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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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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루살렘을 가실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기록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것을 기념해서 종려주일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뜻은 고난을 당하기 위해 가신다고 자신이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 이후 내일부터 일주일은 고난주간으로 연결되어 지내게 됩니다. 주님이 행하라 명령하신 이 성찬을 받는 것으로 고난주간 한 주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성찬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실 때는 자신의 사명의 마지막 시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모든 설교의 초점은 종말론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는 것이라는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를 하셨고, 바울 신학에서도 똑같이 성도의 생활 철학을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불멸의 진리를 조명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께서 자신이 사는 모습을 단면적으로 나타내는 유명한 한마디를 남겼는데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에서 오늘 사도 바울이 남긴 이 말씀의 의미가 성찬과 함께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시카고 대학의 정신의학 교수 엘리자베스 퀴플러 로스 박사는 다시는 의학적으로 소생할 길이 없는 죽음을 앞둔 수백 명을 상대로 연구를 해서 자기 논문을 신문에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사회에서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들의 판단이 내려진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마음을 갖게 될 것인가? 다섯 가지 순서라고 발표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절대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항상 다른 사람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로 온다는 생각은 하기도 싫은 것이 첫째 반응으로 가장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의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분노! ‘내가 왜 죽어야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아직 젊고 할 일이 많고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는데 왜 벌써 죽어야 돼?’ 그래서 굉장한 분노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세 번째는 마음이 좀 누그러지면서 타협을 한다고 합니다.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어떠한 방법이든지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 길과 타협할 수 있겠다!’ 그래서 최대한의 모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의 시간은 다가왔습니다. 그때는 할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체념의 순서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체념하고 나니까 마지막 단계가 오는데 내세를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어떤 세계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길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다섯 가지 단계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에서도 병원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365일 병원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병원 선교는 할 만합니다. 아주 효과가 큽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임종 환자를 담당하던 처녀 간호사 한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사람을 보면서, 매일같이 똑같은 일을 계속하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죽음이라는 똑같은 사건 앞에 그것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왜 다르게 나타날까?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그렇게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초연히 받아들이고 마지막에 가장 선하고 편안한 말을 남기면서 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모든 환자들의 종교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초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결론이 내렸습니다.

그녀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초월적 힘의 내재가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교회에 나갔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영생의 진리에 심취해 자기가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신학 연구가가 되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유학을 하고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칼바르트 신학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나는 내 평생을 통해서 이 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에 몸을 바치겠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가르치시는데 저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마라나타 커뮤니티’라고 했습니다.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한 가지 목적을 향하여 다 같이 가고 있는 공동체이다.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데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그 거룩하고 선한 한 가지 목표로 다함께 순례의 길을 떠나는 그것이 교회이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정의합니다.

한 유능한 젊은이가 자기 인생에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세 가지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하나는 일평생 가장 좋은 보상과 안정이 약속되는 국가 권위적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아주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고시만 통과하면 평생이 보장되는 그 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행복한 생활을 일생동안 보장받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치러놓고 합격 통지서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상속자가 없는 삼촌의 막대한 재산권이 유언장 없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가장 가까운 혈육인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법적 투쟁을 지루하게 했는데 지금 그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당대 최고 미인으로 알려진 인정받는 처녀에게 구혼장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 세 가지만 이루어지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권위 있고 보장받는 행복한 삶을 일평생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세 가지 소원이 하루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흥분된 기분으로 국가고시 합격 증서를 손에 들고 또 한 손에는 재산 상속권 인정 판결문을 손에 쥐고 너무나 흥분해서 결혼을 약속한 아가씨를 만나려고 신이 나서 길을 달려가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길에 쓰러졌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자기 앞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한분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했습니다. “젊은이! 무엇을 했기에 젊은이 몸이 이토록 망가졌소? 내가 가진 의학 상식으로 당신은 더 이상 살기 힘들게 되었소.” 장미꽃 한 송이를 그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제가 한국 병원에서 한 번도 그런 광경은 못 봤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는 자주 제가 본 것이 담당 의사가 자기 판단으로 절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환자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암시적으로 줍니다. 그러면 이 환자는 그 꽃을 받아들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아! 담당의사가 마지막을 나한테 선물하는 꽃은 죽음이다.’ 미국의사들은 많이 합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 심방을 가서도 여러 번 본 광경입니다. 젊은 환자는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금 이러한 시간에 할 일을 가르쳐주실 분이 이 병원에 있습니다. 신부님도 계시고 목사님도 계시니까 만나세요.”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안 죽어요. 영원히 살아요. 당신이 이렇게 몸이 망가지도록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얻고 싶어 했던 그 세 가지 조건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어요. 당신이 그러한 행복한 초대에 응답만 하시면 됩니다. 지금 당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영세를 받으십시오.” 그 다음에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당신은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가야 합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영생의 자리로 가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스러운 시간을 영원히 보내게 되는 형벌의 장소로 가던가 이 둘 중에 하나만이 있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택의 권한은 지금 당신에게 있어요. 지금 세례를 받으시고 주님의 생명 불멸의 진리를 받아들이세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병원에 영적 근무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신 물리학의 창시자 페히너(Fechner)씨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일평생 연구한 정신물리학 논문의 마지막 결론을 지금 발표하겠습니다.

인생은 세 가지 단계를 삽니다. 첫 번째 단계! 잠만 잡니다. 어머니 뱃속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자다가 깨고 깨다가 자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사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영원히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단계! 하늘나라입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내 정신물리학의 결론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고백한 의미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게 무슨 뜻인가?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오늘이라고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 족하니라. 네가 무슨 능력으로 내일을 보자고 하겠느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종말론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이 문제는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 절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 바울의 말을 보세요. “자랑삼아서” 그런 단어가 나오죠? 이것은 희망에 벅찬 감격 선언입니다. 이 날 하루가 나의 최종의 날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나는 오늘 죽을 것입니다. 만약 오늘 안 죽으면 내일 죽을 것입니다.” 절망 선언이 아니라 희망 선언입니다. “나의 자랑을 두고 명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자랑입니다.

이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순교적 삶입니다. 자, 우리가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 속에서 평생을 살지 않습니까?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하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살면 날마다 죽어야 됩니다. 수없이 죽어야 됩니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 마라나타 커뮤니티! 즉, “죽으러 오는 곳이다.” 이것이 우리가 섬기러 오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어제도 죽도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어 날마다 죽는 것이 우리 십자가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고집 부릴 것 다 부리고 자존심 세울 것 다 세우고 명예나 체면 얻고 싶은 것 다 얻고 싸울 것 다 싸우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헌신의 서열은 날마다 꼴찌에다 두고 이러면 십자가는 뭡니까? 누릴 것 다 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내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 차이도 없는 생활을 하면서 말로는 십자가를 진다고 항상 그러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 부분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 죽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날마다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격 선언으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죽기 위해서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패러독스 선언을 한 것입니다. 다같이 주님의 죽으심을 나도 죽겠다는 결심으로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주님의 식탁에 초대를 받아 성찬대를 앞에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살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원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이것이 죽는 부분입니다. 나는 무엇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룰 것인가? 그래서 바울은 나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죽어야 된다고 감격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세 번째 의미는 이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특징이 있는 성경입니다. 부활장입니다. 15장 전체가 인간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영생과 부활의 약속입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이 죽음의 철학과 신앙은 결국 뭡니까? “나는 날마다 산다.”입니다. 패러독스로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계산대로 한다면 “우리는 죽는 것 같지만 삽니다. 미련한 자 같으나 지혜로운 자요 가장 확실한 인생의 투자는 죽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선물이 영생으로 주어지는 진리!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삶의 목표를 두고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대로 삶의 장소도 옮기고 사역의 종류도 옮겨가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사는 삶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참 이상하리만치 날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한두 번도 아니고 참 여러 번, 특별히 부흥회를 가면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이럴 정도로 이상한 말을 듣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저는 부산에 가서 부흥회 인도하고 왔는데 똑같습니다. 맨 앞자리에 할머니 한 분이 앉으셨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건에 눈물을 닦으시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으시는지 모릅니다. 시간마다 제일 먼저 나오시고 제일 앞에 앉으셔서 하얀 손수건이 다 젖도록 하염없이 나를 쳐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겁니다. 이 할머니가 너무 은혜를 받으시니까 저는 이 할머니만 바라보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마지막 설교를 다 끝내고 이제 나와야 됩니다.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인사하고 부흥회 잘 하셨다고 박수 받고 이제 강대상에서 내려가는데 그 할머니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겁니다. ‘아! 이 할머니, 은혜 많이 받은 할머니! 나한테 인사하러 오시는구나!’ 내 손을 붙잡고 놓지도 않으십니다. 눈물을 내 손등에 떨어뜨리면서 하시는 말씀! “목사님은 죽은 우리 영감하고 목소리까지 똑같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할머니 생각을 압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이 벌써 싫어진 겁니다. 임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만 생각하고 사는 겁니다. ‘나도 빨리 죽어서 임이 계신 그 나라에 가서 이런 외롭고 이런 쓸쓸한 세상이 아닌 영원한 주님이 주신 평안의 세계에 우리 님이 있는 그곳에 가서 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그분의 머릿속에 비슷한 것만 봐도 영감같이 생각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다.” 맞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이제 우리는 이 성찬의 떡과 잔을 주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살게 된 진리로 받고자 합니다. 어느 때나 똑같이 이 성찬을 받기에 내 영혼이 깨끗함 같이 내가 해보면 너무나도 퇴락한 나의 부끄러운 손이 주님의 피와 살을 받아들기에 괴로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 괴로운 양심의 소리와 떨리는 부끄러운 손이 오히려 주님이 원하시는 겸손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에 남이 모르는 불빛 하나와 한 자락의 어두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품고 있는 어두움의 한 자락이 때가 되면 오히려 환한 불빛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사람들은 누구나 남모르는 용서받아야 할 한 가지 일과 한 방울의 눈물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역사가 지나면 그것 때문에 내 영혼이 맑아지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모두 그렇게 주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베풀어주신 식탁에 저희들이 오늘 거룩한 초대자가 되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끄러운 손을 내밀어 주님의 살과 떡에, 그리고 잔에 참여하겠습니다. 주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모두의 마음을 성령의 임재를 주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가 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바울 사도와 같이 날마다 죽는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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