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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사람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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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곤경이라는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우리가 겪는 가장 큰 곤경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가난과 질병인가? 가난과 질병은 대표적인 것들일 뿐, 우리를 곤경에 빠트리는 것들은 수 없이 많다.

세상의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인간의 삶은 더 편리해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가 겪는 곤경은 더 많아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어려워져 가고 있다. 곤경이란 어렵고 딱한 형편이나 처지를 말한다.

영어에서는 곤경을 "막다른 골목"이나 "뜨거운 물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곤경에 빠져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고대 희랍의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구하였다.

즉 자신을 알려고 하는 지혜를 구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 "너 자신을 알라"는 하나의 명제를 던졌다. 14세기 후반에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명쾌한 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 답은 바로 인간이었다.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인간이었다. 20세기 초까지 이러한 사상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은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이상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곧 인간을 수단으로 하는 공산주의가 전 세계를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공산주의가 막을 내린 지금은 "힘 있는 자가 옳으며, 강한 자가 곧 법이다" 라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곤경은 힘이 없고 약하기 때문에, 또는 없어서 겪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국가나 개인이나 집단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이유는 우리의 능력과 판단, 지혜와 생각이 하나님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와 판단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 교만의 도구가 된다. 또한 이것은 위기와 난관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할 때 더 큰 위기를 가져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과 지혜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면 그 생각이 아무리 깊고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바로 곤경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 생각이 깊으면 깊을수록,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곤경에 빠지게 된다.

역대상 18장 6절에는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다윗은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하였다. 전쟁에서 계속되는 승리 가운데 사탄이 다윗을 범죄하도록 충동 질을 한다.

역대상 21장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게한다. 다윗은 계속되는 승리 가운데 "자신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잊어 버리고 만다.

삼상17:47절에서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막대기를 들고 나가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골리앗을 꾸짖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분명하게 체험했던 다윗도 군사력을 과시하고 막강한 군사력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잠시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생각과 지혜가 결국은 감당키 어려운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일로 인해 다윗은 세 가지 재앙 가운데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었다. 그 때 다윗이 뉘우치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곤경에 빠졌도다". 그리고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시 지혜를 짜내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제 내가 하나님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다윗은 곤경을 더 큰 곤경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곤경에 빠졌을 때 구원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올바른 판단과 뛰어난 지혜와 불굴의 용기와 과감한 결단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손에 벌 받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인간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을 때 가장 필요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생각과 지혜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교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 교훈의 대상은 2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세리들과 죄인들이 들으려고 나아왔다. 그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서로 수군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비유로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상에서 지혜롭고 능력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지혜와 실력이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둘째 아들을 통해서 스스로 지혜롭고 실력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꾀가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재산을 미리 챙겨서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하게 다 낭비하였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이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쓸려고 하는 계획을 갖고 있으니 재산을 미리 물려 달라고 했겠는가?

아마도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졸라 댔던가, 아니면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거창하게 늘어 놓으면서 그럴 듯하게 속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되도록이면 먼 나라로 갔다.

그는 자신이 현명하게 행동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자신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자신감이 그를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것인 줄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는 먼 나라에서 그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말았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 없앴다"고 하였다. 그가 물질을 다 허비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쩔 수 없이 기회가 좋질 않아서, 세상 말로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라는 말이다.

다 없앴다고 한 것은 고의적이고 적극적으로 물질을 낭비했다는 뜻이다. 그런 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비로소 그가 궁핍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궁핍해진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가 갖고 있던 생각과 지혜와 판단과 행동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곤경에 처한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살 궁리를 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들에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그의 생각과 판단이 더 큰 곤경을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성도 여러 분! 우리는 궁핍하게 될 때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궁핍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문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두 단계에 걸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첫 번째 단계는 궁핍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궁핍한 상태에서 아버지로부터 더 멀어져 갔다. 궁핍하다는 것은 이전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모면하려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찾아올 때 초반에는 생각이 깊어지고 염려와 근심을 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자신이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자기 자신을 의지한다. 이럴 때에 다윗처럼 즉시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며 복된 사람이다. 그러나 대 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간다.

앞으로 여러 분은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 고후1:9절에 사도 바울은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궁핍하게 되든, 곤경에 빠지게 되든, 어려움을 만나게 되든지,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이 실패한 사람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곤경에 빠졌을 때 우리 자신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판단과 지혜는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하는 것과 같다. 본문에 어떤 사람의 둘째 아들은 더 깊숙하게 수렁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들에 보내져서 돼지를 치는 자가 되었다.

그는 궁핍한 정도보다 더 비참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그것 마저 주는 사람이 없어서 주리게 된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신의 의를 내 세우고,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내 세우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자신의 판단을 믿는 한 첫 번째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께로 결코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4절에 둘째 아들이 궁핍할 때 그 나라 백성중의 한 사람에게 붙여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누구든지 어려울 때 이런 사람을 만나면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회"가 우연히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의 삶을 크게 진전시켜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길이 환하게 열리거나, 생각지도 않은 때에 한 몫 잡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회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우리의 최악의 환경이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기회이다". 이러한 원리는 사도 바울의 삶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바울은 고후1:8절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이 매우 힘든 곤경에 처했을 때를 말해주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려운 곤경 속에서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여러 분의 삶을 돌아볼 때, 여러 분은 하나님께서 여러 분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실 수 있는 기회들을 곧 알아보는가? 그것은 마음에 상처를 당하였거나 큰 손실을 입었을 때일 수도 있다.

친구가 다 떠났을 때일 수도 있다. 갑작스런 슬픔을 당했을 때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모든 희망을 포기한 때일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기회이다.

이럴 때 여러 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날 기회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께서 여러 분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실 것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돼지가 먹는 것으로도 먹지 못하고 주리게 되었다. 주리는 것은 조만간에 음식을 먹든가 아니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주리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궁핍할 때, 다시 말하면 조금이라도 힘이 남았을 때는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궁핍할 때, 이 때는 아직도 옛 사람의 속성과, 육신의 생각과, 세상적인 지혜에 사로 잡혀 있는 때이다. 그러나 주리게 될 때, 돼지의 먹는 것으로도 배를 채우지 못할 때, 이 의미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것들은 아무 것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주리기 전에 궁핍하다고 느낄 때 빨리 하나님께 돌아 가야 한다. 멀리 떠나서 방탕했던 아들일지라도 그를 위하여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며 잔치를 벌이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상에서 자기 꾀를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아들이 돌아 오기 까지 먼 길을 나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 가운데 여기 또 한 사람의 어떤 사람이 있다. 둘째 아들이 멀리 떠나 머무르던 나라의 백성들 중 한 사람이었다.

둘째 아들은 이 사람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친 아버지보다 더 인자하고, 사랑이 많으며, 더 풍족한 사람이어서 자신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친 아버지처럼 목을 끌어안지도 않았고, 입을 맞추지도 않았으며, 잔치를 벌이지도 않았다. 이 아들은 자신이 제발로 걸어 갔는데도 더 이상 자신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의지, 자신의 꿈과는 관계없이 돼지를 치기 위해 들로 내 보내어 졌다. 그는 잠잘 곳도 없어 졌고 먹을 것마저도 없었다. 돼지 주인은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 아들이 죽든지 살든지 관심없고 일만 시키려던 것이었다. 일도 가장 더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가장 더럽고 힘든 일을 시키면서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 얼마나 악한 사람인가?

돼지 치는 일이 가장 더럽다는 것은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 이 악한 존재가 바로 사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저 버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을 때 겪는 결과이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 악한 주인에게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었는가?

단순하게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고, 이제 그만 하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빠져 나온 것이 아니다. 본문 18-19절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잘못을 뉘우쳤을 때 아버지는 그의 아들된 신분을 보장해주었다.

그래서 그 악한 주인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다. 성도 여러 분! 여러 분은 어려움을 겪을 때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여러 분에게도 방법은 똑같다. 여러 분의 지혜는 더 큰 어려움으로 끌고 갈 것이다.

뉘우치고 회개하며 수시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욥이 겪은 일에 대해서 곤경이라고 하였다. 욥기 42:10절에는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고 하였다.

우리의 곤경을 돌이켜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참 아버지이시며 영원하신 이버지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신명기 6:5절에서 명령하셨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화와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 지금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사랑하라는 뜻이다. 에레미야32:41절에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문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오길 바라며 먼길까지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항상 우리를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먼길까지 마중 나오시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어서 쓰러지거나 절망하여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어두운 밤에 표류하는 배가 등대의 불빛을 보고 방향을 잡는 것처럼 하나님을 소망하며 삶의 분명한 방향을 위해 먼길까지 나와 계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상황이 아무리 비참해도 하나님을 향해 가려고 하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 나와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 분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내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 그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시기 바란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이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함으로 예배하는 이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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