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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처지에서 알아야 할 일, 자랑해야 할 일(약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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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만발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곧 길지 않아서 봄도 지나고 곧 무더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더위도 곧 이어서 가을이나 겨울이 될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교회도 한 두어 달 지나면 전반기를 한 번 평가하고, 다시 후반기의 계획을 점검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내년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있어지는 일 뿐이 아니라 우리는 다가올 모든 일들을 예측하여 준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은 우리의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예측이라는 것 자체가 변화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중의 하나가 바로 <통찰력>이라는 것입니다.
통찰력이라는 것은 앞을 바라보고 짚어내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삶과 역사의 모든 일은 변화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가지게 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만약에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내가 어떤 일을 잘하고 있을 때 무조건 그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좋은 결과가 없을 때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바꾸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변화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결과물을 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잘되고 있는 일도 바꿔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무리 결과가 좋지 않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어도 앞으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해 보아서 지금 비록 결과가 좋지 않아도 앞으로는 지금과 같은 형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좋지 않은 시기를 견디어 내며 현재의 것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변화가 있다’라고 전제하는 것과 ‘변화가 없다’라고 전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변화가 전제되는 삶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에서 그와 같은 말씀을 우리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대해서 3주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혜로운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첫 번째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하라’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우리들에게 인내를 이루고, 자격을 구비시켜주며, 마침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자리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더욱이 이때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구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드렸습니다.

오늘은 현재 내게 주어진 처지에서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오히려 자랑하고 기뻐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 바른 삶의 자세와 또 소망 속에 힘을 얻을 일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때론 우리의 삶은 매우 희망적이고 기쁨으로 일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 반대로 우리 삶은 매우 비관적이고 내가 이 상황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만큼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우리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기쁨이 있어도, 아무리 고통이 있어도 그것이 곧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기대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어떤 경우에도 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와 같은 내용을 생각해 보며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변화되고, 바뀌고, 순환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내 현재 처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내 삶의 형편은 언제나 가변적이고 변할 것이며 결국 삶은 순환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랑은 풀의 꽃과 같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풀의 꽃과 같은데 그 풀의 꽃은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풀이 말라지는데 그러면 꽃도 말라서 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권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쁨과 잘되는 일이 있다면 언젠가는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서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 삶의 어려움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안 되고 어려운 일이 있어서 내 가슴을 누를 때라도 앞으로 내게 늘 이런 일만 닥치는 것이 아니라, 삶은 순환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니 언젠가 또 내게 기쁨의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삶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가변적이고 또 변화가 있어 결국은 순환하게 된다.’ 라는 것이 도대체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은 이렇게 순환한다. 삶은 변화가 있다.’ 라는 것은 결국 우리들에게 ‘그러니 겸손 하라.’ 라는 말씀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결과에 대한 수용입니다.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의 변화무쌍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현재에 자만할 수도 없고, 현재에 비관할 수만도 없습니다. 다만 겸허함으로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이 주신 결과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은혜요 은총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겸손히 은혜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은 가만히 두 손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선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내가 가진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 과정 중에 정말 우리는 완벽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는 내게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그 결과는 내 몫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니 나는 내가 어떤 기대를 해도 내 마음에 맞건 안 맞건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수용하겠다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수용의 각오가 없다면, 잘되면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습니까? 또 못되면 얼마나 낙심하겠습니까? 결국, 겸손이란 내 모든 근본과 시작과 진행과 결과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이루어졌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을 잘해도 그 능력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지혜롭게 분별 했다 해도 그 지혜를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일이 잘 되도 주님께서 그 일을 잘되게 하셨다는 마음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일이 잘 되도, 안 되도, 분명히 우리에게는 주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일이 잘 안되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첫째는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내게 뭔가 부족함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 일을 내게 채우시라고 말씀하시는구나.’ 또는 ‘내가 어떤 방향을 잘못 정했기 때문에 방향을 수정하여 바로 정하라고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면은 무엇입니까?
내가 잘못 방향을 정한 것도 아니고,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라는 의미도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더 높은 뜻과 새로운 길을 내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지금 내 길을 막으시고 새로운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 괴변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믿음의 지혜의 길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겸손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일 뿐 아니라, 삶에 대한 온화한 태도와 대인에 대한 생각자체도 따뜻하게 배려하는 태도로 만들어줍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내 앞에 있는 모든 것들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처음에는 능력으로 평가 받습니다.
‘그 사람 능력 있어. 일 잘해. 그 사람 힘도 있고, 그 사람의 여러 가지가 내게 도움이 돼.’ 하고 능력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능력으로 평가받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 받게 됩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능력이 있어도 그 사람이 싫은데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그 사람이 일 잘하고 힘이 있고 나를 도와줄 만한 능력이 있어도 도무지 대할 만한 사람자체가 안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처음에는 우리가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람은 인격으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인격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시간이 지나면 점점 우리는 인격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균형과 공평케 하심을 인정하는 모습에서 이루어진다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이 나에게도 은혜를 주셨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은 그에게도 그를 기뻐하시고, 그도 잘되기를 원하고, 그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그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치우치신 하나님이겠지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그 말이 맞는다면 하나님은 내게도 은혜를 주시듯이 그에게도 은혜를 주셔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듯이 그도 인정하시니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듯 그도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그것이 결국 그와 같은 사실들이 우리들의 삶에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죠?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 나에게 은혜라면 그에게도 은혜요, 나에게 기쁨주신다면 그에게도 기쁨주시니 내가 그를 존대하게 여기고 하대하지 않는 것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는 온화한 태도요, 대인에 대한 따뜻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의 순간은 늘 바뀌니 언제든지 내가 위에서 지시하는 입장에만 있지 않고 언제든 나도 그에게 지시를 받는 입장에도 설수 있으니 언제든지 우리는 겸손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서로에 대해서 피차 겸비함을 가지고 존중하며 대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이 순화되고 변화되고 바뀐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비하라는 말씀이시지요.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됩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과정가운데서 애굽의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이 있을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바로로부터 총리로 임명을 받고 난 후에 요셉은 7년의 풍년동안에 이미 7년의 풍년이 지나면 7년의 흉년이 들것을 대비해서 곡식을 비축할 창고를 짓고 많은 곡식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국가들은 달랐어요. 기후가 비슷해서 인지 주변 국가들도 풍년이 있었던 듯합니다.
처음에는 풍년이 있으면 마음에 생각을 했겠지요. ‘이런 풍년이 있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뭔가 준비도 했겠지요. 그런데 풍년이 일곱 해 동안 계속되니 그들의 마음이 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준비가 소홀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흉년이 닥치기 시작하니까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이 될 때 모두가 굶어죽을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애굽에 와서 곡식을 사가고 얻어가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것은 곧 모든 상황이 바뀐다는 것을 알고 대비한 것입니다. 결국 그 대비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은 본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까지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비라는 것은 현재를 절제하고 비축하여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저희교회의 우리구호 잘 아시잖습니까?
준비는 철저히, 훈련은 가혹히, 전투는 치열히, 그리고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
우리는 철저한 준비가 없이 우리가 현장에서 어떤 일을 직접 하려고 하면 우리는 주어진 여건 속에 최선은 다할 수 있지만 준비해서 하는 만큼은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주어진 현장 속에서 최선은 다할 수 있어요. 성가대를 생각해 보는데 아무리 예배시간에 찬송을 잘 부르려고 해도 연습하지 않으면 잘 부르는데 한계가 있을 겁니다.

우리의 어떤 일도 다 마찬가지일겁니다. 결국 준비를 해야 됩니다.
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훈련도 준비의 일종입니다.
<훈련은 가혹히>
가혹한 훈련조차 없이 우리가 어떤 능력의 부여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가혹한 훈련조차 받지 못했다면 우리가 어떤 능력을 부여받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실제 장면 속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우리가 모든 일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세워드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하나님의 영광만을 높이는 주의 백성들이 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모든 일을 대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다림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점점 호흡이 짧아지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점점 자극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주보에서 달라진 것 보셨는지요.
저희교회는 대단히 모든 것이 한번 정하면 끝까지 가는 것-주보가 개척해서 첫 주에 만든 것이 지금까지 16년째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바꿨어요. 참 아주 끈질깁니다. 그런데 요새 조금 바뀌었어요.
주보가 반으로 나누어서 두 칸으로 쓰였는데 한 줄로 바꿨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내용을 줄이려고 그런 겁니다. 전에는 9.5매 썼는데 지금은 6.5매에서 7매를 쓰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긴 것을 점점 싫어합니다.
하여간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길면 은혜가 안 됩니다.
다른 사람 말을 들어주는 것보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요즘은 책도 두꺼우면 무조건 안 됩니다. 책도 어느 정도 얇아야 하고, 옛날같이 종이에 빽빽하게 쓴 것은 안보고 듬성듬성 써야 보는 것 같습니다. 점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책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고 글도 받아들이는 것 아닙니까? 설교도 듣는 것이고 얘기도 듣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내 의견을 많이 표출하려고 하는 겁니다.

요즘은 점차적으로 사회의 경향이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점점 기다림을 못해요. 점점 호흡이 짧아진다는 것입니다. 긴 걸 못해요.
요즘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여러분들이 우승하시려고 한다면 기다리는 것을 잘하면 됩니다. 그리고 인내할 줄 알면 되고 결국 끝까지 호흡을 길게 가질 수 있는 연습을 하시면 비교적 잘 될 겁니다.
우리 삶의 호흡이 짧아지면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길게 기다리며 대비하는 것들이 우리들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대비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돼야 합니다.

여행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가서 모든 것을 돌아본다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즐거움일겁니다. ‘내가 어디 가서 뭘 봐야지.’ 하고 책도 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짐도 싸고, ‘가서 뭘 어떻게 해야지.’ 하는 생각 속에 이미 즐거움이 포함된 것이겠지요.
시험의 효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의 효과는 점수를 넣어서 평가하는 것만이 시험의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성도님들이 ‘교역자들이 어떻게 성도들의 이름을 다 외우세요?’ 하는데 그것은 제가 시험 봐서 그래요. 시험을 봅니다. 시험은 보는데 점수 매기려고 시험보지 않고, 우리 성도들의 이름을 외우게 하려고 시험을 볼 뿐입니다.
제가 늘 얘기하는데 ‘하나님 그 빨간 옷 입었던 분을 위해서 기도하오니......’ 이렇게 기도하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이름이라도 얘기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교구별로 이름을 외우게 하는데 시험 100점 맞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 의미가 없고 다만 90점 이상 못 맞으면 재시험을 봅니다.

시험을 왜 봅니까? 점수 내서 1등, 2등, 정하려고만 시험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공부한 것을 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복습하게 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확실하게 습득하게 하기 위해서 시험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그것을 위해서 등수도 매겨보고 점수도 내는 것이 시험의 원래 목적이겠지요.
또 그것을 통해서 있다 보니까 선발의 자료로 삼기도 하겠지요.

저희 집에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있는데 시험을 보나 봐요. 지리책을 보니까 옛날에 저희가 배운 것 그대로 있는 것 같아요.
쌀, 보리, 조, 콩,......이런 것 있는데, 이게 뭐냐면 어느 지역의 주산물은 쌀, 보리, 어느 지역은 조, 콩, 이런 것들이 있는데 옛날에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외운 것 수십 년 지나도 그대로 외우고 있더라고요.
도대체 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그것이 교육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외우라고 하겠지 생각하고 또 이전을 생각해보니까 그때 외웠던 것이 지금 다 생각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 이것이 시험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외웠겠는가?’ 시험 보려고 외운 것이지요.
결국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근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대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겁니다.
복권 당첨돼서 돈이 생긴 것과 여러분들이 일해서 돈을 번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다 다르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왜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복권 당첨돼서 돈이 생겼다면 돈만 생긴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다면 돈만 생긴 것이 아니라 돈을 벌수 있는 능력도 생긴 것입니다. 돈을 벌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 돈이 벌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똑같이 재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권을 뽑아서 돈을 번 사람은 또 당첨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쉽게 얻은 것과 부단히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는 수치는 현재는 같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수치는 수치조차도 전혀 달라질 겁니다.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나안에 도착해서 가나안의 소산물을 먹게 될 때 다음 날 만나가 하늘에서 끊겨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대란이 일어났어요.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렸던 만나가 끊겨졌으니 이들은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뭘 먹고사나?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굶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먹여 살리셨어요. 왜죠? 이제는 하늘에서 기적을 통해서 먹여 살리지 않고 너희 손으로 거두고 이제는 씨를 뿌려 가꾸어 거두어 먹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너희에게 이제까지는 하늘에서 내리는 기적을 통해 먹었지만 이제는 하늘의 기적보다 더 큰-너희의 손끝으로 수고하는 능력을 통해서 먹으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집 라인에 한 삼십 가정정도 사는데, 월 1회씩 오늘은 이집이 주고, 내일은 저 집이 주고, 한 달에 한번 씩 돌아가면서 밥을 가져다주어서 먹고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정상적으로 일터에 가서 일을 하고 수입을 가지고 물건도 사고 음식도 사서 먹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대비하고 수고하고 애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큰 은혜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이 가변적이어서 늘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대비하여 그 은혜를 누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우리 손으로 수고하고 애써서 먹는 것을 복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 상황에 종속되지 않고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더 크고 훌륭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 만물과 상황이 바뀐다는 것은 우리에게 슬픔에 대한 대비뿐 아니라 기쁨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도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 나뭇가지가 있는데 봄이 되면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그 싹이 큰 잎이 되고, 가을이 되면 물들어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삭풍에 다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나뭇잎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요. 정말 힘겹게 매달려 있고 바람 불어도 안 떨어지고 눈 비 맞아도 안 떨어지고 매달려 있어요.
정말 마지막 잎새처럼 끝까지 매달려 있어요. 여러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아, 정말 위대하다. 그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정말 끝까지 매달려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서 뭐해요. 만약에 그 나뭇잎이 그냥 힘없이 뚝 떨어졌어요. 그래서 그 아래 떨어져서 눈과 비를 맞고 썩었어요. 썩어서 그 다음에 움돋는 또 다른 싹의 양분이 되었다면 그 나뭇잎은 새로운 생명을 움돋게 하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는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나뭇가지 밑에 대롱대롱 끝까지 매달렸다고 해서 그것이 최선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삶에는 내가 그렇게 꼭 하고 싶은데 그 모습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도 축복이지만, 때로는 내가 원치 않게 뚝 하니 떨어지고 힘없이 밀려다니는 것 같아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도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지 내가 내 모습 그대로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도 알지 못하지만 새로운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뜻 속에 내가 포함되어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도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떠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꿈과 은혜와 역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낮은 자는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낮음을 자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함으로 유연성과 가능성을 자랑하고 기뻐하고 힘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는 높은 것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낮은 것을 자랑하라’ 매우 유연한 사고구조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근력도 중요하지만 유연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연성이 없으면 자꾸 다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연성을 위해서 운동도 해야 되고, 육체의 유연성뿐 아니라 사고의 유연성도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낮다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낮은 가운데도 나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고, 내가 부하고 높은데도 불구하고 내가 높은 자리에서 위세 떨 것이 아니라 내가 낮음을 자랑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단 말입니다.
모든 일에 실패한 사람이 낙심하고 한숨 쉬는 것보다 자신 있게 “난 또 열심히 하면 잘 될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싱싱하게 느낍니까?

또 어떤 사람이 매우 잘 됐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해요.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그런 능력이 없었는데 내 부족한 능력을 당신이 채워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유연한 사고가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기쁨이 결국 내 기쁨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많은 것이 생겼을 때 내 창고에만 쌓아두면 결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 창고에 쌓아두는 대신 다른 사람의 창고에 쌓아두면 오히려 그것이 더 많은 소출을 거둘 수 있음을 봅니다.

어떤 일을 할 때도 외곽투자가 매우 중요하지 않습니까?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것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외곽부터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어떤 일이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내 창고에 쌓아두는 것보다 다른 이의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 결국은 내 창고에 쌓이는 것보다 나에게 더 큰 유익을 끼칠 수 있음을 생각하는 사고의 유연함과 하나님의 은혜의 가능성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낮을 때는 높아짐을 자랑할 수 있고, 높아지고 부할 때는 낮아짐을 자랑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일에 실패하고 시험에서 불합격하고 승진에서 안 됐을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안 됐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나는 믿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씩씩함을 보일 때 우리는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어떤 일이 잘 됐을 때도 겸손하게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부족하지만 내 부족한 것에 비해서 하나님께서 좋은 위치를 주셨으니 내가 노력해서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마음이 흡족하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함이 우리를 유연하게 만들어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의 가능성을 자랑하고 기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비굴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가 최선을 다했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도 낙심할 필요도 없고 비굴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내 능력 때문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때문임을 믿고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믿음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도 높고 잘하는 것이 있고, 내가 높아도 낮아질 수 있고 도움 받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유연성과 가능성을 우리는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게 뭘까요?
내가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빈 한데도 처할 줄 알고, 내가 화려한 데도 처할 줄 알고 누추한 데도 처할 줄 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축복과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방적인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늘 우리들에게는 균형 잡힌 사고가 필요합니다.

내가 부한데도, 빈 한데도, 내가 어려운 가운데도, 내가 모든 것이 유연한 가운데도, 원활한 가운데도 처할 수 있는 것-이런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힘이 있어도 겸손할 수 있고, 힘이 약해도 위축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을 믿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겁니다.
사람이 어느 위치에 오르면 그 다음에 다가오는 것은 뭐냐면 위치에 대한 보장입니다. 사람은 여기서 어려워지는 겁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기도 어려웠는데-대부분 올라오며 내려가는 일만 남는데-나는 여기서 오래있고 싶다-그때 사람은 보장받지 못하는 현재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 때 우리는 불안해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절대 그냥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앞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이제까지 어려움을 헤쳐 왔듯이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헤치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내게 또 임하실 것이다.
그것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어떤 경우에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혹 내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내가 내려와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난 기쁨으로 어떤 자리에 위치 시켜주셔도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내가 어디 있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게 있는 위치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하며 주의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결국 요셉이 종으로 팔려 와도 죄수로 가도 그 가운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였을 때 그는 30세의 약관에 총리로 발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승자의 관용과 패자의 진정한 인정과 축복이 우리 삶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다 생각하면 “나도 열심히 했지만 당신이 나보다 더 열심히 한 것 같아. 축하하는데 내가 더 열심히 해서 한 번 또 다시 도전할 테니까 당신도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하시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그는 대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말 당신도 열심히 했는데 내가 이번에 당신에게 더 좋은 일들을 이룰 수 있게 돼서 미안하다. 내가 운이 좋았나 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도 또 큰 인물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상대를 축복해 줄 수 있고, 축하해 줄 수 있고, 인정해 줄 수 있고, 배려하고, 그 마음을 살펴줄 수 있는 마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살펴봅니다.
삶의 행복은 나를 바로 알고 내 용도를 파악해 그 용도대로 최대한 사용되는 것이며 그것 자체를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단순비교처럼 무지한 일은 없습니다.
음악 잘하는 사람과 미술 잘하는 사람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비교도 안 되지만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분야가 다른데 그것을 어떻게 비교합니까? 그런데 미술과 음악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특성은 다 다른 특성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사람마다 재능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그 사람이 잘하는 일도 달라요.
그런데 우리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가지고 당신은 우등해, 당신은 열등해. 당신은 몇 점, 누구는 몇 점, 하고 점수를 매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누구든지 존귀한 존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겁니다. 단순비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 자체를 무시하는 불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를 바로 알고, 내 용도를 알고, 그대로 최대한 사용되고, 그것 자체를 기쁨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기여하고 공헌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쁘게 만들어주고, 하나님의 교회와 그 나라와 역사와 사회 속에 내가 무엇인가 기여하고 공헌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 하나 살기 허덕이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나 하나 살기 허덕여도 그 가운데 내가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기여할 부분이 있음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며 겸손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요새 너무너무 감격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해요.
아침에 눈뜨고 나서 ‘숨 쉬고 있구나, 아 참 감사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여러분도 아침마다 눈 뜨고 숨 한번 쉬어보고 ‘아, 참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살아서 숨 쉬는 것이 왜 감사합니까? 맛있는 것 먹을 수 있으니까요?
여태까지 먹었는데 몇 그릇 더 먹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좋은 옷 입으니까? 좋은 집에 살 수 있으니까?
여태까지 살았는데 몇 밤 더 자면 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적어도 내가 숨 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겁니다. 용도가 있는 겁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 한 번 합시다.
“나는 아직 용도가 있는 사람이야.”
하나님의 용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아직까지 용도가 폐기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목적이 다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살아서 숨 쉰다는 것이 내 몸과 손과 발과 내 모든 사고기능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무엇인가 하실 수 있다는 것, 뭔가 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없으면 우리를 벌써 불러가셨을 겁니다.
시계가 시간도 안 맞고 가지도 않고 고치는데 돈만 들고 소용이 없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없애버려야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데 아무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고, 도움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천국에 불려 올려서 편하게 지내게 하시지 왜 이 세상에서 고생하며 살게 하시겠습니까?
뭔가 우리는 해야 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젊어서 화려한 시절에 해야 될 일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나이 들면 나이든 대로, 힘이 없으면 힘이 드는 대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찾아서 하는 분은 잘 사는 분이고, 아직까지 ‘내가 뭐가 필요해.’ 하는 분은 잘 못 사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왜 필요한가?
내가 왜 숨 쉬어야 하는가?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씀으로 맺읍시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정말 한 번의 기회를 소중히 여깁시다.
‘이번 기회가면 또 와.’ 하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한 번의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셔야 됩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셔야 됩니다.
‘정말 너무 소중한 기회다. 내가 이번 한 번의 기회에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어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삶을 빚어 가셔야 합니다.
오늘 사랑하는 주의 성도님들에게 주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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