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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이를 영접하라 (신 6:4-9, 고전 13:9-13, 눅 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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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영접하라 (신명기 6:4-9, 고린도전서 13:9-13, 누가복음 9:46-48 )

1.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어린이를 영접하셔서 천국 시민의 표본으로 삼으시고 복을 주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 어린이들, 성도 여러분의 자녀들도 역시 영접하시고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어린이들, 특히 우리가 알기로 가난과 질병에서 고통당하는 북한의 어린이들과 이 땅의 수많은 불행한 어린이들에게 주께서 은총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하여 마지않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 본문을 누가복음서에서 택한 것은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누가가 특히 어린이, 여성들 등 소외계층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계수에도 들지 않았으리만큼 그 인격적으로 인정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누가가 남다르게 이런 계층의 사람들을 부각시킨 것은 그가 그만큼 주님의 뜻에 충실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니 하나님은 이방인인 그를 통하여 유대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증거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지구상의 인구폭발을 예상하면서 가장 무서운 재앙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이 지구상에는 어느 날 갑자기 종말이 올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에서 가족계획이라고 해서 산아제한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느니 “잘 기른 자녀 하나 열 자녀 못지않다”느니 하면서 극성스럽게 추진했습니다. 그러더니 최근에 와서는 반대로 출산장려책으로 회귀하여 출산하는 가정을 위하여 온갖 혜택을 베풀어주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농촌교회에는 아동부도, 학생회도, 청년회도 없습니다. 연세 많으신 어른들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이 별세하는 것만큼 교인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대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당회구역교회를 순행했는데 교인 다 해도 어른 15-6명인데 그래도 그 교회에는 다행히 어린이가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들이 폐쇄되고 교회학교에 어린이가 없는 이런 현실에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이 어린이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하겠습니까? “어린이를 영접하라”고 하지만 농촌에는 영접할 어린이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에 어린이들이 있고 교회학교가 왕성하게 운영되고 있는 이 한가지만으로도 우리는 무한히 감사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린이를 주신 하나님께 정말 눈물겨운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어린이들, 아니 나의 자녀들을 어떻게 주님의 훈계로 양육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2.  어느 빈민가의 어린소년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먹을 것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서 온통 뒤틀린 상태로 버려진 것을 보고 한 여성 사회사업가가 정형외과로 데려가서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런지 2년 후 그 소년은 그 사회사업가의 사무실로 찾아왔는데 목발도 없이 성한 다리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소년은 그 사이에 완치되었던 것입니다. 사회사업가인 그 여인은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그 소년을 와락 껴안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내 인생에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 아이에게는 진정한 도움을 주었구나.” 

  그러고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사회사업가인 그 여성이 이 이야기를 자기 동료들에게 들려  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쯤 그 소년은 어떻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동료들 가운데 어떤 이는 “선생님이 되었겠지요”하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이는 “당신에게 감동을 받아 사회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겠지요”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추측을 듣고 난 사회사업가인 그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흉악한 죄를 범하고 지금 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후회스럽게도 나는 그 아이의 다리는 고쳐 주어 걸을 수 있게 해주었으나 그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에게 그 성한 다리를 가지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한데다 자녀도 많아서 어린이들이 거의 버려진 상태로 자라났습니다. 그럴 때 교회는 그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당시 어두웠던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6.25전후해서는 전쟁 통에 부모 잃은 고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런 불행한 아이들 가운데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교육을 잘 받아서 이 나라 기둥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서 맨 먼저 한 일이 이런 불쌍한 어린이들을 모아 먹여주고 가르쳐 주면서 예수 믿게 하였고 그들이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합니까? 가정마다 자녀들이 하나 또는 둘 뿐이니까 문자 그대로 “금이야 옥이야”해서 하자는 대로 다 해줍니다. 옛날에는 가난해서 방치했는데 지금은 너무 귀해서 방치당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교회 교인들이 이만한데 왜 교회학교 학생수가 저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까? 과거 우리 교회 교회학교는 어디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모범적이었고 또 흥왕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의 신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꼭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절실한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혹 만의 일이라도 신앙이야 어른들 몫이고 너희들은 너희 좋을 대로 하라는 식은 아닙니까?

  아까 그 여성 사회사업가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다리는 걸을 수 있도록 고쳐주었으나 가야할 길을 가르치지 못했다는 한탄 말입니다. 요새 우리 자녀들은 먹고 입고 공부하고 하는데 지금 어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훌륭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위하는 일이라면 아끼지 않고 가리지 않고 배려해 줍니다. 저 빈민가의 소년의 다리를 고쳐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야할 바른 길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믿는 부모들이 자녀들의 신앙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단지 어른들 차지인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토록 어린이를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를 천국시민의 표본으로 삼으신 이 놀라운 사실조차도 애써 외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안동에서 저질러진 학생들의 성폭행 동영상”이라는 내용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흔히 뉴스를 통해서 비슷한 이야기들에 접하기는 했어도 그 엄청난 사건이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곳에서도 예사롭게 저질러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가야할 방향을 가르쳐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공범자들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흔히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판단은 정반대이십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이들이 우리 어른들을 천국으로 이끌어간다는 말씀입니다. 마18:3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돌이켜”라고 하는 말은 “회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주제가 “회개”인데 여기서는 “어린이로의 회개”를 제시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들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함께 우리가 어린이로 회개하는 일까지 함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오직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언이요,, 하박국 선지자가 재천명한 말씀이며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서 만천하에 밝힌 복음입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나 존 칼빈 그리고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 등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일관되게 내려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근본진리를 떠날 적이 많습니다. 중세기 가톨릭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우리도 개인적으로도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공적이나, 업적, 전통 등등 숱하게 자랑꺼리를 내세우는데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알에 세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나의 무엇을 보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너 왜 총회장도 못하고 왔느냐?” 그렇게 하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나의 겨자씨 같은 믿음을 소중하게 보십니다. 믿음을 능가할 수 있는 보배는 없습니다.

    이것을 어린이들에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사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물들은 태어나는 즉시 자기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하지만 사람은 공자가 “三十而立”이라했듯 하면 30년이나 지나야 비로소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모습 즉 절대적으로 부모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런 절대 신앙을 그들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라야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2)  우리는 흔히 어린이들을 백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우리 어른들이 그 백지 같은 어린이들에게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어른들 신앙의 모범과 또 자녀들에게 신앙의 길로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린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을 때 어린이들의 이 순수함을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우리 삶도 그래야 합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 한국 교회가 이 사회의 양심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는 말씀을 바꾸어서 “믿음 소망 사기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기니라”고 했겠습니까?

    복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 말고 인간의 어떤 공적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외치는 사이비 부흥사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인인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교인인척 하지만 밖에만 나가면 불신자 보다 못한 사람들이 주의 이름에 욕을 돌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되 믿음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교회를 혼란하게 만듭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삶의 순수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어린이같이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 어린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어린이라고 무시하는 일들이 없지 않아 많습니다. 교회 운영도 솔직하게 어른 중심이지 어린들이야 변두리 아닙니까? 이것도 주님께 책망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단지 나이가 어린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못한 사람은 다 소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모든 일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약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습니다. 강한 내 기준으로 처신합니다. 이래서 약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이 당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남을 무시했다가 천사에 의하여 하나님께 고발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옛날 이스라엘이 강자 바로에게 애굽에서 고난당하면서 한숨쉴 때 하나님께서 그 한숨 소리를 들으시고 바로와 애굽을 심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린이 주일을 당하여 여러분의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일깨우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안겨주십시오. 동시에 어린이 같이 되어 천국시민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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