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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선한 목자 (요 1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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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밀림의 법칙에 따라서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 먹고 살아 갑니다. 그런데 비록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틈바구니 속이지만 강한 자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밀림의 법칙대로라면 사자나 호랑이같은 맹수만 남아 있고, 토끼나 양같은 순한 동물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밀림에는 강한 동물과 약한 동물, 순한 동물과 교활한 동물이 엉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약한 동물 가운데 손꼽히는 것은 토끼와 양(羊)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토끼는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이므로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지만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양은 순한 동물이면서 또  깨끗한 동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양의 첫새끼를 잡아 제사를 드렸고, 제사를 드릴 때마다 양은 중요한 제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그 피를 발라서 애굽의 장자를 치는 재앙에서 넘어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양은 세상에서 가장 약한 동물의 하나입니다.  양(羊)은 자기 방어 능력이 없습니다. 양은 사자처럼 적을 물어뜯을 수 있는 강한 이빨도 없고, 염소처럼 상대를 받아 넘어뜨릴 날카로운 뿔도 없습니다. 치타처럼 빠른 다리나, 곰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숨기거나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그리고 스컹크처럼 고약한 냄새를 풍겨 적을 쫓아낼 재주도 없습니다. 적이 공격하면 그저 꼼짝없이 잡아먹히는 동물이 바로 양입니다. 또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갔다 놓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집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또 양은 자기 먹을 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짐승 중에 가장 길을 잘 잃어버리는 동물로 언급되곤 합니다. 게다가 양은 시력이 매우 나쁩니다. 그래서 양은 앞을 멀리 보지 못하여 종종 구렁텅이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처럼 양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그런데 양이 이처럼 약한 동물이면서, 어리석고 핸디캡이 많지만, 그럼에도 딱 한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가장 안전합니다. 그것은 양에게 목자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만 곁에 있으면 아무 것도 걱정할 것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양은 가장 약하고 미련하여 맹수가 오면 속수무책으로 잡혀 먹힐 수밖에 없지만, 목자만 있으면 양은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양에게 있어서 문제는 '얼마나 자신을 잘 지켜나가느냐, 어떻게 먹고사는 문제를 잘 해결하느냐'가 아니라, '목자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며, 또 그 목자가 어떤 목자인가? 입니다. 이런 문제만 해결되면 양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1. 나는 선한 목자라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4절에서도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라고 하신 것은 선하지 않은 목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선하지 않은 목자를 주님은 삯군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주님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두 종류의 목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직접 자기의 양을 치는 목자이고, 다른 하나는 품삯을 받고 남의 양을 대신 쳐주는 삯군 목자입니다. 삯군 목자는 이리가 올 때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목숨걸고 싸우고 지킵니다. 때로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나운 짐승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목자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왜 목자는 그렇게 양들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버리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목자>가 자기의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삯군 목자도 양을 좋아하기는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양들 때문에 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양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에는 자기 희생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들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랑하기보다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얻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많은 젊은 남녀들이 연애를 할 때는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지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살아보니 자기가 기대했던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을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13:5)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목자들은 다 양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많지 않습니다. 양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것에서 나오는 가죽과 털을 좋아합니다. 그것으로 배불리 먹고, 양털을 몸에 두르면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양 자체를 좋아하기보다는 양에서 나오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목자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그러나 정말 양을 사랑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양을 어렸을 때부터 돌보아오면서 정이 들고 애정을 가지고 키워온 목자는 그 양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런 목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양이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되면 때로는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가기 전에 사울에게 자기의 목동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나이다"

  (사무엘상17:34-35) 자기 생명만큼이나 양을 사랑하는 목동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기의 양을 사랑하는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선하다>는 것은 '착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선한 목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나 가진 것 다 털리고 매를 맞아 거의 죽게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는  가옫 만난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고, 다음 사람인 레위인도 제사장처럼 피해 갔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그곳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는 돈까지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경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 착한 사마리아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예수님이 강도만난 인생들의 이웃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때때로 강도만난 사람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저히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살아갈 수 없는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옆에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들을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시간을 허비해야 합니다. 물질을 쓰기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나중까지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 밤이었습니다. 불을 지피지 못해 냉기가 도는 방안에서 한 어린 소년이 어머니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였는데,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시켜 엘리야를 먹여 살리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성경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이 아이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우리도 방문을 열어 놓아 하나님의 까마귀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요"하고 엄마를 졸라댔습니다. "엄마, 틀림없이 우리 집으로 까마귀들이 날아올 거예요."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추운 겨울날 방문을 열어 놓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시장이 한겨울에 방문이 열려있는 이 집을 발견했습니다. 시장은 이상하게 여겨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이와 엄마가 쪼그리고 앉아 추위에 벌벌 떨면서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시장은 어머니로부터 엘리야의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시장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까마귀가 되겠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까마귀가 되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시장은 그 과부와 어린 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매일 매일 공급해 주었습니다. 시장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즉 선한 목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는 연민의 정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2.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오늘 성경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린다고 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는 말씀입니다.
  11절부터 18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이 말씀 속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대로 우리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고, 육각형 모양의 다윗의 별은 유대교의 상징이고, 망치와 낫은 러시아의 상징이고, 그리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고대 사회에서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혐오스러운 저주의 상징이었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고대 유대교의 전통은 십자가를 저주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신21:23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고,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신자들이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초대 교부 터툴리안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고 움직일 때마다, 들어가거나 나갈 때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을 때, 목욕할 때, 등잔에 불을 켤 때 침상에서, 좌석에서, 매일의 모든 일상적인 행동에서, 우리는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현대의 저명한 신약학자인 포사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라고 간단하게 정의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천상에서 혹은 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셨는가 하는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그 분이 행하신 일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바로 그 분의 십자가입니다. 그 분의 십자가를 이해할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고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했습니다.

  로마서 5장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에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느니라"(롬8:3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어주셨다>는 단어는 '넘겨주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1절)

  여기 <버린다>는 말과 <넘겨준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죽임 당함에 넘겨주셨다는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오래 전에 이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사53:12).
  여기 <버려>라는 말도 <넘겨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죽음에 넘겨 주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사실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습니까?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준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도 아닙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닙니다. 바로 사랑을 인하여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이 두 가지 시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차원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주었고, 대제사장은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다시 로마 군변들에게 넘겨주어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성부께서 예수님을 내어주셨고, 예수님은 다시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방문하는 곳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나치 독일이 이스라엘사람 육백만 명을 죽인 그 희생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참으로 무도하게 학살을 했습니다. 육백만 명이라고 하면 서울 인구의 절반이 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유대인 학살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거기 가면 세상에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할 정도로 끔찍한 장면들을 말해주는 유품과 그림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념관 마당에 하나의 조그마한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은 대단히 아름다웠던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폴란드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지만 특별히 폴란드에서 삼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 당시 독일군이 폴란드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려 할 때의 일입니다. 그곳 어느 초등학교에 학생들이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대인 어린아이들은 가슴에 노란 다윗의 별을 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표시로 강제로 달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별을 달고 있는 아이들과 다른 폴란드 아이들이 거기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같이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총을 들고 다가옵니다. 아이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들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아이들을 향하여 "가슴에 별을 단 아이들은 모두 나와!"하고 명령했습니다. 무섭고 당황한 나머지 모두들 소리를 지릅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너무 무서워서 선생님을 끌어안았습니다. 선생님도 그들을 껴안고 있습니다. 독일군은 "선생님은 물러나고 아이들만 내놓으시오"하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유대인 어린아이들과 같이 가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안됩니다."하고 독일군이 말해도 듣지 않고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가스실로 끌려 들어가 이제 정말 죽게 됩니다. 선생님은 가스실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아이들이 너무 벌벌 떠니까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자, 우리 함께 기도하자" 선생님과 아이들은 함께 기도합니다. "어때? 기도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지?" "예, 이제 편안해요."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선생님, 저희는 이제 아무 두려움도 없어요." 이 폴란드 선생님은 사실 거기에 유대인들과 같이 가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단지 아이들을 사랑해서,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아이들이 그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그들을 끌어안고 같이 가스실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학살 기념관에는 이 폴란드 초등학교의 여자 선생님이신 코르자크 선생님이 벌벌 떨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끌어안은 모습을 동상으로 세워놓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초등학교 선생님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3. 선한 목자에 선한 양

  성경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선한 목자는 양을 계속 돌보아왔기 때문에 그 양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양이 느린지 빠른지, 다리가 긴지 짧은지, 성격이 좋은지 나쁜지, 양의 모든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언제 무슨 사고가 나서 어디를 다쳤는지 그 상처까지도 다 압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양된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아시고, 우리의 상처와 약점을 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예비하시고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한 숫양을 준비하셨다가 이삭 대신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체험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셨다는 의미로 "여호와이레"라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아실 뿐 아니라 필요한 모든 준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잘 따라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복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만 양을 알아서는 안됩니다. 양도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에게는 선한 양이 있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지금도 풀 한 포기 없고, 있다 해도 노랗게 다 말랐는데, 그 동산이 전부 하얗게 줄무늬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답니다. 그 산에 줄무늬가 있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양은 목자가 방울을 울리면서 앞서 가면 수백 마리의 양이 한 줄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양떼가 한번 지나가면 저절로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보면 목자가 언덕 꼭대기로 곧장 올라가면 양들이 힘들까봐 비타를 따라 옆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옆으로 줄이 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믿고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간다고 할지라도, 저 목자가 이 길을 통해서 좋은 길로,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전적으로 믿고, 목자가 가는 길을 따라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왜?"라는 물음이 필요 없습니다. 곁길도 없고, 한눈 팔 것도 없습니다. 이렇듯 그 많은 양들이 단 한 사람의 목자를 따라 줄지어 가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신뢰와 사랑, 참 평화가 거기에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양은 목자를 절대 신뢰합니다. 그리고 목자가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때로 부모자식 간에도 이런 점이 문제가 됩니다. 부모는 인생의 선배로서 자식의 사정과 앞날을 자기가 더 잘 알기에 자식을 지도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더 잘 알고, 내 사정은 내가 압니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합니다."고 주장합니다.

  성도 여러분!
  자식이 세상을 얼마나 살았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더 잘 아는 법입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환합니다.
  부모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자식이 믿기만 한다면 부모 자식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 한 가지만 알고서 그것이 전부인 냥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사람이 참 무섭습니다. 간혹 보면 교회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교회를 판단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양들은 목자가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외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나의 속사정을 너무나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십니다.
  나의 처지를 이해해 주십니다.
  내가 어디에 약한지, 왜 불안해하는지, 왜 자주 넘어지는지,
  왜 울고 있는지, 예수님은 모두 아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외로운 생각이 들면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를 알고 따르는 것이 바로 선한 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4장 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나를 알아주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깊은 속사정까지 알고 알아주시는 선한 목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지하는 선한 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비록 고통이나 슬픔 중에 있다 할지라도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갓 결혼한 신랑이 신부와 의논도 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당황한 신부는 부랴부랴 이것저것 준비했지만 몇 가지가 부족했습니다. 신부는 필요한 것을 빌리려고 옆집을 방문했습니다. 40쯤 들어 보이는 옆집아주머니는 신부가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 많은 것들을 더 빌려 주었습니다.
  "새댁, 이것들도 꼭 필요할거야." 신부는 엉겁결에 아주머니가 주는 대로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아주머니가 빌려 준 그 물건들은 정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는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당신의 형편을 아뢰십시오.

  "저희의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 주님 앞에 저희의 형편을 다 아뢰오니 저희의 길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요즘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당신의 형편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허탄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필요에 부응하고, 우리의 사치가 아니라 우리의 쓸 것을 고려하여, 분량을 균형잡히게 해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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