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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영생의 소망 (요 3;16, 딛 1:1-4,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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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1:1-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3:4-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오늘 어버이 주일에, “영생”과 “소망”에 대하여 설교할 수 있게 되어 참 감사하고 기쁜 마음입니다. 이런 영광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 곧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기도와 땀과 눈물을 보시고, 크신 은혜로 갚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함으로써 부모님들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크신 사랑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제로 주신 것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소망”입니다.
기다려지는 기쁨입니다.
살아가면 갈수록 내일에 무게가 실리는, 그런 은혜요 기쁨입니다.

지난날의 실수와 과오, 고통과 슬픔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누구나 실패하면서 성장합니다.
누구나 실수합니다.
문제는 거기에 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유명한 CEO인 루 거스너는 실패한 팀원들에게 “이번 실패는 당신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불한 투자”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실패하여 눈물 흘리는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일어나라!” 하십니다. 똑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는 한, 우리는 실패를 통하여 귀중한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오히려 우리를 맹훈련시킨 훈련소입니다. 아이들은 수많은 실패를 통해 걷습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 과정을 통해 맹훈련시킵니다.

창세기 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에서, “운행하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라하프”입니다. 바로 독수리가 새끼를 업고 날아가는 데 쓰인 동사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창조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때로 어려운 일도 주심을 잊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소망이 있는 사람만 과거의 사슬에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죄로 물든 과거의 끈을 끊어버림으로써 주님께서는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가정은 영생을 소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있는 그것으로 그때마다 변동한다면, 평안이 없습니다.
영원한 삶이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2.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3.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것은 우리를 살리시려는 목적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죄를 꼬투리 잡고,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떤 유명한 대학의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방금 졸업식 촬영을 끝낸 어떤 젊은이에게 노신사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자네의 졸업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이제 진로가 어떻게 되는가?”
      “법대로 진학할 예정입니다.”
      “그래. 잘 되었군. 축하하네! 그리고 무엇을 할 셈인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변호사가 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결혼을 하겠습니다. 저는 예쁘고 키가 크며 총명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커다란 법률회사를 세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러고 나서는?”
      “멋있는 휴양지에 별장 하나를 짓겠습니다. 내가 설계를 대략 해 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실을 크고 화려하게 꾸밀 생각입니다.”
      “아이들 대학을 보내고, 결혼을 시킬 생각입니다.”
      “아, 저는 60세가 되면 정년 은퇴할 것입니다. 아내와 함께 세계여행을 할 생각이거든요.”
      “그래. 좋아. 세계여행을 마치면?”
      “그래요. 늙으면 아마 여기저기 다니는 것도 지치게 될 겁니다. 경치 좋은 별장에서 편히 쉬면서 여생을 보내려구요!”
      “그 후에는?”
      “.... 결국, 죽겠지요? 내 장례식 때는 조문객이 많이 올 겁니다.”
      “그 후에는?”
      “뭐가 있겠습까? 그걸로 끝이겠지요. 끝!”
      “아닐세. 그 다음에는 영원이야! 영원!” 

20년 후, 바로 그 대학에서는 커다란 신축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학생회관인데, 그 입구에는 이런 글이 돌에 새겨져서 높이 박혔습니다. 누구나 눈에 잘 띄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리고는 영원이야! 영원!”
바로 그 대학을 졸업했던 청년이 사업가가 되어 후배들에게 학생회관 건물을 기증한 것입니다. 학교 다니면서 “영원”을 생각하고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영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시간의 세계’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흙으로 만드시고 우리 코에 불어 넣어주신 영혼은 영원합니다. 우리 육신이 땅에 묻히더라도, 우리의 영은 영원합니다. 영원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나팔소리와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땅에 묻힌 육신이 부활하여 영원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영원의 세계는 그러면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을 살아갑니다. 그 ‘징조’가 있습니다.
바로 “영원의 소망”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이 소망이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도 확연히 다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삶의 차이는 “명백”(明白)합니다. 한밤에 불을 보듯이 분명(分明)합니다.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의 소망은 “죽음 이후의 일”로서, “죽음 이후에나 알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일”로서, “오늘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매일매일 느끼고 경험하는 일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바로 오늘, 여기서 날마다 행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디모데 외에 믿음의 아들 디도가 있었습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1:4)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디모데만큼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머니 쪽이 유대인이었지만, 디도는 부모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디도는 참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디도는 크레테(Crete) 출신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레데는 그리스와 터키 아래쪽에 자리 잡은 섬입니다. 이 섬에 뵈닉스(Phoenix), 미항, 라새아 등의 항구가 유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타고 로마로 가던 배가 여기서 출발해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디도서>는 크레데에서 목회하는 그 디도에게 바로 이 “영생의 소망”을 가르치기 위해 보낸 짧은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를 그레데(Crete)에 남겨두었습니다. 여러 가지 잘못된 가르침과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의 신앙을 반석 위에 굳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장로’와 ‘감독’을 세우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또, 모든 평신도들을 가르치되,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 종들, 각각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의 소망”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에 합당한 구체적인 내용이 이 짧은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일곱 가지로 나누었는데,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감독.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않고, 화를 급하게 내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고
장로.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교육에 성공한 자
늙은 남자.      절제하고
늙은 여자.      행실 거룩. 모함하지 말고, 선한 자들을 가르치는 자.
젊은 여자.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 남편에게 복종.
젊은 남자.      신중.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종들. 순종.      거슬러 말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여기 사도 바울이 지적한 “공공의 적”이 있습니다. 
1. 불순종하고, 2. 헛된 말을 하며, 3.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서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1:10-11).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For there are many rebellious people, mere talkers and deceivers, especially those of the circumcision group.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They must be silenced, because they are ruining whole households by teaching things they ought not to teach--and that for the sake of dishonest gain.

입을 막으라는 말은, 듣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편지 <디도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Paul, a servant of God and an apostle of Jesus Christ for the faith of God's elect and the knowledge of the truth that leads to godliness--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a faith and knowledge resting on the hope of eternal life, which God, who does not lie, promised before the beginning of time,

이제 바로 이 “영생의 소망”이 무엇인지, 요한복음 3장을 통해 좀 더 밝혀 보려고 합니다.

유대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두 번 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몸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거듭남의 비밀을 묻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난 사람이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신선한 기대’요 ‘멋진 미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아울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들려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거듭남은 “십자가 사건”으로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가르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거듭나고, 그로써 “영생”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중생(重生)의 은총이 ‘영생’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이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입니다.

1.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관심하신 것도 아닙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되어진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가 절망할 이유가 있다. 있어도 아주 많다!”고 주장합니다.
      햇볕이 너무 뜨겁다고 말합니다.
      물이 너무 맑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돈 벌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합니다.

생각의 차이입니다.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각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세상을 보니, 소망을 가질 이유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악한 사람도 있지만, 착하고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고통도 있지만, 그래서 기쁨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고 감사합니다.
      아픔을 겪었지만, 그래서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영혼”이 결정합니다.

      1. 사람의 행동은 생각에 따른다.
      2. 생각은 믿음에 따른다.
      3. 믿음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에 따른다.

오늘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릅니다.” 누구도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독특한 ‘소망’을 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23세의 버지니아 청년이 그 생각을 바꾸었더라면, 그의 배경이 참 좋은 일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2.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역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3.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세상 누구나(!) 예수님만 믿으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잠간 살다가 죽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함이셨습니다.
      1. 예수님을 믿으면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얻습니다.
      2.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르심 받은 것은 곧 이 “영생의 소망”을 위함입니다.


영생의 소망은 “빛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4-5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이미 어둠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어둠과 빛에 거하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둠에 속한 사람은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넘어질까, 어디 부딪치지 않을까, 염려와 걱정으로 차 있습니다.
불안하고, 불길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보다 무섭습니다.
한밤중에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동물보다 오히려 무섭습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1.
실패의 예측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예측은 점쟁이보다 더 잘 맞습니다.

      나는 내가 실패할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망할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아플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인간관계가 끊어질 줄 알고 있었다.

이런 실패의 예측은 그가 “어둠의 자식”이라는 점과 관계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의 길을 간다면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셈입니다.

캄캄한 데 걷는 사람이 “불안감”을 버리지 못하고, 그 불안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이 대단히 강합니다.


2.
편견을 버리지 않고 강화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편견은 변화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수가성을 통과하셨습니다. 거기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인종의 편견, 지역의 편견, 혈액형의 편견, 이런 것들은 어둠 가운에 거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3.
영원이 아니라 “순간”에 따라 살아갑니다.
기분파입니다. 그때그때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패감도 승리감도 모두 “순간”에 달렸습니다.
실패했을 때 좌절합니다. 성공했을 때 우쭐합니다.
정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 안에 사는 사람은 빛의 사람입니다. 빛에 거합니다.

1.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건강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예측은 “성공의 예측”입니다.

      나는 내가 성공할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잘될 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그건 “어둠의 자리”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대신 확신이 있습니다. 왭니까? ‘주님께서 내 손 잡으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또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어떤 일을 주실까?’ 기대가 큽니다.

2.
모든 사람이 친구입니다. 원수가 없습니다.
원수가 있어도 기도합니다. 그래서 친구로 바꿉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까? 가장 먼저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원수가 친구로 변하는 것입니다.

누가 성공했다고 할 때,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열매”로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자세”가 다릅니다.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친구”로 이해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친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안전합니다.
평안합니다.

이런 삶이 계속되면 “천국행”입니다.

3.
영원을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영원한 삶을 살아갑니다.
“길게 보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실패가 언제까지고 계속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無限)합니다.
모세가 든 “광야의 놋뱀”처럼, 누구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의 길이 이렇게 쉽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흔한 것’입니다. 얻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그렇게 손쉬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악해서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아내의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귀합니다. 만일 그것이 길거리 돌처럼 흔하다면, 사람들이 그처럼 소중하게 여기겠습니까? 다이아몬드로 집을 지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배가 몹시 고플 때 국에 넣어 끓여 먹을 수 있겠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귀한 것은 공기입니다.
가장 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산소호흡을 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 중에 한 시간을 살아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물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그냥 물을 마셨습니다. 지금은 물 값이 기름 값만큼 비싸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말만하면 다 갖다 줍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시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아내의 사랑도 함부로 여길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믿기는 정말 쉽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고개를 들어 보기만 하면 낫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뱀을 쳐다보았을까요? 혹시 “너무 쉬워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지나 않았을까요?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왔을 때, 그는 나가보지도 않고 종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했습니다. 그때 나아만은 화를 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그 과정이 “복잡”할 줄 알았습니다. 직접 엘리사가 나와서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손을 상처 위에 흔들며 몸에 안수기도 하면서 기도해서 고쳐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요단강에서 목욕하라니! 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라?”

사람은 과정이 복잡하면 결과도 좋을 줄 믿습니다.
어떤 백화점에서 실수로 핸드백에 ‘0’을 하나 더 써 넣었답니다. 그랬더니 소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했습니다.

죄의 현실을 절감하는 사람들은 그의 죄가 그저 “믿기만”함으로써 사해진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뭔가 더 복잡하고 힘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귀한 것이 흔하듯, 소중한 구원의 길은 그리 험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길은 “오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은혜의 길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본래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험한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을 용이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값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영생의 소망.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것을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찬양하는 무리들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 친구들 중에 있습니다.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룻(Ruth) 이야기

어머니의 하나님, 어머니의 백성

나오미는 룻을 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보아스와 룻에게서 오벳이 태어났고, 오벳은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 나오미를 조명(照明)해 봅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그는 기도 속에서 “영원”을 품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압으로 이민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둘째 며느리만 데리고 이스라엘로 역이민 한 그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떨어진 곡식을 주워다가 빻아서 밥을 해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오미와 룻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것은 “거듭남” 곧 “중생”의 문제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어떻게 채워 주시나?
기대하는 하루하루입니다.

거듭남은 “날마다 새로운 삶”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2. 그 사랑의 결정적인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3.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가정과 어버이를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로 열매를 거두신 그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그분들의 기도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하루하루를 말씀과 기도로 살아갑니다.

기도 Prayer 

생명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오늘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저희들의 삶을 “영원한 소망”으로 이끄심을 믿습니다. 영원이 아니라 순간을 바라보고 살아간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참된 소망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부모님들의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자녀들의 내일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여, 저희들의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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