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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짐을 내려 놓으라 (사 12:1-6, 골 3:12-17,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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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오늘 말씀 중에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17절 말씀은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여러분은 감사한 마음으로 시를 읊으십시오. 여러분은 감사한 마음으로 찬미 드리십시오. 여러분은 감사한 마음으로 신령한 노래를 부르십시오.

우리 성가대가 부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주일마다 안식일마다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마음을 다하여 부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 드리십시오. 주일마다 우리가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안식일의 축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찬양하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을 우리는 우리끼리도 드릴 수 있지만 이웃과 함께 드릴 수 있고 또 매년 한 번씩 주한 독일인 교인들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은 생활문화가 민족마다 있고 동네마다 있고 각 지역마다 있습니다.

모든 문화의 틀을 초월하여 믿는 자들이 갖는 공통의 문화 체계가 있습니다. 제가 감히 이 문화 체계를 안식의 문화 그렇게 이름 지어보겠습니다. 안식의 문화. 어느 문화권에도 똑같은 축복이자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날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온갖 지혜로 가르쳐짐이 있어야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마음을 다하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불러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안식의 문화. 안식의 삶. 안식의 생활방식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하되 여러분께서는 마음속으로부터 동정심이 넘쳐야 합니다. 마음속에 친절한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합니다. 마음이 온유해야 합니다. 오래 참음의 축복이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마음을 다하여 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마지막 골로새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고 마음속에 가장 깨끗하고 진실한 요소를 다해서 찬양하고 드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되 꼭 한 가지가 빠져서는 안 될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시도 찬미도 신령한 노래도 동정심도 친절함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이 뭐냐 하면 사랑은 모든 것들 묶는 띠와 같습니다. 시 따로 찬미 따로 노래 따로 친절함 따로 하라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묶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와 찬미와 찬양이 한쪽에 있고 사람끼리 모여서 인간들이 취할 수 있는 동정과 친절과 겸손함이 있지만 이 모든 요소들은 서로 끈으로 묶여있어야 구슬이 꿰어져 있어야 값지고 영광 받고 축복이 됩니다. 무엇이 이 모든 것을 엮는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오늘 골로새서의 내용 전부가 이렇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안식에 문화. 특별한 날에 안식의 예배를 드립니다. 묶읍시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우리가 해야 할 축복에 대한 감사를 묶어야 되겠는데 사랑으로 묶어야 됩니다. 사랑이 뭔지 아십니까? 사랑이 뭐냐고 질문이 나오면 요한1서 4장 8절과 16절을 한번 보십시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성경의 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사랑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냐고 묻지 마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한테 경험됩니까? 이렇게 물어야 옳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경험됩니다. 사랑이 뭐냐고 철학적인 이야기 신학적인 이야기 하지 마시구요.

사랑은 어떻게 오는지 사랑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얘기하시면 됩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을 묶습니다. 그래야 예배와 안식과 모든 문화와 삶이 복됩니다. 골로새서가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묶습니다. 그 사랑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사랑의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성령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끈이 여러분 모두를 묶어 줍니다. 성령이 주시는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받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친절하게 사는 사람은 내가 잘했다고 여기고 살지 마십시오.

항상 찬양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노래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시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곳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번 살아보십시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령은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 출발할 때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뭐란 얘기를 제가 이렇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분들이 누구냐고 묻지 않고 성부 하나님은 사랑이시랍니다. 성자 예수는 누굽니까? 성자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이시랍니다. 성령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희생의 사랑을 서로 묶어주는 연대시키는 사랑이랍니다. 하나님도 사랑이고 성자도 사랑이고 성령도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세분 하나님도 연결이 안 되고 하나님과 우리의 연결이 안 되고 우리끼리 연결도 안 된다.

사랑은 묶어줍니다. 사랑이 우리의 커다란 주제요, 우리 삶의 바탕이요, 우리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랑이 뭐냐고 묻는 대신에 사랑을 삽니다. 사랑을 살지 않고 어떻게 사랑을 얘기합니까? 하나님을 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이 누구라고 얘기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로 살지 않고 예수를 어떻게 믿습니까? 성령을 먹고 마시지 않고 어떻게 성령을 얘기합니까? 하나님은 먹고 마시는 겁니다. 예수도 먹고 마시는 겁니다. 성령도 먹고 마시는 겁니다. 신령한 방식으로 먹고 마십니다. 하나님을 묻지 마시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용납하고 하나님과 함께 즐깁시다. 십자가 그리스도를 함께 즐깁시다.

성령을 즐깁시다. 이렇게 고백하고 나면 오늘 마태복음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수고하고 무겁고 짐에 허덕이는 여러분 저한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의 짐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오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픔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끌어안느냐 하면 죽음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수고와 고통의 가장 최고의 적이 죽음이라는 적 일겁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사랑은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지 죽음을 버리거나 죽음을 멀리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죽음까지 오십시오. 물론 산 것도 오십시오. 오시면 내가 죽음이라 이름 하는 고통을 함께 끌어안고 내가 죽겠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그러면 죽음을 끌어안고 죽는지 알았더니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안식의 문화는 죽음을 끌어안고 죽으신 하나님이 살리는 영을 통해서 다시 부활 시켜서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사랑은 살립니다. 사랑은 죽음도 끌어안습니다.

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살립니다. 살리는 방식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살립니다. 여러분 그런 사랑을 경험 하셨습니까? 사랑하고 사는 사람. 사랑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둘이 있어야 사랑을 하지 혼자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저 혼자 있을 때 속에 있는 저와 겉에 있는 저가 사랑을 나눕니다. 둘이 있는 한, 공동체가 있는 한, 하나님과 피조물이 있는 한,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이 있는 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매어주고 우리 모두를 매어주신답니다. 뭐로 매어 주냐 하면 사랑으로 매여주십니다. 사랑을 삽시다. 사랑을 살아야 진실로 안식하는 날 행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안식은 사랑을 사는 날. 오늘 마태복음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랑하고 살면 쉼이 있습니다. 쉰다는 게 뭐냐 하면 쉼 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평화가 있습니다. 십자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진실로 쉬게 하십니다. 이 쉼을 여러분은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쉬면서 사십시다.

그런데 쉴 때 사랑하며 사십시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 보십시다. 그 속에서 부활이 용솟음쳐 나옵니다. 이 사실을 미리 감지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들이 믿는 하나님. 그분이 누구냐 하면 나의 힘. 사랑은 나의 힘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왜 예수가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갑니까? 너무나 약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죽음을 끌어안는 사랑을 보고 너무나 약하다고 했는데 부활을 본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죽음을 끌어안는 사랑은 부활을 만들어 놨습니다. 그리스도 나의 힘. 힘이 있어야 살지요.

힘이 있어야 사랑하지요. 하나님의 주신 사랑이 저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잘 아시는 데로 소크라테스가 죽으면서 내 영이 육에서 이제 해방한다. 그러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고 해방의 노래 그게 백조의 노래입니다.

희랍 사람의 전통가운데 백조의 노래가 유명한 노래가 됐습니다. 혼이 죽음을 떠나는 백조의 노래 말구요 살아있는 내 자신과 죽은 이후에 부활한 내 몸까지 함께하는 살아도 죽어도 또 살아도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쉼. 내 노래는 백조의 노래가 아니라 살아있는 노래입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 마지막입니다. 주님은 나의 죽음이 아니고 나의 멸망이 아니고 주님은 나의 구원 이십니다. 사랑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받는 자들이 즐기는 안식. 사랑하며 삽시다. 사랑 없이 구원이 불가능 합니다.

구원의 주님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자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신답니다. 그 사랑의 떡을 우리가 성만찬 떡으로 먹겠습니다. 그 사랑의 보혈을 우리가 포도주로 마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십시다. 그리고 다시 부활한 생명으로 기쁨을 누리며 살아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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