다. 연한 가지는 예수님입니다. 높고 우뚝한 산에 심어 온 세계를 뒤덮게 만들려고 세우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연한 가지 같지만 온 세계를 뒤덮는 가지입니다. 무성한 가지이기에 담을 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겨자씨 비유’가 있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이지만 큰 나무가 됩니다. 공중의 새들이 깃들입니다. 작은 씨이지만 무성한 가지가 되고 담을 넘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겨자씨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겨 바다에 빠트립니다. 담을 넘습니다.

  구약의 ‘가지’라는 단어는 메시야적 상징입니다. 가지는 그리스도를 통한 메시야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11:1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가지가 결실하고 담을 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덮는 복음의 은총이 나타납니다.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2장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보았던 신상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합니다. 신상의 머리는 순금이었고, 가슴과 팔은 은이었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었고, 종아리는 쇠이었고, 발의 얼마는 쇠이었고 얼마는 흙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상 위에 하나의 뜨인 돌이 있어서 신상을 무너뜨리니 부서진 무더기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환상에서 말하는 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강성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4장에서는 다시 나무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닿은 큰 나무가 있습니다. 잎사귀가 무성하고, 줄기가 뻗어 있고, 열매가 열리고, 공중의 새가 깃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그루터기만 남겨두고 베어 없애라고 합니다. 왕이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고 일곱 해를 지낼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강성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손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예수님의 복음이 담을 넘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싹과 가지가 세상을 덮습니다.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습니다. 세상을 지배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을 지배할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도 복음이 핍박을 받는 데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불가능은 없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려던 야망을 가진 나폴레옹은 쓸쓸히 죽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갈릴리의 목수, 당신이 이겼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약한 가지처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 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제 담을 넘어 가지가 세계에 뻗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니체는 강인하고 남성적이며 억압적인 대담한 지배자가 나타나 민족의 융성을 꿈꾸었습니다. 니체는 능력을 숭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니체의 이상은 ‘위버멘쉬’ 곧 슈퍼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상은 어린아이였습니다. 무성하고 담을 넘는 것은 어린아이입니다. 강하고 거센 사람은 담을 넘습니다. 그러나 담을 넘자말자 꺾입니다. 죽습니다. 그러나 약한 가지는 담을 넘어도 꺾이지 않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영어, 코카콜라 그리고 달러랍니다. 물론 영어는 원래 영국의 것이지만 이제는 120개 국어가 혼합된 미국영어가 세계 공용어라고 한답니다. 이제는 담을 넘는 시대입니다. 우리나라도 담을 넘어야 합니다. 한류가 세계로 뻗어나가듯이 모든 것이 세계화 시대에 세계로 뻗어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담 안에서 만은 안 됩니다. 담을 넘어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계로 넘어가야 할 것이 많이 있겠지만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담을 넘어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한국 선교사는 지금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선교사가 파송되어 복음이 우리의 손을 통하여 담을 넘어가게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열심히 기도하고 속히 10명의 선교사, 100명의 단기 선교사를 파송 지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누가 제일 담을 잘 넘습니까? 도둑입니까? 무성한 가지입니다. 도둑은 담을 넘으면 통제를 받지만 가지는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풍성하고, 영성과 지성으로 풍성할 때 담을 넘을 수 있습니다. 통제받지 않고 넘어야 하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배하는 공간 지수가 있습니다. 서양인의 침대는 자고나도 공간을 점유하지만 우리나라의 이부자리는 개고나면 공간을 원점 환원합니다. 의자는 앉고 일어나도 공간을 점유하지만 방석은 공간을 절약합니다. 가방은 공간을 낭비하지만 보자기는 공간을 돌려줍니다. 서양의 양복은 입체 수납하여 공간을 유지하지만, 우리의 한복은 접어서 장롱 속에 평면수납하기 때문에 공간을 절약합니다. 병풍이나 부채도 그렇습니다. 색종이 공작도 서양에서는 오려 붙이기 때문에 공간에 펼쳐지지만 우리는 접어서 치마저고리를 만들기 때문에 공간을 절약합니다. 우리나라는 공간경제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작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삽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환경 파괴를 의미합니다. 공간 지수와 공간 지배는 반비례합니다. 우리는 이제 땅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되어 복음으로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성한 가지의 축복입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들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을 것이라고 축복하였습니다.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져 요셉의 아들들은 가장 복이 있는 지파가 되고 번성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가지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나무에 단단히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성한 가지가 되고 담을 넘을 수 있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찬송가 가사에 보세요.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얼마나 시원한 찬송입니까? 담을 넘고 언덕을 넘어 세계의 바다로 맘껏 저어가야 합니다.

결론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 생일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과 자신이 세례를 받고 이름을 받은 날(named day)입니다. 세례 받고 이름을 받은 날에는 세 가지 선물을 준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혜를 잘 보존하라는 의미에서 투구를 줍니다. 둘째는 밤의 동물처럼 지혜를 잘 찾으라고 올빼미 인형을 줍니다. 셋째는 세계를 알고 세계를 지배하라고 지구본을 줍니다. 참 의미 있는 선물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선물이 필요합니다. 영적 지구본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무성한 가지가 주어져야 합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은 12개국을 지배한 기념으로 12방향으로 길이 나 있습니다. 무력으로 지배하여 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신앙의 개선문을 든든히 세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성한 가지처럼 샘 곁에서 생명의 꼴을 풍성히 얻기를 바랍니다.

무성한 가치처럼 담을 넘어 세계를 향하여 뻗어가는 힘 있는 가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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