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시 믿음을 전파하게 하소서 (딤전 2:4-7)

  • 잡초 잡초
  • 175
  • 0

첨부 1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결정들을 합니다. 학교를 결정하고, 배우자를 결정하고, 직장도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결정 중에서 제일 잘한 최고의 결정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신앙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정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인생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기적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접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받아들인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 복음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수없이 반복해서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시고,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이고, 우리를 도와주신 은총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왜 교회에 다니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유를 말합니다.
 
  “내가 나를 믿지 무슨 다른 것을 믿느냐, 그리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종교와 신앙이 없어도 내 인생에 아직까지 불편한 것은 없다.”
  “기독교는 사실 세속적인 것 같다. 세상과 타협하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이 있고 교인을 보면 너무 위선적이며 이중인격자도 많이 있는 것 같다.”
  “신앙생활이 주는 여러 가지 제약이 나는 싫다. 교인들은 인생을 아주 따분하고 재미없게 사는 것 같다. 지루하게 사는 것 같다.”
 
  여러분도 과거에 기독교인을 향한 이런 질문을 갖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쉽게 대답을 찾지 못해서 예수 믿는 사람, 친구, 부모님, 전도를 한 사람에게 수많은 질문을 건넸을 것입니다. 지금도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이 나 자신만 믿고 살만한 것입니까? 그러나 돌부리에 넘어져도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를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결코 모든 것을 갖고 있는 능력의 존재가 아닙니다. 언젠가 처절하게 무너지고, 자기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할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깨달았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기독교 안에 세속적인 모습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갈등과 미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다툼도 있고, 문제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세속적인 가치관이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끊임없이 생명을 누리며 진리를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것을 뛰어넘는 거룩함, 진리와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곳입니다. 만약 교회에 나오는데도 진리를 향한 열정과 생명에 대한 기쁨이 없고,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면 사실 그 교회는 죽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역사를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때 예수 믿는 것이 즐거워집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기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아집니다.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가지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계셔야 아름답게 꽃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이 교회 공동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실존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확실하게 믿으면서 감사하게 된 것은 실존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폴 틸리히가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는 책을 쓰면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실존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실존 전체를 뒤 흔드는 불안,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숙고하면 할수록 없어지지 않는 궁극적 불안이 있다고 하면서 세 가지 불안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 인간에게는 존재론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 앞에 서면 내 존재가 비존재가 됩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과 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얼마나 비통해 했습니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게 따뜻하던 육체가 차디찬 육체와 한 줌의 재로 바뀌고,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지는 아픔이 있는 것이 바로 존재론적 불안을 경험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아내와 남편간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간에게는 목적론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어떤 길로 와서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유를 추구하며 달려가 보지만 자기 교만과 욕심에 멈춰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어디에 진리가 있고, 어디에 참된 목적이 있는가를 질문하는 목적론적인 불안을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양심의 존재, 도덕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악을 행하면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악을 행하는데도 뻔뻔스럽다면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이중성이 자신을 책망합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자기 안에 인간적인 탐욕과 악이 끊임없이 붙잡는 것을 보면서 아파하는 것이 도덕적인 불안을 갖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저는 인간인 우리에게 이런 불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인간의 물음과 불안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죽음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가 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죽음 이후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줄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의 믿음은 종말론적인 믿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세계에 붙잡혀 있다고 생각할 때 종말론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인 불안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11:25-26)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목적의 무의미성을 바꾸셔서 하나님 안에서 목적을 새롭게 발견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된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적,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길을 발견한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인생은 의미 있는 것으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기독교는 엄청난 개념들을 포착하고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최대의 개념들인 진리, 생명, 자유, 해방,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인생은 목적이 있고 가야할 방향이 명백하게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이 죄책감 속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은 찾아 오셨고,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죄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조롱받던 세리와 창녀들은 자기의 한계성을 느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껴안으시고 상처를 보듬어 치유해 주셨습니다. 고통과 아픔 속에 있는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세워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용서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5-6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어 주신 분, 우리의 허물을 지시고 대신 인생을 마친 분, 우리의 불안과 상처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지고 길을 가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것이 용서받는 믿음, 생명을 얻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무거운 짐을 갖고 있을 때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내 인생에서 내가 해결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을 때 주님 앞에 나와 말씀하십시오. “주님, 나 왔어요. 하나님, 가르쳐주세요. 하나님, 이것을 내려놓게 해주세요. 하나님, 내가 갖고 있는 삶에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주세요.”
  예수님은 인간의 질문, 인간의 문제,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해주시는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삶이 예수 믿기 이전과 믿은 이후의 삶이 구별됩니다.
 
  여러분이 1분 안에 예수 믿기 이전의 삶과 예수 믿고 난 이후의 삶의 차이를 200자 원고지 한 장으로 쓸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소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받은 다섯 사람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돈이 좀 있었지만 삶이 아주 지루한 부자였습니다. 돈이 있으면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아주 공허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삶의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생기를 찾았습니다. 이제 돈을 어디에 쓸지, 어떻게 써야하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자멸과 파멸로 가는 인생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둠을 좋아했고 음란에 빠져있었습니다. 나는 여자를 보면 쾌락의 도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여자가 인격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건강하고 건설적인 삶의 소중함을 깨달고 있습니다.”

  “나는 인기를 좋아했습니다. 인기를 독차지 할 때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 곧 황홀 그 자체였고,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기가 없어졌을 때는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내 인생은 추락하는 날개 없는 새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인기를 넘어서 남을 섬길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중을 열광시키는 몸부림에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자유가 내 안에서 용솟음 쳤습니다.”

  “나는 문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늘 혼자였습니다. 외로움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가족처럼 대했습니다. 나의 주인이었습니다. 사랑을 알고 내 존재의 의미를 깨달게 해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살기가 싫었어요. 모든 것이 나를 외면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나는 사랑받을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죽자고 생각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저를 찾아 오셨어요. 그리고는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냥 울고 싶었어요. 내가 하나님의 딸이라는 것이 그냥 기뻤어요. 감격스러운 눈물이 흘렀어요. 이제는 열심히 살 거예요. 무엇이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어요.”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변화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알게 될 때 내 인생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조금씩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시기와 성격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한 달, 어떤 사람은 일 년, 어떤 사람은 십 년, 어떤 사람은 삼십 년 아니 오십 년씩이나 걸리면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진리 앞에 서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기에 기적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모습이 조금씩은 다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할 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제가 너무 늦게 믿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예수님을 알고 믿었어야 하는데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죽기 5분전에 믿고 천국에 가면 어떻겠냐고 질문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죽을 시간을 알고 있습니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5분전에 회개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강도는 마음속에 이렇게 통탄하며 후회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더 빨리 알걸. 당신이 나의 주님인 것을.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젊었을 때, 마음껏 일할 수 있을 때 주님을 알고 인생의 목표와 삶의 의미를 깨달을 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지하실 창고에 숨겨 두지 말고 전파하십시오. 나는 부족하지만 예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나는 사랑이 없지만 예수님이 사랑의 귀한 분이기 때문에, 나는 오래 참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나는 왜곡되고 거짓 속에 있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 해보십시오.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고 축복받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리라.” (디모데전서 2:4)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기물이나 담벼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소원이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생명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잘못된 사랑이 아닌 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축복이고 내가 예수님 안에서 생명과 진리를 얻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명과 진리에 대해서 우리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 (디모데전서 2:7)
 
  우리는 빛의 사자들, 진리의 사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