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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9계명 : 진실한 이웃관계 (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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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계명 (출 20:16) - 진실한 이웃관계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계명이 최소한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고 실천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제9계명이 최소한 금지한 것은 법정에서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법정에서는 목격자의 증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확실한 증인 2명만 있으면 사형도 가능했습니다. 신명기는 이 법을 악용해서 거짓 증언할 경우에, 피의자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던 처벌을 거짓 증인이 대신 받도록 규정합니다(신 19:16-20). 실례로 아합 왕과 이세벨 황후가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했을 때, 그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왕상 21:1-19). 제9계명은 이처럼 이웃의 목숨과 재산을 합법적 권력을 악용해 탈취하는 일을 일차적으로 금합니다.

또한 제9계명은 법정에서뿐만 아니라 생활현장에서도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현장에서 거짓 증언으로 이웃에게 손해와 상처를 끼치는 일들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접촉 사고가 생겼을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이상한 처세술을 배운 사람들은 자기의 실수를 뻔히 알면서도 억지로 우깁니다. 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수다 떠는 곳에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돌아가며 험담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거짓말, 악평, 험담, 혹은 말의 뉘앙스를 살짝 바꾸어서 이웃의 평판을 나쁘게 만드는 일들이 모두 생활 속의 ‘거짓 증언’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이처럼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언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거짓 증언 중에서 이웃에게 가장 큰 해악을 주는 것이 거짓 교리를 말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단지 이웃의 소유에 손해를 입히고 이웃의 마음을 손상시키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웃의 영혼을 망하게 합니다. 많은 이단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말하여 영혼을 파괴했고, 지금도 파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선포하여 영혼을 망하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헌금와 헌신을 강요할 목적으로 교리를 왜곡하거는 일들은 사악한 일에 해당합니다. 은근히 뉘앙스를 풍기는 일도 결코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증을 가지고 농담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농담하는 일 역시 엄격하게 삼가야 할 일입니다.

제9계명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거짓을 통해서 사단이 역사하지 않도록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막 세워졌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교회를 속인 일이 있습니다. 소유를 팔고 나서 그 일부를 교회에 헌납했는데,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모든 소유를 바친 것처럼 꾸몄습니다. 이 일로 베드로 사도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지적하자 그 즉시 그의 목숨이 끊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행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교회 공동체가  진실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성도 상호간에 진실성을 깨뜨리는 일을 교회가 강력히 퇴치해야 할 사단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거짓은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사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거짓된 공동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괴되고 맙니다. 성도들 상호간에 거짓이 난무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운동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나 성도 개개인은 무엇보다 거짓됨이 없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거짓말’은 크게 고의적인 거짓말과 비고의적인 거짓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의적인 거짓말은 ‘진실성’이 부족한 것인데, 악심을 품거나 보복하려는 마음을 품은 거짓말입니다.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거나, 본인이 직접 거짓말 하지 않지만 상대방이 속도록 슬그머니 유도하거나, 진실을 숨기기 위해 고의적으로 침묵하는 아주 기술적인 거짓말도 있습니다. 비고의적인 거짓말은 ‘공정성’이나 ‘일관성’이 부족해서 생깁니다. 자기를 좀 더 옳게 보이려고 약간 과장하든지,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든지, 꼭 말해야 할 것을 빠뜨리거나 강조해야 할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공정성이 부족합니다. 충분히 관찰하고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채 경솔하게 판단하거나, 혹은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고 사건을 보는 관점이 그 때마다 달라지면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고의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에도 거짓말한 것과 같은 결과가 초래됩니다. 이 모두가 성도들의 언어생활에서 사라져야할 요소들입니다.

제9계명에는 다른 계명과는 달리 “네 이웃에 대하여”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성도가 한두 번 만나고 마는 사람들이 아니라 늘 함께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일까요? 아니면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이라는 평가일까요? 성도가 그 이웃에게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평가는 ‘진실한 사람’, ‘공정하고 일관성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입니다. 능력 있고 성공했더라도 머리를 잘 굴려 이득을 취하는 사람 혹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성도로서의 구별됨, 곧 성도의 거룩함은 이미 상실된 셈입니다. 목회자 역시 능력 있고 유능한 목회자라는 평가보다는 성도들과 이웃들로부터 진실하고 공정하고 일관성 있는 목회자라는 평가를 받을 때, 목회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16)는 계명은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좀 더 나아가면 성도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의 이웃까지도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야 마땅하다는 이웃 사랑의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정에는 가풍이 있고, 동네마다 동네 분위기가 있습니다. 모이기만 하면 남을 헐뜯고 흉보는 가풍을 가진 집안이 있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면서 도울 일을 찾는 집안이 있습니다. 온통 깡패 같은 아이들로 넘치는 동네가 있는가하면 인심 좋은 동네가 있습니다. 기업들도 각자 독특한 분위기를 가졌고, 민족에게는 민족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웃에게 제대로 영향력을 미쳤다면, 그가 속한 공동체는 점차 진실성과 공정성과 일관성이 많아지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성서계명교회는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또 10년쯤 후에는 어떤 분위기를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할까를 생각해봅니다. 저는 화려하게 성공한 교회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 없이 바르게 가르쳐지는 교회, 성도들 상호간에 진실한 사랑과 섬김이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접하게 되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가진 진실함과 공정함과 일관성이 나누어져서 자연스럽게 이웃교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이 일에 있어서 목회자인 저의 책임이 가장 막중하다고 생각됩니다. 동시에 성도님들의 헌신적인 동참이 있을 때 이룰 수 있는 꿈일 것입니다. 사회정의라도 이처럼 진실한 성도들이 점점 많아짐으로서만 이룩될 수 있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편 감싸주기보다 더 중요한 일은 진실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편에 서야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 겪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잠언 16:32b절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개인의 감정이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 또는 물질의 유혹이나 성공보다 마음을 지키는 일이 더 가치있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무섭고 사단적인 것이 성도의 병든 마음과 죽어버린 목회자의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25절은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명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거짓말해야만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극단적인 경우가 가끔 있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히브리 산파들과 기생 라합이 거짓말로 생명을 살렸습니다(출 1장, 수 2장). 아브라함은 무법천지의 이방인들이 무서워서 아내를 누이라 말했는데(창 20장), 이는 반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긍휼이었지 거짓말 때문에 복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거짓말 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거짓말할지 모릅니다. 받기 싫은 전화가 왔을 때, ‘없다고 해라’고 말하는 것이 피차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거짓말을 삶의 지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예의상의 거짓말도 점차 마음에서 우러난 표현이 되도록 일치시켜 나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불가피한 거짓말을 정당화하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진리를 지혜롭게 말하는 법을 익히고자 힘써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 방법이 어리석거나 무례해서 상대방을 노엽게 만들지 않도록 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으로 만연한 사회 속에서 진실하게 살려면 그냥 기분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손해를 볼지라도 진리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손해 볼 일은 하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으로는 이웃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좋은 영향을 미치기가 불가능합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하면 오히려 공평성을 잃고 자기를 두둔하기 쉽고, 당파주의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제9계명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서부터 손해를 감수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평상시의 연습과 연단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본래 진리에 기초를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웃관계도 마땅히 거짓이 아닌 진실함에 기초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이웃까지도 진실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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