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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시작하라!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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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야누스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야누스는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으로 흔히 선과 악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 사람을 야누스적인 사람이라 표현합니다. 늘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정의감에 불타는 모습을 보이던 베드로는 본문에서 비겁한 겁쟁이로 돌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가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베드로와 같은 상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마치 부도가 나 버린 인생과 같이 절망 속에 허우적거릴 때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상황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침체 속에 힘을 잃고 좌절하고 있는 성도가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시작하는 신앙의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실패 속의 베드로를 회복시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현장 정복의 증인으로 당당히 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인간 베드로의 실패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완전히 결론을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러 온 가롯 유다와 대제사장 무리에게 순순히 응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베드로는 그나마 양심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눅 22:54)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실지 궁금했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는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멀찍이 따라가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멀찍이 라는 표현이 주는 뉘앙스는 이미 베드로가 실패의 길에 접어들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신앙은 절대 멀찍이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발치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것은 성경적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멀찍이 떨어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인생의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나와 앞에 앉아 준비할 때 더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너무 앞서거나 뒤처지지 말고 세밀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간표를 볼 수 있는 강단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강단 말씀의 통해 성령의 세밀한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는 대제사장 집의 뜰에서 신분을 숨긴 채 모닥불을 쬐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계집종이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눅 22:55~56) 베드로를 발견한 계집종은 사람들에게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던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예수란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들어본 적도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베드로를 보며 “너도 그 당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더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한 시간 쯤 지나자 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는 “이 사람은 분명히 갈릴리 사람이고 예수와 함께 다녔다”라고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더욱 강하게 소리를 높여 부인했고 이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도 자신만만했던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베드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3),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막 14:31),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3),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4: 37) 베드로는 구구절절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 속에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라는 단어입니다. ‘나’를 외치며 ‘나’를 주장하다가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나의 힘을 의지하면 결국 무너지고 영적 싸움에서 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베드로가 그때 굳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더라도 붙들려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대제사장이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고, 예수님을 잡게 되면 제자들은 순식간에 흩어지게 된다는 것을 이미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설령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군사도 아닌 하찮은 계집종에게 벌벌 떨며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영적 싸움은 영적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육적으로 준비하고 나섰다가 당하고 만 것입니다. 사단은 미사일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늘로 공격합니다. 하지만 준비되지 못한 자는 조그마한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게 됩니다. 중국 역사에서 적에게 만리장성이 뚫린 경우는 네 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 모두 적들의 정면 돌파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문지기들이 매수를 당해 뚫리게 된 것이라 합니다. 사단은 이처럼 아주 작은 틈새를 만듭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잠에 취해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현장에서 전혀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내 힘과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영적 싸움을 할 힘을 얻게 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베드로의 실패를 교훈삼아 늘 영적으로 깨어 사실적인 영적 싸움을 하여 승리하는 증거가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2. 회복시키시는 예수님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62)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고 그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셨습니다.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자신의 교만함과 예수님을 배신한데에 대한 죄책감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랑과 연민의 눈길이었을 것이라 해석합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눈길로 그를 보신 것입니다.

눅 22:32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실패할 베드로를 위해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환경과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더라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시며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낙심 속에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 다시금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완전 해방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죄책감, 죄의식에서 완전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담대히 현장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시대적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실패했다고 좌절하지 마시고 베드로와 같이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정죄하고, 절망케 하여 기회를 박탈하려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문사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 용서, 격려로 새 힘을 주시며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입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인생 모든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Oneness를 사실적으로 누리며 참된 회복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오늘날 성인은 물론 아이들까지 각종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든든한 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건강한 가정입니다. 특히 부부관계가 좋으면 스트레스를 이기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됐습니다. 지난 2004년 토론토대학 연구팀이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배우자와의 친밀도와 스트레스의 관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혈압과의 상관관계를 볼 때 업무에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배우자의 따뜻한 격려를 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혈압이 정상치에 가깝게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는 부부관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 간,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도 복음적인 격려와 힘을 준다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낙담하여 포기한 베드로를 친히 찾아가셔서 위로하여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상처받고 힘을 잃은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찾아가 일으켜 세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이를 통해 주 안에서 Oneness를 이루어 함께 현장 정복, 경제 정복, 문화 정복에 나서며 지역, 민족, 세계를 복음화하는 주역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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