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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의 문을 열어라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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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한 부유한 백작이 거실을 거쳐서 부엌 앞을 지나가다가 부엌에서 들려오는 요리사의 한탄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요리사가 요리를 하다가 이렇게 투덜댑니다. 내게 한 5파운드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5파운드는 10달러 정도의 돈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1만원정도의 돈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백작이 그냥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사람 소원을 내가 못 들어 줄 이유가 어디 있겠나?” 라는 생각이 들어 5파운드를 주었습니다. 이제 소원을 풀었으니 얼마나 행복해 할까 기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살며시 엿보았습니다. 그러자 요리사가 부엌에 들어가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내가 미쳤지! 한 십 파운드 달라고 할 것을 괜히 5파운드를 달라고 했어! 5파운드로 무엇을 하라고” 만족이 없었습니다. 5파운드를 원했는데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감사가 없습니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두 친구가 길에서 만났습니다. 한 친구가 아주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자네 왜 이렇게 얼굴이 어둡나? 뭐 불만스러운 일이 있나?” 이 친구의 대답이 “3주전에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2억원의 유산을 남겨주셨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그럼 너무 좋은 것이 아닌가? 근데 왜 얼굴이 어두워!” “그게 다가 아니야. 지난주는 우리 외삼촌이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3억원의 유산을 더 남겨 주셨잖아!”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5억원이 공짜로 생겼는데 뭐가 불만이야?” “그 정도가 아니야. 지난주에는 우리 고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10억원의 유산을 남겨주셨어!” “아니 그럼 자네 10억원이나 생긴 것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인상을 찡그리고 있나?” “근데 내 말 좀 들어봐! 이번주간에는 아무도 돌아가시지 않았잖아!” 얻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욕심을 낸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욕심으로 물질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구한다면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기꺼이 응답하시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이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양극화의 문제입니다. 가진 사람은 너무 많이 가져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없는 사람들은 너무 없어서 최소한의 삶을 살지 못해서 고통당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가난에 대해서 옹호하거나 편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난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또 부요한 것을 꼭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는 축복, 하나님 없는 재물은 화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경험을 통해서 가난이 주는 불편과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옷 한 벌 사주려고 해도 그것이 만만치 않아서 아이를 달래고 설득해서 그 보다 못한 옷을 사줘야 할 때 부모의 심정, 학교에서 수업료를 가지고 오라던가 책을 사야 되는데 책을 사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아픔, 누군가 어려운 이웃이나 친척이 너무 힘들어서 손을 벌릴 때 도와주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로는 가난이 원망스럽습니다.

가난은 결코 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닙니다. 그냥 불편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를 보신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풍요롭게 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기대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여러분 어느 부모가 일생동안 자기 자녀가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큰 부자가 아니라도 생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도록 남을 도와주며 살아갈 수 있는 넉넉함이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성경은 최악의 가난 속에 처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 풍성함을 누리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엘리야라는 한 선지자가 등장을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과 이세벨의 우상과 처절한 싸움을 벌인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 속에서는 그가 기근을 만난 세상가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에 사는 한 과부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 여인이 너를 공궤할 것이다. 너의 먹을 것을 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을 믿고 시돈 땅에 가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르밧의 과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달라고 했습니다. 기근 때에 물이 귀하지만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베푸는 인심이 있기에 물 한 그릇을 주려고 돌아서는데 엘리야는 그 여인을 또 부릅니다. “여보시오! 이왕이면 지금 내가 몹시 배가 고프니 나에게 먹을 것을 좀 줄 수 있겠소?” 이 여인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지금 기근이 심해서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난리입니다. 저희 집에도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통에 가루와 기름병에 기름이 조금 남아 있어 이것으로 마지막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참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정도 말했으면 엘리야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보통 얼굴이 두꺼운 것이 아닙니다. “여보시오! 내가 사정은 다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서 먼저 떡을 만들어서 가지고 오시오. 그 다음 남은 것으로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해서 떡을 만드시오.”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말합니다. “당신이 내 말대로 하면 이 기근이 다 끝날 때 까지 이 밀가루 통에 가루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돈에 사는 이방 여인임에도 불고하고 이 여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가정에 놀라운 축복을 부어주시는데 그 축복이 어떤 축복일까요? 성경 1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같이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놀라운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의 여건이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늘 하나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너무 어렵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좀 부요하고 풍성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마음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에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그 삶은 찌들어 우울해 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부요해지기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적인 진리를 통해서 더 놀라운 물질적 축복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복의 문을 여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위로부터 오게 됩니다. 위로부터 오는 것은 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너희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부족한 자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든 물질의 축복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12절에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한민족을 크게도 하고 강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 보면 “내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너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느니라.”고 합니다. 모든 재물의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 2:7절에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오는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주시는 여호와께 구하는 것이 인간의 겸손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역사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기근으로 어려운 사람이 한두 명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돈땅 사르밧 과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가 그 가정을 방문하고 어려운 요구를 했지만 그 요구를 승낙함으로 그 가정에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필요를 위해서 담대히 기도하실 수 있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결코 기복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이 필요를 구할때 하나님의 기꺼이 응답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가난 속에 모자람 속에 있다면 바로 지금이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라고 믿습니다.

성경의 기적은 모자람 속에 일어납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십시오. 포도주가 모자라게 됩니다. 이것은 위기입니다. 여러분이 건강이 모자랍니까? 물질이 모자랍니까? 위기입니다. 그럴 때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갑니다. 예수님께서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떠 주라고 하였더니 그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궁핍하십니까? 어려우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이 바로 적절한 때입니다.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무리들을 돌려보내는데 너무나 지쳐있고 굶주려 있어서 안타까워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보니 없습니다. 빌립이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돈도 없을뿐더러 돈이 있다고 한들 어디서 이런 많은 사람들의 양식을 구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믿음이 좋은 안드레가 한 소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소년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 여러분 오천명 앞에 오병이어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모자람 가운데 축복을 해주십니다. 손을 들어 안수하실 때 놀라운 은혜가 임해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부요를 위해서 물질의 축복을 위해서 사업의 번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풍성히 채워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로 축복의 문을 여는 방법이 있습니다. 남아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본문 11절,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내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참 딱한 사정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 여인에게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하여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축복할 것이다.” 여인은 자기의 마지막 남은 도시락, 자기의 마지막 남의 음식을 엘리야를 위해서 드렸습니다. 여러분 엘리야에게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을 대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없는 것은 못 드립니다. 있는 것을 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늘 없는 것만 생각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사르밧 과부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밀가루 조금과 기름 조금입니다. 그것을 드리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으십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를 들 때마다 열 가지 재앙이 임했습니다. 홍해가 마른땅같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손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남은 것까지 주님은 원하십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불합리 합니다. 하나님은 모자람 속에서 위기 속에서 축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내게 남아있는 것을 여호와께 드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내 말대로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떡을 만들어 먹는데 먼저 나를 위하여 떡을 만들고, 그 다음에 너희가 먹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한 달 일을 하고 사례비를 받으면 먼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십일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열에 아홉은 내가 가지지만 열에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헌금 때문에 갈등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십일조 하다가 어려우면 중간에 그만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방법입니다. 십일조를 하 던 하지 않던 구원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축복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는 통로가 십일조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음으로 밭에 황충이 일어나고 먹을 것이 떨어지고 늘 가난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데 더 가난합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이 황충을 금해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 더 풍성한 수확을 주십니다. 보통 우리들은 조금 어려울 때 “이번에는 드리지 말고 다음에 더 넉넉하게 드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종자 씨앗입니다. 가을에 우리가 수확을 하면 봄에 파종할 것은 종자로 따로 모아놓습니다. 겨울에 양식을 다 먹고 배가 고파도 종자씨는 손을 되지 않습니다. 종자씨가 있어야 봄에 파종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종자씨앗과 같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석유왕인 록펠로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어머니로부터 배운 생활원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록펠로야 너는 언제 던지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떼어라!” 라고 말했습니다. 록펠로가 20센트 용돈을 받으면 2센트를 먼저 십일조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많은 돈을 벌수록 더 많은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그의 사업이 얼마나 커졌는지 십일조를 계산하는데 40명의 직원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성경이 정하는 축복의 법칙이고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자녀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이런 원리들을 우리에게 재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여 어렵고 힘들게 살아간다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계산법은 우리 인간의 계산법과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1 더하기 1은 2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10이 될 수도 있고 100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남아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을 때 그것이 가장 큰 헌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성전에 연보궤 옆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때로는 장난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헌금을 넣는 연보궤를 지키셨을까요? 예수님은 돈 많은 사람이 많은 돈을 넣는 것도 보고,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렙돈을 넣는 것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난난한 과부가 가장 많은 것을 드렸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 여인은 전 재산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정성이 담긴 예물인지 전부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정성이 축복의 문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십일조를 하시던 감사헌금을 하시던 여러분의 전부를 드리는 마음을 가질 때 축복의 씨앗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축복의 문을 여는 세 번째 조건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을 때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믿음의 사건이지만 모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13절, 14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여인은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그 말씀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에게 먼저 떡을 만들어 드린다면 기근이 끝날때까지 이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다함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15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엘리야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한 여인의 순종이 여러 사람에게 풍성함을 주었습니다. 기근이 다 끝날 때까지 엘리야도 그 집에서 풍성히 공급받고 그 가족이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먼저 누군가에게 베풀 것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섬긴다면 더 큰 물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 여인의 결단, 말씀에 순종하고 신뢰함으로 드린 결단 그것이 바로 축복의 문을 여는 비결입니다.

교도소 순화교육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박순애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한번은 교도소 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것을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 장로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교도소에 교도소 교회가 없습니다. 전도사님이 교도소 교회를 건축하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께서 승낙을 하시고 많은 재정을 담당해서 그 교도소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이 참 재미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 장로님이 시골에서 올라와서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이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잘되어서 나중에는 300명의 종업원을 이끄는 큰 회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인증을 받고 헌금도 많이 드리니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장로님이 신앙에 열정이 없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장로가 되었지 그렇게 신앙의 모범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부도가 나고 빚쟁이 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이 교회건축을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건축 할 때에 제가 우리 교회 건축비의 절반을 부담하겠습니다.” 그런데 부도가 난 것도 모르고, 장로님의 말을 믿고 목사님이 그 장로님을 건축위원장으로 임명을 했습니다. 장로님은 건축할 돈도 없고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명한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도가 나도 장로는 장로이니까 이일을 계속 맡게 되었습니다. 건축위원장이 되다 보니 내가 먼저 헌금을 해야 되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아주 오래전 친척이름으로 사놓은 땅이 있었습니다. 어차피 그 돈으로 빚도 갚지 못했기 때문에 건축헌금을 드렸다고 합니다.

매일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매일 만원씩 일천번제를 드리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드렸는데 돈이 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일천번제를 드리려고 새벽예배를 나왔는데 돈 만원이 없어서 드리지를 못하겠습니다.”라고 울면서 새벽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새벽에 나온 교인들이 그 기도소리를 듣고는 만원을 무릎에 가져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근근이 일천번제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래도 건축은 계속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내가 이렇게 빚쟁이로 돌아 다녀야 하나, 내가 채무자들에게 솔직히 이야기 하고 인증을 받고 다시 사업을 해야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채권자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감옥에 보내면 빚을 갚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시면 다시 일어나서 사업을 시작해서 빚을 다 갚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입니다. 채권자들이 “그럼 우리가 당신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풀어주겠습니다.” 그리고 다 싸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시 종업원들을 모으고, 조금의 돈을 빌려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몇 년 안에 사업이 성장하고 빚을 다 갚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문의 기사를 보고 “하나님은 정확한 분이시구나! 내가 건축비 절반을 드린다고 했는데, 이렇게 건축비를 드리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교도소 건축비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사업이 어렵고 직장이 어려우면 십일조 끊고 헌금 줄이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점점 어려워지는 길입니다. 때로는 마지막 드릴 것이 없지만 마지막 드릴 수없는 것 까지 드리는 믿음의 헌신을 주님은 기쁘게 여기십니다.

지난 주일 오후 장학위원회 헌신예배 때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세계적인 마케팅 전문가로 유명한 조 비테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은 아주 부유하지만 한때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내가 암에 걸려서 투병을 하다 보니 가진 재산을 다 써버리고 아내는 마침내 죽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아기 분유를 사러 가는데 자기 주머니에 4달러 밖에 없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 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가족이 먹을 것도 없이 구걸을 하고 있는데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도와주고 싶은데 자기에게 4달러 밖에 없어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데, 자꾸 그 사람들이 생각이 나서 돌아가서 2달러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달러로 작은 분유를 사서 왔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4달러 중에 2달러를 도와주고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업의 문이 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전의 그 모든 것을 다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책을 쓰면서 세계의 성공한 사람들의 유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그들은 나누어 주기를 기뻐했다고 합니다. 베풀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도히 아껴도 늘 가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후해도 늘 풍성합니다. 축복은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여러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 이웃에게 베푸는 일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축복의 씨앗이고 축복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가난이 떠나가고 풍요로움과 부요함이 찾아 올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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