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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양육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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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그런데 90년 전만 해도 “어린이”라는, 이 좋은 말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어린 것, 소아’이런 정도였다. 보통은 ‘애 새 끼’가 일반적인 통칭이었다. 그런데 1921년 일본 유학생인 방정환 선생님이 “어리신 분”의 ‘어리신’을 줄여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2년 어린이날을 재정하자고 선언했다. 23년에는 어린이잡지 “어린이”를 창간함으로써 어린이를 새롭게 발견하려는 운동을 펼쳤다. 방정환 선생님은 90년 전, 일제 강점기에 이런 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2천 년 전 로마 시대에, 어린이를 향한 놀라운 선언을 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말씀은 로마시대에 주어진 말씀이다. 로마시대엔 “Patria potestas”라는 ‘아버지의 법’이 있었다. 로마 시민권자는 자기 자녀에게, 절대권이 있었다. 자녀를 버릴 수도 있었고, 노예로 팔아 버릴 수도 있었다.

  자녀 교육이라는 명분아래, 채찍질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혁명적인 선언을 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로마의 법이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로 양육하라.”

  성경은 자녀문제를 말할 때, 항상 ‘아비들아!’라고 했다. 그 이유는 대표성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라고 불려 지기를 대단히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라 불리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6:9)라고 가르쳐 주셨다.

  (갈4:6) 우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가운데 보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버지라는 호칭을 우리에게 주셨다. 따라서 자녀들이 우리를 아빠, 또는 아버지라고 부를 때,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기 원하나? 김승연 회장처럼, 자기 아들을 폭행한 자들을 보복해주는 힘 있는 아버지인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소원은, 믿음을 자손 대대로 전수시켜야 한다. 자녀에게 부동산을 물려줌보다, 많은 돈을 물려줌보다, 믿음을 물려줌이 더 중요하다.

  미국 상원의원 ‘리처드 하버슨’은, 아들의 친구들이 집에 와서 놀고 있었는데, 이야기 주제가 아버지였다. 어떤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하고 잘 안다. 어제도 시장하고 골프치고 왔어.”라고 말하자, 그 옆에 있는 아이는 “그래 우리 아버지는 장관하고 잘 안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서로 자기 아버지가 유명 인사를 잘 안다고, 경쟁하듯 자랑이 이어졌다. 이때 하버슨의 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하고 잘 안다. 어제도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야기를 하셨어!”라고 하자, 아버지 경쟁이 끝나고 말았다.

  이 말을 듣고 하버슨은 서재로 들어가, 하나님께 눈물 콧물 흘리며, 아들을 믿음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했다고 한다. 아이가 믿음으로 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그대로 보고 경험하게 되었다.

  부모는 자녀를 잘 양육하고 싶지만, 양육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 오히려 자녀들을 세워주지 못하고,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다. 폭언하고, 매질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르치지 못해, 자녀들이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자식을 낳았다고, 모두 부모가 아니다.

  하나님께 아버지 마음을 받아야, 올바른 부모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하나?

1.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말은, 동등한 인격자로 대하지 않고, 부당하게 부모의 힘이나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다. 그래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말이나 힘으로 누르려고 하기에, 의사소통이 단절된다.

  상대방에게 나의 생각을 전하는데는, ‘나 전달법(I Message)과 너 전달법(You Message)’이 있다. 나 전달법은 나를 중심으로 표현하는 말이고, 너 전달법은 너를 중심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내용은 같아도, 반응은 전혀 다르다. 나 전달법과 너 전달법의 차이는 이렇다.

  너는 어찌 그러냐는 책망의 말이 너 전달법이고, 자신의 마음을 전할 때 나 전달법이 된다.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말하는 것은, You 메시지이다. 이것을 “엄마는 네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볼 때, 제일 기쁘다”고 I 메시지로 바꿔야 한다.

  나 전달법을 많이 쓰는 사람이 가정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가 대화가 안되고, 노사협상이 힘들고, 여야간에 폭력이 난무하고, 부부간, 부자지간에 단절되어 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언어습관에 그 원인이 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이렇게 해라” 등 “You Message” 중심의 언어만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서구 사회는, 언어 자체는 ‘I 메시지’ 중심으로 되어 있다. I 메시지가 생활화되어 있다. 

  스테판 폴터의 ‘아버지’라는 책이 있다. 24년 동안 가족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성공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성장환경에 차이가 많다”며,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자녀의 인관 관계는 물론, 성공까지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하였다. 그는 5가지 유형을 소개하고 있다. 

① 목적 지향적 아버지

이런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미달하면 아주 혹독한 체벌을 가하는데, 자녀들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쉽게 가질 수 없다.

  목적 지향적인 아버지를 둔 자녀의 고백은, 자신은 재주가 많아도, 한번도 정말 성공했다고 느끼거나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비판적이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했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에게 똑 같이 대하고 있기에, 불행하다고 했다.

② 시한 폭탄형 아버지

분노를 쉽게 하고, 감정을 시도 때도 없이 터뜨리는 아버지들로,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해한다. 혼란과 두려움을 갖게 되고, 주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시한 폭탄형 아버지를 둔 딸의 고백은, 자신은 아버지의 성질에 겁먹은 채, 성장해왔으며 그래서 항상 아버지와 갈등이 생김을 피해왔다고 전한다. 그로 인해 화내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직장 생활을 원만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상사가 불합리한 구실로 자신을 짓밟아도, 그냥 참고 견뎌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갈등과 직면함을 아주 싫다며, 남과 싸우는 건 질색이라고 고백을 했다.

③ 수동형 아버지

무관심하며 감정적으로 자녀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대인 관계에 소극적이며 외부와 정서적인 유대감을 갖기 쉽지 않다. 방임형이다.

  수동형 아버지를 둔 딸의 고백은 이렇다. 그녀의 기억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귀가하면, 곧장 거실 소파로 가서, 저녁 내내 소파에 앉아 TV를 보거나, 신문을 보았다. 가족들은 항상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죽었거나 자고 있을 거라고 농담가지 했을 정도다.

  그녀는 항상 아버지에게, 더 많은 보호와 관심을 받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전했다.

④ 부재형 아버지

수동형 아버지와 비슷하다. 다른 점은 자녀와 적극적인 거리를 두어, 실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녀와 함께 하지 않는다. 자신의 혼란스럽고 어려운 삶의 처지 때문에 그렇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깊은 상실감에 빠져들게 되며, 심지어 버림받은 느낌이나 거부당한 경험을 느끼게 한다. 이런 아버지를 둔 딸의 고백은, 자신의 아버지는 사무실에 처박혀 지내거나, 집에 돌아오셔서 신문의 경제난에 얼굴을 파묻고 지내셨단다.

  자신은 전혀 아버지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아버지가 엄마와 이혼했을 때, 당시 일곱 살이었는데, 마치 아버지가 자신과 이혼함과 같았다는 정신적 상처를 드러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자신이 아버지의 짐 같은 존재라고 여겼다고 한다.

⑤ 멘토형 아버지

앞선 2가지 타입의 아버지들보다,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가장 바람직한 아버지 유형으로 미국 가정 전체의 10% 수준이라고 전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 보다 낮은 수치로 예측된다. 

  자녀와 늘 함께 있으며, 자주 대화하며, 자녀들은 정서적 안정감과 자긍심을 갖게 되고 아버지와 공감하는 한편, 자신의 삶에 일관성도 지니게 된다. 이런 아버지는 권위가 있으면서, 자녀를 넉넉히 배려할 줄 안단다.

  멘토형 아버지를 둔 아들의 고백은, 아버지는 항상 어떻게 하든, 자신이 중요하고 사랑 받는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더 좋게 느끼도록 하는 법을 알고 계셨다. 따라서 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을 큰 행운으로 여겨왔고, 지금도 아버지의 든든한 지지를 의지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2.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

교양(παιδεία)은 바르게 훈련함(train)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이유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가문을 잇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의 출생과 유지를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당연히 성도의 가정을 통해서 보내시기에, 우리 부모들이 선택되었다.

  우리에게 그냥 하숙생이나 손님으로 보내서는, 제대로 양육이 될 수 없음을 아시고, 누구나 자기 자식은, 귀하고 사랑스럽기에,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시고, 우리에게 자녀를 맡기셨다. 따라서 나의 철학이나 야망,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바른 훈련 방법을 따라야 한다.

  옛날 영화배우 남궁원 장로님을 아시나요? 이분의 아들이 미국 하버드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홍종욱 씨인데, 얼마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나요? 홍종욱 씨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쟁쟁한 백인 천재들을 다 제치고, 3개의 상을 휩쓸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의 어머니 양춘자 권사님 때문이다.

  그는 홍종욱을 비롯한 세 아이에게, 단 한번도 과외 공부를 시킨 적이 없다고 한다. 과외공부를 시킨 적이 있다면, 오직 성경 과외만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 말씀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침저녁,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행할 때든지 부지런히 가르쳤다.

  나중에 아이들이 크자, 자기 실력으로는 성경 지식이 달려서, 전도사님과 부목사님을 모셔다가 성경을 가르쳤다. 흥미로운 성경 이야기들을 사건 중심, 인물 중심, 하나님 중심 등으로 가르쳐주니까 아이들의 믿음이 좋아짐은 물론, 삶의 목적을 알고, 상상력도 커가고, 공부도 항상 1등 하더란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얼마나 자녀들에게 말씀공부를 시켰는가? 얼마나 말씀을 강론하고 암송 교육을 했는가? 목사인 저 자신도,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성경 과외를 시킬 정도로 자녀들이 말씀에 집중하도록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 위대한 일꾼, 큰 지도자가 된다.

  하나님의 방법이, 가장 완전하다. 우리 아이가 왜 태어났는지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 우리 아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장점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 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서 양육하라고 했다. 

  우리는 본을 보임으로 가르쳐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전1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우리 자녀를 모아 놓고 “얘들아, 아빠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들은 아빠를 본 받는 자 되거라”고 얘기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면 “얘들아, 아빠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주의 교훈”이 무엇인지 묵상하던 한 어머니가 있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아들을 바라볼 때마다, 어떻게 내가 저 아이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비전과 목적에 맞게 양육해야 하는지, 기도하던 어머니가 있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록 펠러’이다. 10가지 주의 교훈 지침을 만들어서, 이 아이에게 양육하기 시작했다. 

  록 펠러 미국이 낳은 최고의 갑부며, 가장 멋있는 부자 중의 한 사람이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 벌었던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이다. 그 어머니의 양육의 지침은 10가지였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친아버지보다 더 중요한 공급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됨이 축복된 길이다.

(3) 주일 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 충성하여야 한다.

(4)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먼저 구별한 후 나머지를 사용하여야 한다.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5)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일마다 장애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모든 일에 함께 하여 주실 것을 온전히 믿는 기도가 필요하다.

(7)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빨리 회개하여 죄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8) 아침에는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그리고 도와준 일에 대해, 절대로 나팔을 불면 안 된다.

(10)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에 앉아라.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3. 주의 훈계(νουθεσία)로 양육하라.

“훈계”는 주님의 정신으로 키우라는 말이다. 온건한 책망으로, 신속하게 잘못을 바르게 고쳐주어야 한다. 자녀를 양육하다보면, 자식이 삐뚤어질 때도 있다.

  이때 지체하지 말고 신속하게 치료하라는 말이다. 부모는 아이들의 잘못을, 깨우쳐 줘야만 한다. 치료약은 잔소리가 아니다. 꾸중이 아니라, 주님의 훈계로 치료해야 한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비난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전에 드려진 예물을 자기 것으로 삼았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을 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자식들을 바로 훈계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두 아들을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하신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만다. 따라서 잘못에 대해서 넘어가지 말고, 엄격히 훈계해야 한다. 그래야 바른 길을 찾게 되고, 평생에 그 길을 가게 된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는, 다윗을 반역하고 왕국을 탈취하려고 했던, 악한 자식이었다.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왕상1:6). 꾸지람이나 채찍을 모르고 자랐기에, 패역한 자식이 되었다. 다윗도 책망하지 못해서, 자식농사에 실패하였다.

  그런데 훈계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적 가치로 해야지, 내 감정으로 욕심으로 훈계하지 말라. 주님의 정신은 바로 사랑이다.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할 때, 사랑으로 해야지 감정으로 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허물이 없고, 주님의 뜻대로 살았기 때문에, 자녀로 택해주시지 않았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사랑해주셨다. 우리가 허물 많은 죄인임을 아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지셨다.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모든 양육은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 아무리 좋은 강사, 아무리 좋은 교재가 있어도, 사랑 없는 양육은 폼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기도하고 돌보면서 양육해 나갈 때, 비로소 열매가 바로 맺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의 잘못이나 실수를 교정해 주는 훈련이 필요하다. 눅15장에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의 실수를 받아주는 사랑이 있었다.

  탕자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돌아갈 아버지 집을 생각했다. 평소에 좋은 아버지였기에, 돌아갈 생각을 했다. 부모는 ‘돌아올 항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해야 한다. 지금 부모님의 삶이 30년 후에, 자녀들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부모가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면, 자녀들도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부모가 돈만 아는 사람이면 자녀도 돈만 아는 사람이 된다. 부부가 서로 싸우면 자녀들도 다투면서 산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우리 자녀들도 그 모습을 본받게 된다.

  결론이다. 우리는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있나? 양육해야 될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너뜨리지는 않나요?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나의 보상 심리가 아니라, 나의 기분이 아니라, 주의 훈계로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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