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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 물러서지 말고 기도하라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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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부흥의 진정한 모델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더하며(행2:41)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숫자적 증가(행2:47)는 분명 부흥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보다 더 중요한 부흥의 참된 표식은 사도들의 담대한 모습으로의 변화이다. 사도들로 인하여 나타난 기사와 표적도 부흥의 표식이지만 믿는 사람의 삶이 공동체를 이루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섬김의 모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식구, 한 가족같이 섬기는 초대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숫자보다 중요한 부흥의 표징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구별된 자들로 보여졌다는 것이다.

R.A. 토레이 박사는 「기도와 영력」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부흥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이라 하였다. “그 새로운 생명이 임하는 부흥의 결과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 크리스챤들이 참된 부흥을 체험하게 되면 세상에서 탈피하여 분리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 부흥이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삶의 구별이다. 세상에서 살던 방법대로 산다면 부흥이 와도 아무 소용이 없다. 생명에 부합되지 않는 일은 온전히 버리고 세상의 삶의 행태를 떠나 분리된 구별의 모습이 있을 때 불신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결국 진정한 부흥은 외향적으로 흘러나가는 사랑과 거룩의 파도이다. 그래서 술집이 문을 닫고 도박장과 감옥이 문을 닫는 물결을 이루는 것이다. 부흥의 열매는 숫자적 증가를 저절로 동반한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큰 부흥이 교회사 속에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일어났다.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이 시대 속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진정한 부흥을 일어나게 하는 그 열쇠가 무엇인가?

첫째, 오직 기도이다. (행1:14)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는 전혀 기도에만 힘을 썼다. 이 말은 기도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교회를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의 경건 생활 속에 기도의 모습이 있다. 기도는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를 하면서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과 부흥, 변화에 집중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면 기도하는 척 해서는 안된다. 약속을 믿지 못하고 적당히 기도해서는 안된다. 오직 기도의 사람으로, 오직 기도 시간에 몰입해야 한다. 바쁘니까 기도를 줄이고 바자회가 있으니까 기도를 줄이고 성경을 읽어야 하니까 기도를 줄이고 행사가 있으니까 기도를 줄이고 등 기도를 홀대하고 기도 없이도 교회의 사역을 해낸다는 잘못된 유혹을 이겨야 한다. 오직 기도! 전혀 기도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으로 돌아가라. 120문도는 다른 일을 했다고 쓰여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 외에 부흥의 방법이 없다. 기도하는 것 외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오직 기도로 나아가자.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도 오직 기도하였다.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며 사람의 수가 삼천이나 돌아왔는데도 오직 기도에 힘쓴다. 오직 기도!


둘째, 일심 기도이다. (행4:24)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옥에 갇혔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사도들은 지극히 미미한 소수자에 불과했다. 이제 겨우 싹을 틔운 겨자씨와 같다. 거기에 회유와 형벌을 받았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러나 사도들은 용감하였다. 저들의 어리석은 요구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놓임을 받은 후 믿는 무리들에게 돌아와서 되어진 일을 다 고하였을 때 행4: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일심 기도를 배운다. 일심 기도는 마음을 하나로 한 기도이다. 이 일심 기도는 예수님 당시에는 없었던 기도이다. 기도란 대개가 개인 기도로 이루어지고 개인의 경건 생활로 취급되었다면 초대 교회의 부흥과 관련된 기도의 형태는 일심 기도로 진행되고 있다. 일심 기도는 마음이 통한 기도이다. 관심과 목표, 방향이 같은 기도이다. 사람이 몇 명이든지 마음이 연합하여 하나로 이루는 기도는 성령의 임재는 경험하는데 있어서 좋은 기도 방법이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도 서로 싸우고 갈등하고 분열의 영으로 채워져 있는 곳에는 기도 소리는 있어도 능력을 받을 수 없다.

일심 기도를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기도의 자리가 흔들리는 역사, 강한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심 기도하는 곳에는 문이 열린다. 옥터가 흔들린다. 귀신이 쫓겨가고 질병이 쫓겨가고 상처가 고쳐지고 영혼들이 자유를 찾아 일어나게 된다. 완악한 자들의 마음, 결코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되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능력은 일심 기도이다.

일심을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자. 미움과 편견, 오해를 내려 놓자.


셋째, 통성 기도이다. (행4:24)

사도들과 교인들은 일심 기도에 이어서 하나님께 소리를 높였다. 소리를 높이는 기도, 즉 부르짖는 기도가 다함께 모아지면 통성 기도이다. 흔히 일심 기도는 통성 기도로 나아간다. 보통 우리는 통성 기도, 부르짖는 기도를 무시한다. 큰소리의 기도를 무식한 자의 기도, 광신자의 기도, 천박한 기도라고 공격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부르짖는 통성 기도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삶의 사역이 긴급할 때, 벼랑 끝에 선 위기가 있을 때에 소리 지른다. 너무 기쁘고 감사할 때 소리를 지른다. 다함께 영적 전행을 해야할 때 통성 기도로 맞선다. 혼자서 하는 기도는 군인의 기도요, 여럿이 모여 드리는 기도는 군대의 기도이기에 소리를 높인다.

기도 중에는 침묵 기도가 있다. 통성 기도에 비하면 정반대 형태의 기도이다. 이 침묵 기도의 깊이를 외면하는 것이 통성 기도가 아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개인의 영성 수련을 위해 침묵 기도를 하였다. 나스파르의 아브라함은 ①혀의 침묵 ②몸 전체의 침묵 ③혼의 침묵 ④지성의 침묵 ⑤영의 침묵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하였다. 이런 기도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움직임에 의해서 내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기도, 수동적 기도로서의 침묵도 필요하다. 그러나 주님도 고통과 위기의 시간에 침묵만 하지 않으셨다. 겟세마네 기도 이후 십자가에 매달린 기도를 보라. 눅23:46 “예수께서 큰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의 기도는 여기서 침묵이 아니었다. 큰소리로 하나님을 부르는 통성 기도였다. 마27:46도 마찬가지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실 때 크게 소리 지르셨다. 거기 섰던 사람이 엘리란 말을 엘리야를 부르는 줄 알 정도로 크게 소리 질러 기도하였다.

기도란 고요한 정숙 기도만이 전부가 아니다.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기도였다. 위협하고 협박하는 무리들 앞에 움츠러들지 않았다는 사자의 포효, 호랑이의 포효와도 같은 기도가 당연한 기도이다. 그리하여 통성 기도는 더욱 성령 충만을 가져왔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용기의 복음 전사로 만들어 주었다.

진정한 부흥은 기도에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선교, 교회의 든든한 섬김 그곳에는 세 가지의 기도가 있다. 오직 기도, 일심 기도, 통성 기도이다. 이 세 가지 기도가 있을 때 영혼과 교회, 가정은 다시 살아난다. 시85:6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하였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

18세기 요나단 에드워드의 대각성 운동은 기도로 시작되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너무도 애써 기도한 나머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마루 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고 하였다. 요나단 에드워드의 품에서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어떠했는가?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노라고 20세에 다짐하였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그는 북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브레이너드의 기도 일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흥의 불을 붙여주어 교역의 첫째도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셋째도 기도라는 말을 남긴 로버트 머레이 멕체인과 같은 인물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17세기 영국 아일랜드의 부흥도 블레어를 포함한 7인의 합심 기도의 역사였다. 1859년, 19세기 중반 올스터의 부흥은 수백명이 한꺼번에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 형무소가 텅텅 비어 문을 닫았다. 영국을 구원한 웨슬리 형제의 부흥도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1857년~1958년에 일어난 미국의 대부흥도 어떤 선교사가 부흥을 위해 기도한 것이 부흥의 출발이 되었다. 기도의 영은 퍼져나가 뉴욕, 교회, 극장에 수천명이 기도회에 참석하였고 기도하는 사람이 늘어선 길이는 2000마일이 넘었다. 평양 대부흥도 마찬가지이다. 일심 기도, 오직 기도, 통성 기도로 발화된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의 부흥이 한국 강산을 불살랐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보여주는 기도의 원칙대로 우리 세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이며 둘째는 더 많은 기도이며 셋째는 더 능력있는 기도이다.

그러면 이것을 위해 전 교회가 모여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다. 부흥을 갈망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선택하여 쓰려는 소수의 사람들의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위대한 부흥은 언제나 기도에 대해서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기도라면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시작된다.

19세기말 유명한 부흥 운동가 스미스 목사에게 한 성도가 찾아와서 물었다. “나는 부흥을 원합니다. 교회가 부흥을 맛보길 원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때 스미스 목사가 말하길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분필로 당신이 앉아있는 자리에 원을 그리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부흥이 바로 여기서 일어나게 하소서. 거기서 부흥이 일어나면 당신의 가정도, 교회도, 민족도 부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부흥은 다른 사람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사도, 기도하는 백성이 일으켰듯이 기도하는 나,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기도에 물러서지 말고 오직 기도, 일심 기도, 통성 기도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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