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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속적인 복을 누리기 위한 성도의 4가지 구별된 삶 (느 1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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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나라는 북한의 핵 문제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6.25의 잿더미 위에서 세계 경제 10-12위 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어서 세계에서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모든 것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이미 3만 7천 여기의 핵탄두가 있고 만약 핵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과 소련이 가진 핵탄두만으로도 지구를 41회나 파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1mt 규모의 전략 핵폭탄이 서울 시청 상공에 터진다면 열복사로 서울시청을 중심으로 반지름 약 3km의 거리의 모든 것이 폭발과 동시에 증발해 버린다고 합니다. 서울과 기타 인근 도시의 전자 장비는 모두 동작이 멈추고 반경 약 7~9km 떨어져있는 곳도 엄청난 열로 인해 폭발의 중심지가 증발함과 거의 동시에 타기 시작한답니다. 노출부위가 25%가 넘는 사람들은 몇 초 뒤 절명하고 노출부위 25% 미만의 사람들은 약 1분 뒤 후 폭풍이 다가올 때 모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후 폭풍으로 90% 이상의 건물은 파괴되고, 후 폭풍은 인천, 의정부, 수원까지도 도달하여 건물을 파괴한답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눈처럼 떨어지는 뿌연 재같은 선낙진으로 이것에 노출된 사람은 2주내지 길게는 6개월 안에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사망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하나의 원자 폭탄으로 서울의 모든 80~90%의 건물이 파괴되고 서울인구 천만명중 약 200만 명은 즉사, 약 2백만 명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사망하고, 약 300만 명은 2주내지 6개월 안에 사망하게 되며 결국 우리 나라 인구 중 천만에서 천 이백만명 정도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도 그 비참함은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 남아 있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누렸던 우리의 복을 지속적으로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게 멸망된 후 느헤미야는 고국에 돌아와 지속적인 복을 누리는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성벽 재건을 52일 만에 완공하고 바로 성벽 봉헌식을 하지 않고 먼저 성전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대 부흥운동을 일으키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84명의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여 변화 선언문, 헌신 선언문을 선포하고 다짐하였습니다. 이제 새시대, 새 세상이 되었으니 바르고 다르게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이 바로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을 요약하면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29). 이제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속화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들을 이방 사람들과 결혼 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30). 가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안식일을 잘 지키겠다는 것입니다(31). 시간을 구별하여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넷째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37). 경제 생활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리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무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경제 개발을 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위와 같은 것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망했으니 지속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를 고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성벽 봉헌식을 하고 잠시 페르시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있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라는 말은 여기나오는 ‘레케츠 야밈’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날들의 끝에, 한 해가 저물 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궁으로 돌아갔다가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입니다. 그 일년 사이에 백성들이 다시 옛 생활로 돌아 가 버렸습니다. 성전이 완공되고 성벽은 재건하였지만 실제적인 삶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 지속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네가지만은 구별된 삶을 살자고 말씀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속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도비야를 몰아내고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세속화 방지(4-9)/ 마음의 중심에서 도비야를 몰아 내라.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성전에 끌어 들여 머물게 한 것입니다. 도비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암몬 사람으로 산발랏과 결탁하여 성벽 재건을 집요하게 방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정결하게 보존해야 할 대제사장이 친분상의 이유로 작은 방들을 터서 큰 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성전관리를 맡은 자로서 대적과 내통(4)하고 결혼(28)관계를 맺고, 우정(7)을 나누며 세상과 결탁하였습니다. 완전 세속화되었습니다. 그 방이 어떤 방입니까? 성물과 헌금을 넣어두는 방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주관해야 할 방에 도비야가 앉아서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이 악한 일을 하고 심히 근심하고 세간을 다 창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 방을 정결케 하고 예배드리는 기물과 제물을 다시 들여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지배하여야 할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성전이 도비야가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비야는 오늘날 말하면 사탄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성전인 우리의 몸을 노예로 붙들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을 세속주의로 이끌게 만드는 세력입니다. 교회를 상업화하고 마음을 시장 바닥으로 만들고 늘 근심과 걱정 실패의 삶을 만들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노예로 만드는 술이 될 수 있고 마약이 될 수도 있고 색욕, 탐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씀 중심으로 모든 세속화를 배척하는 삶을 사는 지속적으로 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것은 마치 암세포와 같습니다. 가만히 놓아 두면 인생을 파멸로 끌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30:9)"


2. 지속적인 복을 받는 삶을 살려면 물질 생활에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물질 생활(10-14)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돈이 없어 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물질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여 참으로 복된 삶을 살도록 했는데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을 완공한 후 부흥회를 하며 헌신 선약, 변화 서약을 할 때 십일조와 헌금을 하여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깐의 다짐에 불과했습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가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과 성가대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10). 왜 그렇습니까? 먹고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지도자를 불러 책망합니다(11). 그리고 레위 사람들과 성가대원들을 성전에 불러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십일조를 가져와 성전 창고에 들여 놓았고 이것을 관리할 사람 5명, 성실하고 정직하며 인정받는 자들을 세워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복된 삶을 지속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물질이 목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목자 삼아 평생 복된 삶을 살았던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1-6)”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면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고 어떤 경우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이민을 갔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까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의 종이 증거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다(창 24:35)”고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 믿고 따랐는데 그에게 하나님께서 장수와, 물질과, 명예를 주셨습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았는데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창 26:12-1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없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였습니다. 14년 동안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일했는데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6년 동안 그에게 재산을 부어주었습니다. 야곱은 고백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 32:10)” 요셉은 어떻습니까? 빈털터리로 애굽의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섬김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 오직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질의 축복도 주어 복된 삶을 살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물질의 유혹 앞에서 단호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복된 삶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1930년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입니다.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영웅이 된 다음에 파리를 한 번 방문했는데,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을 찍는 대가로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7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대단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돈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겼던 린드버그는 이런 말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이 말은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나왔고, 그의 말을 듣고 그 당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성금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돈의 양과 행복은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3. 지속적인 복을 받으려면 시간 사용에 있어서 시간관리의 우선순위를 예배 시간에 두어야 합니다./시간 활용(15-22)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6일에 창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첫날 맞이한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일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은 일주일의 맨 끝이 아니라 맨 처음입니다. 우선 순위가 주일 중심이어야 합니다. 건강한 삶, 웰빙 삶을 위해서는 좋은 보약을 먹는 것보다 주일 우선 순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는 것도 주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시간은 생명입니다. 시간은 기회입니다.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은 달라집니다. 이것 잘 지키지 못하다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포로 생활하면서 이방 문화에 편승하여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벽을 재건하고 느헤미야는 안식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다짐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헌신 선약을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사고 파는 것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간 사이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합니다. 포도와 포도주와 무화과를 팝니다. 안식일에 사고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사고 팔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안식일에 물고기와 다른 상품들을 파는 것입니다. 이 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지도자들을 불러 책망합니다. 조상들이 이런 일을 하다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예 성문을 열지 못하게 하여 안식일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노동의 양과 삶의 질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20:11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예비하신 날입니다. 결코 손해보는 날이 아닙니다. 소련에서 공산당 혁명이 성공한 후 공산당 지도자들은 회의를 거쳐 노동자들의 생산량을 높이고자 기독교 문화의 산물인 제7일 주일 휴무를 깨려고 10일 동안 일하고 쉬게 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픈 사람, 병든 사람, 속출하는 사고 등으로 시행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결고 일요일 휴무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신약시대에 주일 예배를 드리며 쉬는 것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 가운데 주일은 예배 중심의 날로 보내야 하겠다고 다짐을 지속적으로 지켜 나갈 때 복된 삶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주일 중심으로 인생을 계획하고 사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세상 사람과 구별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주일을 중심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복을 받습니까?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계1:10) 성령에 감동되어(계1:10, 4:2),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계17:3,21:10). 요한의 주의 날에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계1:10). 요한은 주의 날에 하늘의 세계를 보았습니다(계1:12, 4:2; 계17:3; 21:10). 주님께서는 주의 날에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계1:17). 주님께서는 심히 두려워하는 자에게(마 17: 7), 죽은

자 같이 된 자에게(계1:l7), 근심이 더하고. 힘이 없어지고, 호흡도 남지 않은 자에게(단10:15-18) 오른 손을 얹어 주십니다. 그 때 두려움이 없어집니다.(마17:7, 계1:17, 단10:19), 평안하게 됩니다(단10:19), 강건하게 되고(단10:18,19), 힘이 생기게 됩니다.(단10:19) 주일 예배에 참여하여 이런 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일 날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회복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된 삶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4. 지속적인 복을 받으려면 가정 생활에 있어서 가정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가정 생활(23-31)

가정을 구별되게 살지 못하다가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한 이들에게 가정 생활을 이제 이방 사람과는 구별되게 살 것을 서약하게 했습니다.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가니까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방 사람과 결혼하며 구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방 여인을 사랑합니다. 유다 사람들이 아스돗 암몬 모압 여자들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자녀들 태반이 유다 말을 잊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까지도 호론 사람 산발랏의 딸과 결혼시켰습니다(28). 그래서 그를 추방시켜 버렸고 부모를 불러 심하게 책망하였습니다(25). 솔로몬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그 가정이 불행했던 사실을 설명하였습니다. 가정이 믿는 사람답게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결혼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다양한 조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공통적인 것이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욕심과 욕구 쾌락에 의한 세속적인 사랑은 결국 가정을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이 복된 가정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6; 신 7:9)" 대대로 복을 받는 가정이 되는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변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앞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출13:21, 23:23,28).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9:3, 31:3)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행할 길을 지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33).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습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놓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저 한 사람을 위해 성도님 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원리로 자녀들도 결혼시켜 복된 가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과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가정 범사에 형통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 존 웨슬레를 보십시오. 아이들에게 가난뱅이 놈이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가난뱅이 비렁뱅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19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빚이져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수잔나는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앙으로 그 아이들을 길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차 주전자, 그리고 낡아빠진 코트 한 벌 밖에 없는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감리교가 그를 통해 만들어 졌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합니다. 그의 가족은 5대의 걸쳐 목회자가 나온 가족이었고 요한 웨슬레 이후에도 참으로 좋은 인물들을 배출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삼상 2:3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이 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도 그를 경멸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엘리 가정이 불행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 보다 아들들을 더 중이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니까 더 잘 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사랑했던 아들 때문에 오히려 그 아들들이 복을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 우리 가정이 지속적으로 행복해지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 연약합니다. 쉽게 옛생활로 돌아가버립니니다. 쉽게 은혜를 잊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개혁하면서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성전에서 도비야를 몰아내면서, 십일조를 회복하면서 나를 기억하시고 잊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을 회복하게 하고 이일도 기억하시고 큰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마지막 31절을 보십시오. 이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내 하나님이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신분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답게 삶도 변하여 지속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속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삶의 기준을 말씀으로 삼고 마음 속에 있는 도비야를 다 몰아 내어야 합니다. 세속적 가치관을 몰아내야 합니다. 나를 근심과 불안으로 얽매이는 염려를 몰아 내야 합니다. 나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옛습관과 취미를 몰아 내야 합니다. 나를 늘 넘어지게 하는 내가 좋아하나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물질을 왕으로 삼지 말고 여호와를 목자 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받아야 합니다.

모든 시간 중에 예배시간을 가장 귀히 여기며 예배를 우선시하는 시간 계획을 세우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에 감동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받아 회복되고 평안을 얻고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고 일어나 새힘을 얻어야 합니다. 가정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자손 천대까지 은혜가 지속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대가 어떻게 변한다하여도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변치 않으시고 우리 앞서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출13:21, 23:23,28).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9:3, 31:3)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행할 길을 지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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