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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생명의 산소입니다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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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생명의 산소입니다.
고린도전서 13:1-13

어제 5월 5일 어린이날에 송사리 다섯 마리가 소풍을 갔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보니 송사리가 갑자기 여섯 마리로 늘어난 겁니다.  그래서 화가 난 다섯 마리 송사리들이 행렬에 끼어 든 녀석을 째려보면서 물었습니다.
"넌 뭐냐?"
그러자 그 송사리가 아주 다소곳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전 꼽사리 인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송사리면 어떻고, 꼽사리면 또 어떻습니까?  부자면 어떻고, 가난한 자면 어떻습니까?  힘 있는 자면 어떻고, 힘이 없는 자면 또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무엇보다 서로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라는 이 말에는 언제나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옆에 계시는 분에게 이렇게 축복의 말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상징은 서로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생명에 산소가 끊어지면 생명이 끊어지듯이 사랑이 떠나면 생명은 죽게 됩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져도 사랑은 승리합니다.  사랑은 도덕 이상의 것이고 의무 이상의 것입니다.  사랑은 행복의 샘입니다.

사랑이란 언어에는 지고한 진실성과 신뢰성과 사람에게 절대적인 필요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가면의 다른 역할을 거절합니다.  오직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는 용서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인가 진자리 마른자리를 갈아주시며 나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부모님의 사랑이 끝이 날 때가 있습니다.  피보다 더 진하다는 형제의 사랑도 고갈될 때가 있습니다.  한 평생 변하지 말자던 친구의 사랑도 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모든 종류의 사랑이 다 고갈되어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곁에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세상의 다른 사랑은 변해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인간의 위기와 고난의 시기에 더욱 뜨겁습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큰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비 이기적인 행위로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와 끝없는 참음과 희생과 수고를 기본 개념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삶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감동과 감화를 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스스로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일진데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화평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는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는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단만이 있습니다.  미움과 정죄와 비난이 있는 곳에는 사단의 역사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에 미움과 정죄와 비난의 영들을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몰아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오직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실한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입니다.  사랑은 신비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희생을 위한 희생도 아닙니다.  희생을 위한 희생은 이기심의 한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함께 봉독한 고린도전서 13장은 전체적인 문맥상 괄호 안에 넣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다 잘 알듯이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음행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문제, 결혼의 문제,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대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은사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활발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은사 우월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서 질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장에서 영적인 은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이 은사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지켜야 할 질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사에 개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12장과 은사의 질서를 언급하고 있는 14장의 사이를 연결하고자 13장의 사랑장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의 은사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은사가 개인과 교회 안에서 보다 질서 있고 은혜롭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그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편지를 쓰면서 이 사랑의 찬가를 적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특별한 단어로 채워져 있고, 그것은 고귀한 진술이며 본질적인 비전을 보여 줍니다.  한편 그것은 실제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사랑이라고 부른 이 비이기적이며, 구원을 향한 관심은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그것에 의해 살아가셨던 정신이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경험에 깔려 있는 공통적인 문제점들을 배경으로 하여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을 예수님과 같은 훌륭한 태도로 발전시키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 사랑은 충동을 제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해결하는 데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 자신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개인적인 은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 개개인에게 방언과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탁월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끄러운 꽹과리와 같을 뿐이라는 겁니다.  우리들 개개인이 성령의 은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평가의 기준은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개인적인 성령의 은사들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심판의 빛 아래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은사가 필요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은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통한 모든 재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은 기록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그리스도인된 우리들에게 성령의 각양 은사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성령의 은사를 탁월하게 사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은사의 재능들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시험대를 거쳐야만 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영적인 은사가 어떻게 이해되고 사용되어야 하는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영적인 은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우리들이 얼마나 성령의 은사들을 탁월하게 사용하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들을 통하여 얼마나 사랑의 과업을 감당하고 있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원칙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은사에 적용시킨 후에 본문에서 이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사랑이란 온유하고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할 사랑은 온유하고 오래 참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이란 관계를 끊는데 오래 걸린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의 사랑을 뚝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뚝 끊어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끝까지 견디는 것이 진실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특별히 본문을 보면, 사랑의 오래 참음에 대해서 무척이나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4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7절에도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도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음이 세 번이나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동안 많이 참았습니까?  만약 안 참았다면 옛날에 진작 끝났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많이 참았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참아준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직도 참고 있습니까?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볼 때는 우리의 오래 참음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오래 참음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다른 것은 한 번만 쓰고 이것은 세 번이나 썼겠냐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것이 사랑의 중심인 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 인내란 시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시련이 없는 데 참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에게 괴로움이 오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시련과 환란이 올 때,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시련을 통해 나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할 수 없구나,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는 식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란 내게 닥친 시련과 역경을 통해 나 자신이 변화함으로써 내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의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너의 인내를 완성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성숙한 사람의 세 가지 모습은 첫째, 자기의 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말을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인내를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인내가 성숙의 3대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만큼 인내, 오래 참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숙해지지 않고, 인격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인내라는 단어의 그리스어 정의는 '즐겁게 참아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내란 좋은 결과를 바라고, 결과가 잘 되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도움으로 내가 잘 참고, 그 결과 내가 변하고 잘 되며 인격적으로 개발되어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 때문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또 다른 정의는 '내적인 힘으로 참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적인 힘은 내게 있기는 하지만 모자랍니다.  내적인 힘이란 믿는 사람의 가슴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 간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성령의 내적인 힘을 의지해서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인격적으로 점점 성숙해져서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즐겁게 감당해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이 참고 끝까지 견디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처음에 욥의 인격이 성숙해지지 않았을 때는 양 7천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양 1만 4천 마리를 받았습니다.  낙타 3천 마리가 없어졌으나 나중에 6천 마리가 생겼습니다.  황소가 5백 마리에서 천 마리로, 당나귀도 5백 마리에서 천 마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숫자적 개념이지만 인내란, 즉 자신의 변화란 마지막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성숙하게 만들고,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삶의 변화가 우리 자신과 가정에 축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참아요, 목사님이 참으라고 하셨잖아."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참아야 됩니다.  나의 말, 태도, 습관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 그에게 참으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만약 여러분이 가족들에게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고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상대방에게 참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참을 일이 없도록 나 자신의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 오래 참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내 아내, 내 남편, 내 부모, 내 자녀들의 가슴이 새까맣게 타지 않도록 나를 변화시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참아야 하는 쪽은 얼마나 힘든지,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인간인지라 참는 것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줄 알면서 왜 상대방이 그렇게 힘들게 참도록 만들어야 합니까?  그러므로 시간마다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고집, 내 주장으로 우리 식구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힘들게 참는 일이 없도록 나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길에 실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빠른 만족감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종교 심리학자인 피터 버거는 현대인들을 '빠른 만족감'을 구하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빠름과 편리함과 그것을 통해서 즐길 수 있는 즉각적인 만족들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집니다.  현대인들의 가정에 골동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물건들을 쉽게 사고 쉽게 버립니다.  때문에 오늘 현대인들은 참지를 못합니다.  순간적인 기분이 자신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래 참아야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참는 인생은 절대로 실수도 실패도 없습니다.  사랑이란 내 아이들, 내 형제와 자매가 그렇게 속을 썩여도 오래 견디고 나갑니다.  하나님은 그 생명의 마지막 때까지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온유하다는 말은 '오래 묵어 맛이 좋다'는 말과 '편리하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살기 위해서 온유한 것 이상 편리한 것이 없습니다.  강하게 사는 인생은 쉽게 지치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인생은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단순한 척도 이상입니다.  그것은 수단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어 최상의 상태에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조절해 최상의 것을 달성하게 합니다.  사랑의 빛이 우리 앞에 비취게 될 때 우리는 자아를 조절시켜 이기적이고 허영된 영역을 넘어서게 만듭니다.  이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만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 말한 이후에 우리들에게 사랑의 사람으로써 하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린도의 교인들 사이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말해 교인들 사이의 마찰은 무엇이었으며, 왜 분쟁은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까?  바울과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도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일부 교인들이 이기적이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파벌 뒤에 숨어 있는 잡음과 폭동의 요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식인들이 배움이 없는 자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훈련되지 못한 자아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중요성은 과장하고 타인의 중요성은 손상시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어떤 교인들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진리와 상반되게 죄를 계속 짓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이 어떤 이들을 자극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악용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자아 때문입니다.

예배에서의 행동이 왜 무질서하게 되었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완고해져서 마음의 거만함을 품게 된 것입니까?  해답은 명백합니다.  이기심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존재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삶을 제어하여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감독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곳에는 자아가 항상 감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7절까지의 본문은 사랑에 의해 갖추어진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투기의 원 뜻은 똑같은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하고 나하고 같은 대우, 같은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것이 투기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주님의 성숙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투기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례 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 세례 요한에게로 몰려왔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갑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한 마디 합니다.
"보세요.  당신을 찾아오던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에게로 갑니다"
이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은 이런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랑은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거짓된 자신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가식이 가식을 낳고 형식은 형식을 낳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가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나타내려는 것, 꾸미려고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사랑한다면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자기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점점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고 소리가 커지는 사람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시하지 않는 것, 확인할 필요도 없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아무 말씀도,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네 번째,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결코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자격증과 같습니다.  상대방의 과격함과 답답함과 반대 의견까지도 다툼이 없이 조화시킬 수 있는 재치와 수완은 그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기심은 지옥으로 가는 터널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분쟁은 이기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개인의 이기심, 집단의 이기심이 국가와 사회와 가정을 파괴합니다.  이 땅의 이기심을 불사르는 유일한 불이 바로 사랑의 불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이기심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기심의 불꽃을 사랑으로 잠재워버리십시오.

여섯 번째, 사랑은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성내는 것은 날카롭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내는 것은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이 들어가면 부드러워집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좋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이 식어지니까 날카로워지고 사나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긴장시킵니다.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성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맙니다.  우리는 백 가지를 잘하고서도 한 가지 성내는 것으로 전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곱 번째,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결코 따지지 않습니다.  따지다 보면 서로 얼굴이 붉혀지고 어느 한 쪽이 상처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따지지 마십시오.  계산을 못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원래 따지는 것은 회계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적은 돈은 따져서 벌지만 큰돈은 하나님이 안겨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모습에서 악한 모습이나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의 달을 시작하면서 오늘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됩니다.  혹시 여러분이 여러분 가정에 가시가 되어서 여러분 때문에 식구들이 눈물 흘리고 한숨 쉬고 혈압이 올라가는 일이 있습니까?  나의 좋지 못한 습관과 언어, 태도 때문에 내 가족들이 견디지 못하는 일이 혹시 있습니까?  나의 참지 못하는 성질 때문에 내 가족이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하지는 않나요?  깨닫고 뉘우치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오늘 이 아침에 이 가정의 달에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 하셔서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살피고 돌이키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변해서 가족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내 변화로 말미암아 내가 성숙해지고 내가 아름다워지고 좋은 인격을 형성해서 그로 인해 온 가족이 행복해지는 은총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공적인 가정 생활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 남편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아내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아이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있지 않으면 나 때문에 그 사람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변하면 됩니다.  내가 변해야 됩니다.  내가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꾸준히 추구할 때,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변화를 추구할 때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 가정은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 반드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내가 성장하고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모든 환경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모든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결국 모든 여건과 삶의 자리를 지배하고 맙니다.  내 속에 사랑의 농도가, 사랑의 깊이가, 사랑의 힘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내 생명이 건강한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덮어 주는 것으로 지붕을 만드는 것입니다.  덮은 것을 들추어내지 마십시오.  그러면 복잡해집니다.  지나간 과거를 들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랑 없음에 대한 행동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고 순수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사랑은 모든 욕심, 모든 낙심, 모든 미움을 덮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마디를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생명의 산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고 사람들과 아름답게 교제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여지고 행해진 사랑에 의하여 우리가 일치될 것과 교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보장됩니다.  우리 자신을 그 지혜로운 방법에 지금 내어 맡기도록 결단하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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