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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직한 마음 (엡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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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베소서 4:25
제목; 정직한 마음

(본 설교문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 “예수님처럼”에 나오는 내용으로 한 설교입니다. 내용이 은혜스러워 이곳에 올립니다)

한 여자가 판사와 배심원단 앞에 서서 성경에 한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을 들어 서약한다. 하나님의 도움에 힘입어 지금부터 몇 분 동안 이 여자는 “ 진실을 말하고 진실대로 말하며 오직 진실만을 말할 ” 것이다.

  여자는 증인입니다. 여자의 본분은 진실을 부연하는 것도 아니요 희석하는 것도 아니다. 여자의 본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해석은 변호인단에게 맡기고 심의는 판사에게 맡기고 판결은 배심원단에게 맡기라. 그렇다면 증인은? 증인은 진실을 말한다. 그 이상이거나 그 이하이면 불의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 일만 바로 하면 - 진실을 말하며- 정의의 입지가 그만큼 커집니다.

그리스도인도 증인입니다. 우리도 서약합니다. 법정의 증인처럼 우리도 진실을 말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판사석은 비어있고 판사는 보이지 않을 지 모르나 성경은 엄연히  존재하고 비켜보는 세상이 배심원단이며 우리는 일차 증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 자신의 명을 받아 증인으로 소환되었습니다.

“ 너희가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행 1:8)

우리는 증인입니다. 법정의 증인처럼  우리도 증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말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분은  진실을 호도하거나 부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법정의 증인과 그리스도의 증인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법정의 증인은 결국 증인석에서 내려오지만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주장이 언제나  심리중이기 때문에 법정은  영원히 개회 상태이며 우리의 서약도  효력이 지속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거짓이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거짓은 전혀 발 들여 놓을 틈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놀라운 평가  중 하나는 이것이다. “ 그는 범죄하거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 53:9)예수님은 철저히 정직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모두 정확했고 그분의 문장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시험 부정 행위가 없었고 회사 장부 조작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을 부풀린 일이 한번도 없었고 진실을 가린 일이 한번도 없었고 진실을 외면한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진실을 그대로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속이는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다스린다면 우리 입에서도 속이는 말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십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그분의 계획은 우리를 아들의 형상대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롬 8:28) 그 분은 우리의 부정직을  줄이거나 최소화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깨끗이 없애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정직에 냉정하십니다. “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 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정직 윤리는 엄격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주제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사랑하시고 속이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9-10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다. 성적인 죄를 짓는자.  우상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매춘하는 자 , 술 취하는 자, 남의 것을  강탈하는 자 등온갖 초라한 모습과 함께 - 바로 거기- 남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가 나옵니다.
  너무 엄해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악의 없는 거짓말과 아첨의 말이 간음과 가중 폭행 못지 않게 하늘의 분노를 일으킨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금 축소 조작을 우상 앞에 무릎 꿇는 것과 똑같이 보십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게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 12:22)
여호와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거짓된 혀와....(잠언 6: 16-17)
거짓말 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5:6)

왜 이토록 심하게  표현할까요? 이렇게 까지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가지입니다. 부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에 절대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6: 18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안 하시겠다든지 혹은 안 하기로 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개가 나는 것과 같고 새가 짖는 것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디도서에도 히브리 말씀이 똑같이 나온다. “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딛1:2)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한번 언약하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분의 진실은 모두 진심이고 그분이 선포하시는 진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3)

반대로 사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마귀는 “ 거짓의 아비” 이다(요 8:44) 알다시피 거짓이야 말로 마귀의 가방에서 나온 최초의 무기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하와를 낙심케 한 것도 아니요 성적으로 유혹한 것도 아니요 쥐도 새도 모르게 덮친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을 했을 뿐입니다. “ 하나님이  너한테 저 열매를 먹을면 죽는다고 하던? 넌 죽지 않아”(창 3: 1-4)

새빨간 거짓말쟁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속아 열매를 땄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불과 몇 분단도 못가서 남편과 아들이 그 선례를 따르고 에덴의 정직은 먼 옛날의  추억이 되고 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다니엘 웹스터의 말이 맞습니다 “ 진실만큼 강한 것도 없지만 진실만큼 낮선 것도 없다”

『오늘의 심리학』지에 따르면  마귀는 지금도 거미줄을 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도 열매를 따먹고 있다.
․ 세금 보고나 회계 장부를 속인 일보다 배우자를 속인 일이 더 많다고 답한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답한 사람보다 많다.
․ 절반을 넘는 사람들이  만일 자신의 세금 보고에 감사가 행해진다면  더 많은 세금을 추징당할 것이라고 답했다
․응답자 중 1/3이  지난 한해동안 가장 친한 친구를 속인 일이 있다고 시인했다. 그 중 90%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 주차장에서 다른  사람의 차를 긁으면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그냥 가버리겠다고 답한 사람이 절반에 가깝다. 그중 대다수(89%)는 그것을 부도덕한 일로 보고 있다.

왜 우리는 “왜 하나님은 정직은 요구하시는가?” 가 아니라 “왜 우리는 부정직을 용인하는가? 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부정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리의 일구이언과 말뿐인  약속은 도대체 왜 나오는 것일까요? 굳이 연구 조사 없이도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했다가 오히려 바보가 된 한 남자 얘기에 대부분 공감이 갈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유럽에서 막 집으로 돌아오려는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 내 고양이는 어때요?”  아내가 물었다.
“ 죽었소”
“ 여보 그렇게 까지 솔직할 것 없어요 왜 좀 더 시간을 두고 조금씩 알려주지 않았어요 ? 여행 잡쳤잖아요.”
“ 무슨 말이요?”
“처음에는 고양이가 지붕에 있다고만 말했어도 됐지요 그러다 내가  파리에서 전화했을때 고양이의 몸놀림이 둔해졌다고 말했을 수 있고요. 그리고 내가 런던에서 전화했을때 고양이가 아프다고 말하고 내가 뉴욕에서 전화했을때 고양이가 병원에 갔다고 말했어도 됐어요 그러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고양이가 죽었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남편은 그런 원칙이 금시 초문이었지만 이제라도 배울 생각이 있었다.
"알았소 다음 번에는 더 잘하리라“ 남편이 말했다.
“ 그건 그렇고 우리 엄마는 어때요?” 아내가 물었다.
오랜 침묵이 흐른 후 남편이 답했다 “ 음 장모님은 지금 지붕에 계시다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진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씀은 외우지만 사실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어색하게 하리라는 것을 우리의 신조로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을 좋아하지 않는 마음은 엄마가 방에 들어와  “ 너 동생 때렸지?”  하고 묻던 세 살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정직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그때 거기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글쎄, 꼭 거짓말 은 아니고... 그냥 살짝 얼버무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 동생을 때렸냐구요? 그거야 ’때리다‘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물론 동생과 접촉이 있었던 건 사실이예요. 하지만 배심원단도 그것을 ’구타‘로 간주할까요? 모든 일은 다 상대적인 것 아닌가요“
“동생을 때렸냐구요? 그래요 아빠 때렸어요 하지만 제 잘못은 아니예요 제가 타고난 유전자에 공격성이 조금만 덜했어도 그리고 아빠가 나한테 텔레비전만 보게  하지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동생을 때린 건 사실이지만요 잘못은 저한테 있는 게 아니예요 나는 유전과 양육의 피해자라구요“

진실은 재미가 없다는 것은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웁니다. 우리는 진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좋아하지 않을뿐 아니라. 우리는 진실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정직만으로는 필요한 것을 다 얻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상사의 호감을 사기 원한다. 그래서 아첨한다. 우리는 그것을 윤활유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짓말 이라 하신다.  우리는 사람들의 찬탄을 얻기 원한다.  그래서 과장한다. 우리는 그것을 극적 효과라 부른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그것을 거짓말이라 하신다.

우리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원한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분에 맞지 않는 집에서 산다.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 부른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짓된 삶이라 하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진실을 믿지 않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은 소유를 팔아. 그 값의 일부를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전액을 바치는 것 처럼 하여 베드로와  사도들을 속였습니다. 이들의 죄는 돈의 일부를 자기들 몫으로 남겨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한 데 있었습니다. 그 속임의 결과는 곧 죽음이었다. 누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행 5:11)
나는 사람들이 이 기사에 대해 아찔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하나님이 지금도 거짓말 한다고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시니 천만  다행이지” 과연 그러실까. 내가 보기에 거짓의 대가는 여전히 죽음이다. 몸은 죽지 않을지 모르나  죽는 것은 많다.

․결혼의 죽음 : 거짓은 가정이란 나무의 밑동을  갉아먹는 흰개미이다.
․양심의 죽음: 두 번째 거짓말의 비극은 언제나 첫 번째 거짓말보다 쉽다는 것이다.
․직업의 죽음:  거짓말이 치명적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지 부정행위로 쫓겨난 학생과 공금횡령으로 해고된 직원에게 물어보라
․믿음의 죽음: 믿음의 언어와 거짓의 언어는  사용 단어가 완전히 다르다 거짓의 언어에 유창한 이들은 자백 회개 등의 단어를 발음조차 하기 어렵다.

그밖에도 친밀의 죽음, 신뢰의 죽음, 평화의 죽음,  신용의 죽음, 자존감의 죽음 등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러나 거짓에서  비롯되는 가장 비천한 죽음은 바로 우리의 증거입니다. 법정은 위증자의 증언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 동료들이 회계 장부에 대한 우리의 말을 믿지 못하는데 그리스도에 대한 말은 믿을 것 같은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증인으로 쓰실  것 같은가?
고등학교 풋볼 팀에는 코치의 말을 경기중인 선수들에게 전해주는 임무를 맡은 선수가 하나씩 있다 , 그 선수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코치는  패스를 주문했는데 전달자의  말은 코치가 달리라고 했다고 한다면? 이것만은 분명하다. 코치는 그 선수를 오래 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것도 맡긴다고  말씀하십니다. (마25: 21) 하나님은 당신에게 작은 일을 맡기실 수 있을까?

오래전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남자가 속임수를 써서 중국 황제의 악단에 들어갔다. 연습이나 연주가 있을때마다 그는 피리를 입술에 대고 부는 시늉을 했다. 물론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준수한 국록을 받으며 편안한 삶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연주가 마다 돌아가면 독주를  청했다. 피리부는 남자는 눈앞에 캄캄했다. 이제 와서 피리를 배우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꾀병도 부려보았지만  궁궐의사는 속지 않았다. 독주가 있던 날 이 사기꾼은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 사람의 자살을  설명하던 말이 후에 영어에서 “ 그 사람은 책임 직면을 거부했다”는 표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거짓의 치료책은 단순하다. 책임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는 속이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음지를 걷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우리의 거짓의 결과도 죽음입니다. 우리 중에는 결혼과 양심, 나아가  믿음마저 묻어버린 이들이 있다. 모두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진실을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며 딜레마에 빠져있는가? 그 순간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거짓을 축복하실까? 거짓을 미워하시는 그 분이 거짓을 바탕으로 한 전략을 축복하실까? 진실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남을 속여야 하는 사업을 축복하실까? 하나님이 타인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작업을 귀히 보실까? 하나님이 속이는 자를 도와주러  오실까? 하나님이 나의 부정직을 축복해주실까?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점검해보십시요. 냉정하게 자문해보십시요
나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온전히 정직하게 대하고 있는가? 나의 관계에는  정직이 선명히 드러나는가? 업무실적이나. 학교 성적은 어떤가? 나는 거래에 정직한가? 나는 믿을 수 있는 학생인가? 정직한 납세자인가? 직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인가? 당신은 진실을 말하는가? 항상?

그렇지 않다면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요. 내일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요. 오늘의 잔물결이 내일의 파도가 되고 내년이 홍수가 됩니다. 예수님처럼 되십시오.  진실을 말하고 진실대로 말하며 오직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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