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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기다리는 믿음 (시 2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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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기다리는 믿음 (시 27:1-14)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많습니다. 그냥 많은 것이 아니라 훨씬 많습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신기해 보입니다. 저는 제가 신기해 보이고 주일날마다 이 높은 남산 높은 뜻 숭의교회에 예배하러 나오시는 여러분들이 참 신기해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 뭐가 이상한 일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솔직히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다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간단하고 또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와 사람을 제외하고 실제로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 눈에만 보이시지 않는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될 때도 너무나 많다는데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시는데 그 실상과 증거가 말처럼 쉽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하시고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신다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구했는데 주지 않으시고, 찾았는데도 여전히 찾지 못하고, 문을 열심히 두드렸는데도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고 닫혀 있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최근에만 해도 저는 나름대로 매우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났고 끝이 났습니다. 물론 그 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일을 놓고는 더 이상 기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여전히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하시고 두드리면 열어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하셨지만 응답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사실 기도 안 해도 결과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바라는 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기도를 안 하면 바라는 대로 한번도 되지 않고 기도만 하면 언제나 바라는 대로 된다면 하나님을 믿기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데도 평생 삶이 고단한 사람들. 평생 하나님께 기도하고 사는데도 그 응답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걸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아주 잘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자녀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 중에 하나입니다. 아마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가 아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 문화적으로 볼 때 지금 보다 몇 배나 더 힘들고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시니 그냥 갈 곳도 묻지 않고 떠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 나타나셔서 자녀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75세의 나이는 인간적으로, 육체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실제로 아들 이삭을 낳은 것은 그로부터 25년 후였습니다.

말씀하시고도 그 약속을 이행하시지 않으시는 25년 동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만큼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잘 이해되지 않고 보이시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자랑하신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욥을 세상의 제일가는 부자로 세워주셔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줄로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무너졌을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시험 가운데 사랑하는 아내마저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만한 상황에서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그런 상황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하나님을 참 잘 믿었던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다윗에게도 하나님은 참 보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해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다윗의 일생 중 대부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응답하시지 안흐셨습니다. 숨어 계셨습니다. 그 때문에 다윗이 당한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도 보면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것은 지금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그냥 하나님의 얼굴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찾으라 하시고 종종 우리에게서 숨으십니다.

시편 13편도 보면 다윗의 시편인데 1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으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로 시작한 시편 13편에서 그는 이렇게 그 시편을 끝 맺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4편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시편 16편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상식적으로 이런 문장이 나오려면 그 앞 절에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건이 나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엄청난 간증과 고백이 나온 시편 16편 2절의 앞 절인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참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니 상황은 하나님이 지금 지켜 주지 않으시는 상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지금 다윗에게서 손을 떼고 계시는 상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본문 9절을 보니 이 시편을 쓸 때도 다윗의 삶은 힘들고 어렵고 곤고하고 답답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본문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이다.” 다윗에게는 그와 같은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자기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격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죽고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이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나를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그와 같은 믿음으로 현실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 27절 1절과 3절에서 정말 장부 같은 믿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자가 표호 하는 것과 같은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도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 하리도다.”

설교와 성경공부에 대하여 강의하시는 분들 중에 ‘귀납적’이라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귀납적 설교라는 말은 논리적인 설계와 설명이 분명하여 내린 결론에 대하여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으리만큼 설교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인 사고 틀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논리적인 것이 좋습니다. 당연스러운 일이지만 따라서 귀납적인 설교와 성경공부를 저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논리적으로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귀납적으로 설명이 다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논리와 귀납을 부정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인간의 논리로 모든 것을 다 귀납적으로 정리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논리와 이해를 벗어나는 영역의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의 축복을 말씀하신 후 25년 동안이나 기다리게 하셨는지를 모릅니다. 저는 왜 하나님이 다윗을 그처럼 오랫동안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셨는지를 모릅니다. 때문에 그에 대하여 귀납적으로 설명을 하거나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왜 하나님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신실한 교우들 중에 경제적으로 그토록 큰 어려움을 격게 하시는지를 모릅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핑계하고 둘러 댈 수는 있으나 설명할 수는 솔직히 없습니다. 왜 저는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는 부부에게 태를 열어 자식을 주시지 않으시는지를 모릅니다. 왜 그토록 간절하게 올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시간을 끄시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것에 대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고통과 다윗의 어려움은 이해할 수 없으나 다윗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의 결국과 결론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다윗과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는 없으나 믿음의 능력을 말씀드릴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의 어려움과 고난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여러분들에게 귀납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귀납적인 방법이 아닌 연역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때 왜 다윗에게,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때문에 설명할 수 없으나 결론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당신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하고 믿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승리하게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숨으신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렵고 답답한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인지는 다 이해할 수 없으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겠습니다. 귀납적으로는 모르겠으나 연역적으로는 알겠습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다리려고 하는 다윗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하나님을 믿어드릴 가장 적기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결국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오직 의인은(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끔씩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축복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을 때,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다윗처럼, 아브라함처럼, 욥처럼 끝까지 하나님 믿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아 다윗처럼, 아브라함처럼, 욥처럼 믿음의 승리를 낚아채는 믿음의 장부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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