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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호산나를 부르는 아이들 (시 118:24~26, 마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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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어린이들이 주의 귀한 자녀로 사랑받고 어린이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처럼 자라서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교회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손에서 성장하고 교회에서 사랑받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동산인가를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의 장래에 시온의 대로와 같은 길이 환하게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수 년 전 세계선교협의회 관계로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동센터를 세우고 지원해 주는 일로 몇 날을 방문하였습니다. 수도인 다카에서 쿠시디아라는 시골 동네로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쿠시디아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자 미리 그 곳의 감독과 동네 사람들이 동네 어구 버스 정류장에 죄다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내리자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을 동원하여 저의 앞에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동네 안마당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때 얼마나 놀랍고 기뻤든지 아직도 그 감격이 살아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이 났습니다. 노래하며 춤을 추며 환영해주는 것이야말로 정말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피곤했지만 피곤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난하지만 순박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은 여러모로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주간 동안은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사람들과 변론도 해야 합니다. 이런 피곤하고 지친 예수님을 사람들은 호산나로 환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얹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아이들도 함께 길에 나와 “호산나”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감격적인 입성을 하고 계십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지배하실 권능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호산나’는 아람어의 ‘호산나’(hosan-na)의 음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시편 118:25의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간구하는 짧은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 의식 때 제단에 물을 부을 때에 레위인은 시편 118편을 찬양하였고 제사장들은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를 외쳤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였습니다. 그들이 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님께 대한 찬송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일에 어린이까지 동원했다는 오해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들인데 그들이 가장 시기했습니다.

  쉴러는 “악마들조차도 수없이 많은 예술에 대해 알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빛으로 충만한 밝은 세계로 악마를 인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을 악마는 할 수 없습니다. 악마의 세계에는 찬양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예수님께 찬양하는 것까지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찬양을 불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싫어하는 찬송을 아이들이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어린이는 정치적 꾀가 없으므로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15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라고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시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자신의 기득권, 자기 이익, 시기심이 앞서면 예수님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이런 사람들의 입에서는 호산나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의 ‘호산나’ 찬양을 보세요. 어린이는 정치적 꾀가 없으므로 호산나가 가능했습니다. 찬양은 순수 감정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어린이들은 꾸밈이 없고 순수합니다.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나타냅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달라고 조르고, 아프면 웁니다. 졸리는 것을 억지로 참고, 배고픈 것을 참고, 아플 때 이를 악물고 있지 못합니다. 참는 것은 기다리는 것인데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꾸밈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의심 없이 수용합니다. “나 어떻게 태어났어?”라고 하면 옛날에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라고 하곤 했습니다. 아주 안 좋은 대답이지만 그 때는 그랬습니다. 아마 어릴 때 그 말 때문에 고민한 분들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았는데 제 동생이 그 때 심각했답니다. 아이들은 꾸밈이 없어 그대로 믿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찬양해도 될까? 손해 볼지 모를 일이지? 아이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당시 그 상황에서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극히 모험적인 일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모험이라 하지 않고 합니다.
  아이들과 정치인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아이들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유심히 들어보면 말이 된다, 정치인들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유심히 들어보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1:8에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의 순수성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하늘과 땅이 되면, 새로운 나라가 도래하게 되면 모두 어린 아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독사가 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호랑이나 사자가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들은 정치적이 아니니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 나라가 아니니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4에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합니다. 자기가 어린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린이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입니다. 예수님도 어릴 때 마찬가지로 그랬습니다.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건을 보세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부모는 애타게 찾다가 사흘 길을 다시 와서 성전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을 계산하지 못하는 순진무구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린이의 특징입니다.

  어린이는 정치적 꾀가 없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 따라갑니다. 사탕을 주면 따라갑니다. 이런 어린의 순진함을 이용하여 유괴하는 범죄자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자들은 좀 엄하게 다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처능력이 없는 자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내 남자의 여자’라는 김수현씨의 드라마가 요즘 인기입니다. 저는 물론 안 봅니다. 그런데 낮에 중요한 대목이 잠시 나온데 보니 12살짜리 아들로 나오는 아이가 부모에게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거 아니니까 아빠 엄마 나 책임져야죠?”라고 합디다. 아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니까 부모는 아이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에게는 고통에 대한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우리가 선택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점은 우리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 책임지라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적절한 부모는 있어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습니다. 많은 아이들은 부모의 계획과 관계없이 태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이 없이는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 모두 고려하여 계획을 세우십니다.

  꾸밈이 없는 삶은 무욕에서 나옵니다. 이것저것 계산하고 따지다보면 꾸미게 되고 꾀에 빠지게 됩니다. 어린이가 내일 어떻게 될까? 종합부동산세를 얼마나 낼까? 인생이 참으로 무상하구나. 지구 온난화 때문에 어떻게 살까? 라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앞서다보면 계산이 빨라지고, 앞에서와 뒤에서가 달라지게 됩니다. 정치적 꾀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 사육장에 들어가서 아이들이 갖다놓은 것들을 보다가 어떤 아이가 가져온 햄스터를 만졌습니다. 햄스터는 선생님이 손으로 쓰다듬자 할퀴어었습니다. 선생님은 햄스터를 손으로 쳤더니 죽어버렸습니다. 아이가 얼마나 실망할까? 생각하다가 시장에 가서 햄스터 한 마리를 사서 넣어두었습니다. 그 다음날 선생님은 아이의 일기장 보고 기절할뻔 뻔했습니다. 아이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여 있었습니다. “햄스터가 이상하다. 매일 먹이를 줬을 때는 괜찮더니 하루를 굶기니까 암놈으로 변했다”.

  고전 14:20에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늘 악에서 멀리 사는 순수함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삶의 지혜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어린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는 온전합니다.

  16절에는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적이 없느냐 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은 온전하다고 하십니다. 찬양이 온전한 것은 마음이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의 찬양이 온전한 것은 어린이의 마음이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면 아무리 목소리가 곱고 기교가 뛰어나도 온전한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옛날 우리 할머니는 찬송가 600장을 한 곡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찬송이 은혜로웠습니다. 목소리도 아니고 곡도 아니고 영으로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15에는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찬송해야 온전한 찬송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의 찬양은 순수하게 들립니다. 마음이 뒤엉긴 사람은 찬양이 뒤엉켜 순수하지 못합니다. 어쩌다 한번 외부에서 독창자가 올 때가 있습니다. 봉헌시간에 찬송을 하기 위하여 와서 찬송만 하고는 살금살금 나가버리면 은혜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 때문에 찬송이 은혜가 되는 것인데 찬송만 하고 가면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경우는 노래는 했지만 찬미는 아닐 것입니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인간의 영혼에 가장 깊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마음의 찬양은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이 되고, 인간의 영혼에 가장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은혜가 됩니다. 이사야 6장에는 천사들이 찬양할 때에 이사야가 회개합니다. 천사들의 찬양은 온전한 찬양이며 영의 찬양이었습니다. 천사의 찬양은 회개케 하는 영이 살아있었습니다. 이런 찬양이 온전한 찬양입니다.

  교육전문가 데일 스펜더는 “어른들이 세상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기술을 아이들이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기술을 가지는 것은 아이들이 꾸밈이 없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찬양은 꾸밈이 없습니다. 그래서 온전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아이답지 않고, 어른 같이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런 어른 같은 아이들의 노래들을 어른들은 또 재미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노래는 아이다울 때에 온전하고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꾸밈이 없이 온전한 찬양이 참 찬양입니다. 이런 찬양이 예수님을 즐겁게 할 찬양입니다. 예수님은 찬양해야 할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한 찬미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찬양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존 트랩이란 분은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할 때 자비를 베푸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때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에 어린이들의 ‘호산나’ 찬양이 예수님을 얼마나 기쁘게 했겠습니까?

  저의 작은 외손자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이가 좀 개구쟁이입니다. 한번은 이삭이 일을 저지르자 엄마가 “이삭이 때문에 못살아” 했더니 자기는 “엄마 때문에 못살아”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그러지 말고 그럴 때는 “이삭이 때문에 행복해” 그러라고 했답니다. 그 다음부터 엄마는 아이에게 “이삭이 때문에 행복해” 그랬더니 아이가 “엄마 때문에 행복해” 그러더랍니다. 아이들은 꾸밈없이 배우고, 꾸밈없이 표현합니다. 어른들을 흉내 내고, 어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린이의 온전성입니다.

  아주 오래 전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에서 에르푸르트로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서 우리 일행이 서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불렀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스웨덴 관광객들이 우리의 찬송소리를 듣고 자기들도 함께 와서 합창을 했습니다. 객지에서 알지 못하는 관광객들이 함께 모여 부르는 찬송은 정말 여행의 또다른 맛이었습니다. 찬송의 놀라운 힘이었습니다. 어린이는 온전한 찬양을 할 것입니다. 어린이의 마음을 품은 자는 어디서나 누구와도 온전한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결론

  레나 마리아가 다시 한국에 와서 지난 달 공연을 가졌습니다. 스웨덴의 가스펠 가수인 그녀는 “노래하는 천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68년 두 팔과 한 쪽 다리가 없는 중증 장애인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병원에서는 아기를 보호시설로 보낼 것을 권유하였지만 독실한 크리스천 부모는 한참 동안 아기를 들여다보고 있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이 아이도 하나님이 주신 아이입니다. 이 아이에겐 가족이 필요합니다”. 레나는 하나뿐인 왼발로 글을 쓰고, 오르간을 연주하고, 뜨개질을 하고, 운전도 하고, 젓가락질까지 합니다. 그녀는 “나는 스웨덴이라는 복지 선진국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사랑하되 독립적으로 자라게 해주신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저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는 왼발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었고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레나는 육체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마음은 온전합니다. 그녀의 영혼은 온전하여 은혜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찬양은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리고 은혜가 됩니다. 그녀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그 속의 하나님, 내재하시는 예수님이 드러나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입니다. 나의 부모나 나의 배우자나 나의 자녀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 대상입니다. 우리 아이가 가진 장애나 비교의 조건이 아닙니다. 못생긴 것이 비교의 조건이 아닙니다. 공부 좀 못하는 것이 비교의 조건이 아닙니다. 모두 더 사랑을 베풀 조건들입니다.
  찬양은 모든 존재의 가장 고상한 직업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찬양하는 어린이가 되게 합시다. 찬양이 그들의 평생의 삶에 온전한 직업이 되게 합시다.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아이들이 되게 합시다.

  우리 아이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높이는 아이들이 되어 평생에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 ‘호산나’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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