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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향기로운 예배 (레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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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예배

(레1:1-9)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답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깨끗한 것, 거룩한 것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히 아름답고 죄가 전혀 없는 절대 성결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에는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 사함을 받아 깨끗해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 수 있는 곳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범죄하여 더럽혀진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창3:17-19)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는 것입니다. 너로 인해 저주받은 땅에서 너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먹고 살다가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기아 자동차 회사에 돈을 주고 부정한 방법으로 취직했다가 들통이 나서 검찰 조사를 받았던 김모씨는 “잘못된 것인 줄 알았지만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었다.”며 자신의 가슴 아픈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남미 칠레의 한 여성이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자신의 영혼을 250만 페소, 우리 돈으로 430만원에 내놨다고 합니다. 올해 35세인 이 여성은 너무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영혼이라도 팔아 돈을 벌고 싶었다고 합니다. 차마 상상할 수 없는 가난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질러대는 비명소리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절규,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말은 먹고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어떠한 죄일지라도’ 서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사들이는 것은 마귀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버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찢어지게 가난하기 때문에 영혼이라도 팔고자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영혼을 팔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괴테의 유명한 작품 <파우스트>(Faust)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파우스트는 철학, 법학, 의학, 신학을 두루 섭렵한 박사이며 지칠 줄 모르는 지식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탐구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의 덧없음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삶의 모든 기쁨을 잃고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파우스트에게 퀴퀴한 서재에만 파묻혀 고민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 자유롭게 인생을 경험하며 향락을 즐겨 보라고 권합니다. 파우스트는 이 세상의 관능적인 쾌락이나 소유, 재물,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악마의 말을 비웃어 버립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이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세상에서 정말 자기를 만족시켜주면 죽어서 자신의 악마에 넘겨주겠다고 계약합니다. 악마는 파우스트로 하여금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제일 먼저 술집으로 안내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주변에서 가장 쉽게 쾌락을 찾을 수 있는 장소로 술집을 드나들 듯이, 악마가 파우스트에게 재미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첫 장소로서 술집을 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늙어 버린 파우스트에게 술집의 발랄한 젊은이들과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젊게 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악마는 파우스트를 젊게 해 주기 위해 마녀를 찾아갑니다. 파우스트는 마녀가 만든 약을 먹고 젊어집니다. 젊어진 파우스트는 길에서 한 여인(그레트헨)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욕망에 불탑니다. 파우스트는 고의적으로 그 여인에게 접근하여 유혹합니다. 그 여인은 나이가 어리고 순수한 처녀인데 파우스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관심은 오직 그녀에 대한 육체적인 욕망뿐입니다. 결국 파우스트는 처녀를 임신시키고 그녀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파우스트는 처녀의 오빠를 죽이고 도망가게 됩니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고뇌합니다. “그토록 온순하고 가엾은 여인을 내가 범죄자로 만들어 감옥에 넣어 무서운 고통을 받게 하다니! 저 귀엽고 어여쁜 처녀가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이냐?” 결국 그 처녀는 출산한 영아를 살인한 죄로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이런 일은 우리 현실 속의 삶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악마와의 계약에 따라 24년간 지상의 쾌락을 마음껏 즐겨 본 파우스트 박사, 그는 자신의 욕망, 권력, 명예 등 온갖 육체적 쾌락을 위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악마에게 팔아버린 영혼의 파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영혼을 팔아서라도’ 온갖 욕망을 채우려 달려드는 파우스트들이 많습니다. 인류 역사상 돈에 미쳐서 영혼을 팔아버린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하나로 돈 자루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은 30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스승 예수를 팔아 십자가에 매달게 한 장본인입니다. 후에 자신이 한 일을 깨달았으나, 회개 대신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은 30에 회복할 수 없는 너무 큰 비용을 치른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회개를 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여 동산 숲에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말합니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말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재차 물으시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0-12)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담의 변명을 보면, 회개는커녕 범죄의 책임을 아내 하와에게 전가하며 그 궁극적인 원인 제공은 하와를 만들어 아내로 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물었지만 전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결국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맙니다. 죄로 더럽혀진 인간은 영원히 아름답고 깨끗한 동산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 장성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었고,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물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이유를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11:0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드리지 아니한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에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염려되어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제사,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문제로 인해 기분이 상해 동생 아벨을 죽이고자 하는 악한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네게 죄의 소원이 있으니 그 죄를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들에서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까지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가인의 살인행각을 모르시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시치미를 뗄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신경질까지 부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9-10)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그 마음에 죄의 소원이 있을 때부터 회개할 기회를 여러 차례 주었지만 전혀 회개하지 아니하고 죄를 숨기며 항변하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는 것은 악마 사탄에게 그 영혼을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이렇게 죄를 범한 인간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아름답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가 바로 제사 제도, 오늘의 예배입니다. 구약 시대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는 대표적인 제사가 번제(燔祭, burnt offering)입니다. 번제란 동물을 희생 제물로 삼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동물이 제물로 희생되는 이유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값을 치루기 위해서는 희생되는 제물이 있어야만 합니다. 번제에는 반드시 두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흘린다는 것은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피가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둘째, 희생되는 동물은 흠이 없어야만 합니다. 반드시 깨끗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 조건을 완전하게 갖춘 희생 제물로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세상에 소개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되는 희생 제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거룩하고 흠이 전혀 없는 희생 제물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전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되어 피 흘리셨다고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얻어 하나님 앞에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 곧 예배를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라고 합니다.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희생당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드리므로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3. “향기로운 예배”가 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몇 가지 예배법이 있습니다.

첫째, 본문 4절에 보면,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희생될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라는 것은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라는 것입니다.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이 지금까지 지은 죄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고백한 죄가 모두 희생 제물에게 전가(轉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행위, 다시 말해 죄를 회개하는 행위가 없이는 속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때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회개하는 고백이 반드시 있어야만 “향기로운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끗하다며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회개없는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이 열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는 세리는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성전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회개하므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회개하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열납된 것입니다.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회개의 고백이 없는 기도와 찬송, 그리고 회개하라는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예배는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신의 죄를 지적하여 회개할 수 있도록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을 때까지 곁에 두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국 어느 도시에 사는 남매 메리와 존이 주말에 시골의 할머니 댁에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존은 삼촌이 선물로 사준 고무총을 가지고 가서 이것저것 쏘는 연습을 하며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오리가 걸어오는 것을 본 존이 고무총을 겨누고 오리의 머리통을 명중시켜서 오리가 그만 그 자리에 ?푹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존은 겁이 났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죽은 오리를 가지고 큰 나무 밑에 파묻고 낙엽으로 가리워 놓았습니다. 감쪽같이 가리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두근거리고 두려워서 할머니께서 잘 준비하신 저녁 식사도 하는둥마는둥 했습니다. 밤에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눈만 감으면 할머니가 보이고 죽은 오리가 눈에 선하게 나타납니다. 할머니를 보면 공연히 무섭기만 하고 도무지 괴로워 살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존은 결심했습니다. 어차피 잘못한 바에는 할머니께 말씀드려서 벌을 받아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한 존은 할머니 방에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인자하신 음성으로 “존,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습니다.?존은 용기를 내어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을 듣고 계시던 할머니는 존을 안아주시면서 “존, 착하다. 내가 네 잘못을 다 용서해주마. 사실은 어제 오후에 이층에 있으면서 네가 하는 일을 다 보았단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나에게 고백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아무 걱정 말아라. 내가 다 용서했다.” 가인의 마음에 품은 생각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물으신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는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은 멸시치 아니하시고 “향기로운 예배”로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둘째,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희생 제물의 머리를 안수를 마친 후 곧 이어 그 제물의 가죽을 모조리 벗겨야만 합니다. “가죽”은 ‘겉모습’, 벗겨내야 할 생활, 습관을 의미입니다. 원망 불평하는 말과 마음,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생활태도,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적인 생활태도 등을 벗겨내야 합니다. 말만 앞세우고 행함이 없는 믿음,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는 생활태도, 상석에 앉기를 좋아는 교만한 마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탐욕적인 마음과 생활 등(마23:1-25)을 벗겨내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죽을 벗기고” 드리는 예배로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본문 9절입니다.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여기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라.”는 말씀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헌신하는 자세로 예배드리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넣는 것을 보시고, 그리고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바로 이 가난한 과부처럼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것처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헌신하는 자세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가 부를 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아까워 눈멀고, 병들고 저는 것 등을 바쳤습니다. 이같은 예배 행위는 하나님의 예배를 경멸하며 하나님을 속이는(사기) 행위로 반드시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말1:8, 13-1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이 저마다 교회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 중에 아나니와 그의 아내 삽비라가 있었는데 이들 부부도 소유를 팔아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그 헌금할 때 일부를 집에 감추고 마치 전부를 헌금하는 것처럼 했습니다.

베드로가 “(행5:3)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책망합니다. 베드로의 책망을 듣던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이 사건을 전혀 모른 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행5:8)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묻자 삽비라가 “예, 이뿐입니다.”며 또 거짓말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행5:9)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고 하자 삽비라 역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처럼 전부를 드리지도 아니하면서 마치 전부를 드리는 것처럼 드리는 거짓된 예배는 불행한 일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인디언들이 사는 마을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중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선교사가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있을 때 그 마을의 권력자인 늙은 추장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설교 강단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서는 그가 심히 아끼던 도끼 자루를 내려놓고 큰 소리로 “추장인 내가 아끼던 도끼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다.”고 말하고는 돌아가 앉았습니다. 선교사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선물로 주셨다고 설교할 때였습니다. 그 늙은 추장은 다시한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깨에 두르고 있던 담요를 끌러서 강단에 바치며 말했습니다.
“추장인 내가 소중히 여기던 외투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친다.” 설교는 계속되었습니다.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늙은 추장은 조용히 일어나 나가더니 조랑말 한 필을 끌고 와서 강단에 바치고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추장인 내가 매우 사랑하던 말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다.” 늙은 추장은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 정확히 말해서 그가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물건’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교사의 설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시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당연히 우리도 우리 삶 전체를 바쳐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늙은 추장은 이전 경우들과 달리 아주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앞으로 걸어 나가, 선교사 앞에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의 뺨 위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떨리는 입술로 “추장인 내가 바로 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립니다.”하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보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드리고서는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고 만족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전부를 불태워 드리라”는 말씀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세상 욕망을 위해 불태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불태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치며 행하라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릴 때도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드릴 때, 봉사와 전도를 할 때도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예배”로 열납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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