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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10계명 : 마음지킴 (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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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계명의 독특한 특징은 행위를 금한 다른 계명과는 달리 ‘탐내는 마음’을 금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구약 역시 마음이 바르지 못한 차원까지를 죄로 규정합니다.

흔히 탐심 없이는 아무런 발전도 없을 것 같은 염려 때문에 적절한 욕심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탐심을 조금도 두둔하지 않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3-4). 성경은 탐심을 성도의 삶에서 철저히 박멸해야할 심각한 죄로 언급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고 정죄합니다. 사람이 여러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이유는 자기 힘으로 채울 수 없는 탐심을 신들의 힘을 빌어서라도 채우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상은 인간 내적 욕망들을 밖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탐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나, 부모 공경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 역시 탐심이 밖으로 표출된 현상들입니다. 십계명 전부가 탐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은 약간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의욕’과 ‘탐심’은 냉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의욕적일 것을 명합니다. 하나님을 대충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했습니다. 또한 적당히 성숙해가라고 하지 않고,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3-15)고 했습니다. 오히려 대충 적당히 사는 삶에 대해서는 무섭게 경고합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감에 있어서, 성도는 의욕이 있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갈망하는 것을 탐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살짝 살짝 어겨가면서라도 좇고자 하는 꿈이나 소원은 탐심입니다. 따라서 탐심은 가질수록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 자녀다운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도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기보다는 주시지 않은 것을 불평하게 합니다. 한꺼번에 왕창주시지 않고 꼭 필요한 정도만 감질나게 주심을 못마땅하게 여기도록 합니다. 자나 깨나 온 마음이 탐내는 것을 얻는데 열중하게 하고, 마침내 얻기까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추구하게 합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은 한번 시동 걸리면 아무리 위험을 경고해도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과속하다가 결국은 사고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먼저 그녀의 마음에 탐심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갑자기 눈이 뒤집혀서 선악과가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고 어느새 따먹고 말았습니다. 아간도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수 7:21)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첫 승리의 전리품을 빼돌렸습니다. 탐심이 한 번 발동하자 그들은 하나님도 겁내지 않고 대담무쌍하게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을 세상이 감당할 수 어렵듯이, 탐심에 사로잡힌 사람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탐심에는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입니다. 월세로 살 때는 전세면 만족할 것 같지만, 전세로 바꾼 후에는 마음도 바뀝니다. 90점이면 만족할 것 같다가도, 막상 1개 틀린 시험지를 받으면 백점이 아쉬워집니다. 그렇다고 자기 집을 마련하고 100점을 맞으면 만족할까요? 탐심은 끝이 없어서 하와처럼 세상 전부를 가져도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 자리까지 탐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까지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유익이 될 정도로 약간만 탐심을 허용하겠다는 생각자체가 이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선악과 ‘한 입만’ 외투 ‘한 벌만’ 금덩이 ‘하나만’이라는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악과 한 입의 결과로 온 인류를 죄의 고통에 빠졌습니다. 외투 한 벌과 금덩이 하나의 결과로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를 받았습니다. 아간을 돌로 쳐 죽인 곳을 아골(r/k[) 골짜기라 했는데 그 뜻이 ‘괴로움’ ‘고통’ ‘재난’이라는 뜻입니다. 탐심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것은 최고의 낙원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아골 골짜기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끔직한 사진과 함께 ‘이래도 담배를 피우시겠습니까?’라고 경고해도 담배를 못 끊는 사람처럼, ‘작은 욕망’에 미련을 두는 미련한 사람은 경고를 거듭해도 탐심을 결코 버리지 못합니다. 탐심을 품으면 그 결국은 파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잠 6:27)느냐고 말합니다.

제10계명은 단순히 “탐내지 말지니라”는 형태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씩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막연한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탐내는 특성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특히 이 한 구절에 “네 이웃”이라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된 것은, 탐심이 주로 이웃(['r, 레아: 친구, 동료)과 비교하는 가운데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크게 탐내는 경우도 있지만, 이웃과 비교하면서 자기에게 없는 새로운 것을 보고는 갑자기 탐심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집장만 했다고 기뻐하다가 몇 평 더 넓은 친구 집 구경한 후에는 탐심이 생겨 힘들어합니다. 고대에는 이웃의 아내가 탐나면 남편을 죽이고 빼앗거나 훔쳐가는 일들이 흔히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이혼과 재혼이라는 방법을 이용해서 더 좋은 남편과 더 좋은 아내를 탐하는 마음을 채웁니다. 땅값 올라 부자 된 이웃을 보면 땅에 대한 탐심이 생기고, 잘난 이웃집 아이 보면 자기 아이에 대한 탐심이 생겨 닦달합니다. 일 잘하는 이웃집 종 탐내듯이 경쟁업체 핵심 멤버를 로비해서 빼내가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웃 교회 교인을 탐하기도 합니다.

탐심은 이웃보다 소유가 많을 때도 생깁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가진 사람도 한 마리뿐인 이웃집 양을 탐냅니다. 집에 장난감 잔뜩 있는 아이도 이웃집 아이가 가진 새 장난감을 보면 탐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몰래 하려는 아이들처럼,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탐날 때는 더욱 은밀하고 탐욕을 채우기도 합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많은 아내가 있었는데도 교묘하게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삼하 12:10).

아마도 탐내는 이유는 ‘그러면 더 행복할 것 같아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가운데서 행복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꾀와 노력으로 더 나은 행복을 얻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살짝 살짝 어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행복(eudaimovnia, 유다이모니아)이라는 단어는 ‘좋다’와 ‘귀신’의 합성어인데, 탐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보다 행복귀신을 섬깁니다. 행복귀신은 목적(결과)만 좋으면 방법(과정)은 무시하라고 유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유혹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라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바르게 따르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눅 9:23).

탐심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주시지는 않고 오히려 감추는 분처럼 그릇되게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 때 하와가 하나님께 대해 올바르게 알고 있었다면 그처럼 쉽게 탐심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내게 당면한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은 것처럼,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지는 않는 것처럼, 그릇된 생각을 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롬 8:28)실 줄 소망하는 성도는, 자기 꾀와 노력으로 행복을 추구하려는 탐심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은, 불건전한 기복신앙, 신비주의, 윤리적인 신앙, 합리주의와 같은 잘못된 신앙으로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중생한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키지는 못합니다. 하나의 계명조차도 완전하게 지켜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중생한 사람은 참으로 순종하기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마음속의 작은 탐욕도 죄로 인식되기 때문에 순종의 실패를 무시하지 못하고 “곤고한 사람”으로서 “사망의 몸”에 갇혀 있는 것을 괴로워합니다(롬 7:24). 그러나 죄를 시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고서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회개한 후에, 또 다시 순종할 힘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일부를 순종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온전히 순종하기를 갈망하며, 실패 할지라도 그분을 향해 내 마음 전부를 다하여, 내 영혼 전부를 다 드려서 온전히 순종하려는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온전하지는 못할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는 것을 신뢰하며 그 소망을 굳게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죄인에게 값없이 주신 이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외치는 사람입니다(롬 7:25).

십계명을 통해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수준을 알게 하셨으니, 아는 만큼 실천할 은혜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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