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스승주일] 해산의 수고를 할찌라도 (갈 4:12-20)

  • 잡초 잡초
  • 402
  • 0

첨부 1


해산의 수고를 할찌라도 . 갈4:12-20

올해로 스승의 날이 26번째를 맞이했습니다. 과거에는 '스승'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존경심이 우러났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는 감히 밟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스승이라는 말이 사라져 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스승의 날을 폐지하자'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에 있습니다. 이런 찹찹한 심정을 가지고 저도 한 시대를 교육을 담당하는 지도자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지키며 특히 교회에 수고하시는 교사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격려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얼마 전에 신문기사에 실린 글을 보니까 오늘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에 대한 위상에 위기감을 느끼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활지도부 교사 426명의 대답 중에서 학생들로부터 신체적인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3.8%가 말했습니다. 욕설과 폭언은 114명 26%, 폭행을 하겠다는 위협은 76명, 학교에 세워둔 자동차등이 파손된 교사는 189명 40%이며, 학교 홈페이지에 인신 공격적인 글을 올려서 피해를 본 교사는 모두 187명 43%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이밖에 학교 건물 벽에 선생님에 대한 욕설과 험담이 적혀있는 교사는 228명 54%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교권의 추락이 심각한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는 세태, 학생이 선생님을 구타하고 욕하며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육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갈 때까지 갔으며, 타락 할 대로 타락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른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며, 자녀가 부모를 모르면 자녀가 아닙니다. 학생이 스승을 모르면 학생이 아닙니다. 옛적에 성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석자 물러서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것이 제자의 도리라고 하셨습니다.

스승의 날에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실추된 선생님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고 긍지를 갖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 년 간, 우리의 선생님들은 촌지 추방이라는 명목 때문에 이 나라의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할 분들이 개혁의 대상이 되어 정부가 앞장서서 교사의 권위와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범죄자 취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스승을 존경하겠습니까? 스승의 날에 학교는 텅텅 비었습니다. 선생님 한 분의 인터뷰 내용 중 그는 "스승의 날에도 한번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촌지 소리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학교 선생님들의 좌절과 울분과 무기력에서 벗어나도록 해야하며, 명예회복을 해야 하는 정책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이 없는 사회는 교육에 미래가 없는 사회입니다. 진정한 교육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학생들에게 예의 바른 인간을 양육하는 것과 어른 공경하는 도리를 바르게 가르치는 일과 선과 악의 구별과 판단의 표준을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안 되는 교육은 실패한 교육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무엇이라 해도 스승 한 사람의 영향력은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의 삶 전체를 바꾸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이 강당에서 이야기 드렸지만, 저 역시 대학입시를 준비하다 더 이상 공부 할 수 없는 감수성 예민한 고3 시절,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 서 있는 사북에 있는 한 탄광촌으로 직장을 구해 내려갈 때 저의 담임이셨던 조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지금의 우리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살라"시며, 어린 나이에 탄광으로 가는 제자가 안쓰러웠던지 한참이나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 선생님이 제가 졸업한지 30년이 지난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보내 오셨습니다. 그 당시 영등포 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셨는데 "단기집문" 이라는 글을 보내 오셨습니다. 30년이 자난 세월 동안 숱한 제자들이 있었을 텐데 저를 기억하시고 글을 보내신 것입니다. '단기집문'이란 글의 뜻은 '비록 너의 처지가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용기를 갖고, 최선을 다하면, 네가 목표한 일에 집중하면, 그 고통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아픔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때가 되면 반드시 문이 열린다'는 내용입니다. 참 이 글을 받는 순간 왜 그렇게 마음이 뭉쿨한지 한 동안 고3때의 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더라구요.

이 시간 저는 한 세대를 참 멋지게 스승으로 살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다 버렸지만 참 행복한 사나이였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구원의 감격은, 그의 생을 온통 바꾸어 놓은 일대 혁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행복이란 결코 세상이 추구하는 것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주님이 이 땅에 머무시면서 하셨던 사람 세우는 일에 그 역시 인생을 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가 처음 이 갈라디아 지역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그는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의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 바울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강력한 지도자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번 결심하면 앞만 보고 전진하는 유형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바울에게도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바울에게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질병인지는 잘 모릅니다. 이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빛을 보고 실명했을 때, 비록 그 다음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안질 비슷한 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밤빌리아 연안의 늪지에서 전도를 할 때 아마 그때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그 후유증으로 고질병을 알지 않았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바울에게 간질이 있었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도 합니다. 성경에는 어떤 병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병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때문에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었고 또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을 거절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바울의 약함을 감싸주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 줄만큼 바울을 사랑하는, 어떻게 보면 사제지간의 사랑이 담뿍 담긴 아름다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다음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간사한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2,3년 후 이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이 아닌 거짓진리를 가지고 들어와 대 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아픔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사제지간의 사랑이 넘쳤던 교회, 가르침의 열정 앞에 단순히 배우는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던 교회가 이젠 변질된 타락의 길로 가게 될 때 가르치는 자의 그 고통을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얼마나 통증이 컸으면, 그는 갈 3:3절에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이 가르쳤던, 성도들이 하나 둘 진리에서 떠나고, 변질되어 가는 안타까움 앞에 그 상황을 바라보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찹찹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기 19-20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 중에 여러 가지 고통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큰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곧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이 계신데 이 분들을 보면 '참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임신을 하게되면 입덧이 심한 사람은 제대로 먹질 못해 눈도 안보이고 마비까지 오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화장품도 바르질 못하고, 심지어 세수 비누로 세수도 못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정점은 역시 출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산모가 아기를 낳으려고 분만실에 들어가면서 신을 벗을 때 '이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생명을 탄생하는 과정이 그 만큼 위험스럽고 또한 고통이 심하다는 말입니다. 네! 한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눈물을 쏟고 땀을 쏟고 피를 쏟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저희 성도 한 분이 진통은 오는데 아이가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심방을 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야! 이 새끼야! 왜 나를 이렇게 고생시켜!" 얼마나 그 소리가 큰지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저 보고하는 소리인 줄 알고 깜짝 놀랬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우시고 조용한 분이신데 자신의 이성을 잃을 만큼 그 고통이 심했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되도록이면 분만하는데는 안 갈려고 합니다. 이렇게 한 생명을 세상에 출생시키는데는 큰 해산의 수고가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는 무너진 공동체를 일으키기 위해 변질된 사람을 세우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승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스승이 제자들에게 끼칠 가장 위대한 영향력입니다. 절대 포기 할 수 없는, 심지어 자신이 잘못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다시 세우겠다는 거룩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이 시간, 여기 모인 교사 여러분들, 그리고 또 사회의 한 복판에서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면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이든지 관계된 자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산의 수고', 그것은 생명을 내 놓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자녀 하나 출산하는데도 그렇게 많은 고생과 어려움이 따른다면 죄와 마귀에게 사로잡힌 영혼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구원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따르겠습니까? 요즘 우리가 사는 교권이 무너지고 이젠 스승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렇게 강단에서 스승에 대해 외쳐도 현실의 벽 앞에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그래도 보람을 가지고 교단에 서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 일을 천직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사건들이 자고 나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도 때묻지 않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집단적으로 성폭행을 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할 소리다 하는 세상을 보면, 숨이 콱콱 막히는 심정이라는 것 여러분도 다 경험하실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정말 어둡습니다. 사탄이 정말 제 철을 만난 듯 날 뛰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 마당 한 구석에 주인댁이 닭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남의 닭이지만, 커가는 녀석들의 모습이 대견해서 배추 잎사귀도 주워오고 아카시아 잎도 다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닭을 들여다보는 순간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하얀 닭 한 마리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채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닭은 수탉이었는데 꽤 큰놈이었습니다. 닭장 안에 닭이 왜 옆구리가 그렇게 상했는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안 사실은 닭장 속에 쥐가 들어가자고 있는 닭의 날개 속에 들어가서 살을 마구 물어뜯어서 파헤쳐 놓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쥐가 그렇게 물어뜯는 동안에 닭은 감각도 없었는지 가만히 앉아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입니다. 닭장에 쥐가 들어 올 만한 구멍을 모두 막아버리고 나서야 닭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의 길이신 그리스도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버려진 영혼들의 상태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사람을 세우는 스승은 단지 자기에게 보내진 영혼들에게 고급지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스승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한 영혼이라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의 자리는 해산의 수고의 과정이 없이는 그 제자들이 바로 설 수 없기에 야고보도 약3;1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선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요즘 가슴 아픈 것이 하나있습니다. 학교 교사들이 노조를 만들어 자신들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교육대학원에 다닐 때 저희과정에 전교조에 가입한 분이 계셔서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자식을 둔 가장으로서, 또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왜 교사가 노동자입니까? 그렇게 자신이 없으십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권익을 유지해야합니까? 교사는, 스승은 단지 강단에서 잘 포장된 지식 보따리를 풀어 장사하는 고급 기술자들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세우는 수고의 그 가치를 알고 감당한다면, 이 스승처럼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아픔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스승의 자리는 외롭고 힘든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 수고에는 값진 열매가 따라 옵니다.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는 적당히가 없습니다. 산모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세우는 그 일 역시 해산의 수고가 아니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교사로 모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그 일에 내 인생을 드릴 때 세상이 뭐래도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 된다면, 물러서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 학교 교사로 몸담고 있는 선생님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소위 교회 3D 직종에 있습니다. 아이들 다루기 어렵고, 힘들죠. 때로는 변화 될 것 같지 않는 저들의 모습 앞에 괜한 고생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후회감도 있을 것입니다.

어제 교회학교 부장 장로님이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챙기느라 토요일 날 교회 나온 모습을 보고, 저런 사랑의 모습 앞에 우리 아이들이 오늘 스승의 날이라고 그 수고를 알고 꽃 한 송이라도 준비를 햇는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지면 못해요. 교사는 미쳐야 되요. 언젠가 또 하나의 열매가 내가 가르친 아이들 가운데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더 열정을 가지고 미쳐야 되빈다. 예수님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들었습니다. 전부 거꾸로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에서 똑바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십시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오직 바로만 미치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정말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최고 학부를 졸업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거지처럼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 아니었겠습니까?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쫓겨나기도 수없이 했습니다. 죄수도 아닌데, 착고에 매여 감옥에 갇힌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해산의 수고에 인생을 겁니다. 이는 승산 있는, 반드시 열매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역시 바울처럼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젊은이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미스터 홀랜드 오퍼스(Mr. Holland oppu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석하면 '홀랜드 선생님의 교향곡'입니다. 글렌 홀랜드의 실화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홀랜드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여 유명한 교향곡을 작곡하여 이름을 날리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했고 가족들을 부양해야했기에, 조그마한 시골 학교에서 잠시 위기만을 넘기려고 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만 30년 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재정문제가 생겨서 학교를 떠나야만 되게 되었습니다. 지난 온 날들을 돌아보니 꿈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브로드웨이에 가서 훌륭한 교향곡을 작곡하여 심포니를 연주해서 유명해지고자 하는 꿈도 이루지 못했고,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청각 장애인이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주름진 이마와 초라한 퇴임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를 걸어 나가는데, 강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강당으로 뛰어가 봅니다. 가서 보니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홀랜드가 감격해 있을 때, 무대 휘장이 걷히며 제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홀랜드에게 지휘봉이 넘겨졌습니다. 선생님이 연주를 인도합니다. 맨 앞자리에는 클라리넷을 연주하지 못해서 좌절했던 학생이 앉아있습니다. 이 학생은 홀랜드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으로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직 주지사로서 있을 만큼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난 다음에 주지사인 제자는 인사말을 합니다. "홀랜드 선생님은 저와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혹시 후회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부와 명예를 안겨줄 심포니 작곡을 하셨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부자도 아니고, 이곳에서만 유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홀랜드 선생님은 부와 명예를 초월한 성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선생님께 영향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선생님의 심포니입니다. 우리가 선생님 작품의 음표이자 음악인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오늘 나는 선생님이 작곡하신 심포니의 음표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음표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음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저 사람은 오늘 내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포기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사역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 이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포기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동의를 구하십시오. 여러분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일이 이뤄지도록 도와주기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분명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도, 정의도 거대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채 방황하는 한 복판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스승들이십니다. 삯꾼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양 떼를 위하여 생명을 거는 일이 없지만 선한 목자는 언제나 그 일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걸고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가치는 양 떼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멀리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학교에서 땀흘리시는 교사들을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우리에게 말씀으로 섬기는 목장지기, 또 경로대학이나, 실로암 대학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사회 각지에서 교사로서 교수로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스승!! 그들은 해산의 수고를 위해 이 땅에 부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