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17)

  • 잡초 잡초
  • 566
  • 0

첨부 1



오늘은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과 복음을 믿는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는 복음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하는데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사자가 말한 구주 탄생을 알리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복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 이루신 대속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이 복음인 이유는, 구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 누리게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만일 지혜롭고 능력이 있는 사람만 복음을 받을 수 있다면 복음을 복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나 이 복음을 믿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그런 염려를 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던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복음의 진리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로마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이유 곧 복음을 그토록 자랑했던 이유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피차 은혜를 받으려 합니다.

첫 번째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함은 달리 말하면 “내가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표현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 당시에 복음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도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복음은 세상 사람들의 호감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조롱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복음을 미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기독교인들을 욕하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교회가 비리를 저지르거나 기독교인들이 악행을 한다거나 해서 비난을 받는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런 일이 없는데도 세상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비난하기를 마지않습니다. 이는 사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심했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현대도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하지만, 민주국가에서는 국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적대행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 시대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가 국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도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혐오스럽게 여기고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복음에 대하여 보인 반응은 한마디로 불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비위에 거슬렸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시고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세계를 통치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가난하였고, 배움이 적었고,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한 때 그가 병자들을 고치고, 대단한 기적을 행하고, 은혜로운 가르침을 베풀었을지 몰라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힘없이, 항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지 않는가.

더구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런 예수를 장사 된 지 삼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였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독생자요 인류의 구세주라고 전파하니 유대인들로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당시 헬라인들은 복음을 어리석게 여겼습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사랑하고 학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볼 때,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오늘날도 공부를 많이 해서 학식이 있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복음을 어리석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기적, 천국과 지옥, 하나님, 최후의 심판 등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과학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과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이 그런 내용을 믿다니 너무나 순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복음은 철학이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철학이나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무슨 이론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사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그 분이 한 말이 무엇이며, 그 분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복음서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 들은 바를 사실대로 증언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들이 증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증인은 자기의 증거하는 말에 대하여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증인이 아니고 가짜 증인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을 위해서 자기들의 피로써 보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순교로써 그들의 증언이 진실함을 입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간의 지혜와 학식을 내세우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더러 지혜를 내세우려거든 차라리 미련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

우리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는 물론이고 로마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탁월한 지성인이었습니다. 그 역시 처음에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아니 부끄럽게 여긴 정도가 아니라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색출해서 감옥에 가두는 일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그랬던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죽이려고 하는 무리 앞에서 행한 연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가 회심하게 된 한 사건에 대하여 간증합니다.

“형제들과 선배 여러분, 내가 이제 여러분 앞에서 나 자신에 관하여 해명을 해 드리겠으니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군중은 바울이 히브리말로 말하자 더 조용해졌습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유다인입니다. 나기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났지만 이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교법사 가말리엘에게서 우리 조상이 전해 준 율법에 대해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공경하던 열성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의 열성에 결코 못지않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잡아 감옥에 처넣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이 예수교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대제사장과 공회가 증명해 줄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로부터 다메섹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벌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날, 길을 가다가 오정 때쯤에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나타나 우리 주위에 두루 비쳤습니다. 내가 땅에 거꾸러져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 왔습니다. 그 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신 분의 음성은 듣지 못했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었더니 '일어나서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거기에 가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못 보게 되어 같이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으로서 거기 사는 모든 유다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찾아 와 곁에 서서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이 띄어 그를 보았습니다.

그때 아나니아가 말하기를 '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은 무슨 철학의 개념을 깨달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영광중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2천년 교회사를 살펴보면, 불신 세상이 복음을 지지하거나 교회를 좋아한 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첫째 이유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우주의 근원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고상한 것을 생각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철학이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가 나타나서 다양한 종류의 철학을 제시했지만, 인생과 우주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철학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철학적인 사고방식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꾼 노릇을 합니다. 그 이유는, 철학은 인간의 지혜를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이성을 중시하므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못지않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습니다. 철학이 나쁜 것이 아니라, 철학의 방법으로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철학의 세계가 있고, 복음은 복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둘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철학은 이 세상의 지혜를 다루지만, 복음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다룹니다.

무엇보다도 철학은 죄에 관해서 다루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고상한 사유의 세계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지혜로운 자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를 다룹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해 줍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누구나 죄를 지적받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은 철학이 하지 못하는 죄를 지적할 뿐 아니라 죄를 해결해 줍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단지 그가 복음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거나 복음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주관적인 느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내놓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구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이란 용어는 생명을 구하는 것, 살려내는 것을 말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나, 불타는 집에 갇힌 사람을 구해내는 것, 또는 불치의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처럼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므로 구원은 결코 부끄러운 것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물에 빠진 사람이나 불타는 집에 갇힌 사람이나 병에 걸린 사람을 살려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1) 구원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주님의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죄책에서 해방되고, 정죄 의식으로부터 놓여납니다.

2) 구원은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이전의 우리의 상태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에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3) 구원은 우리를 죄의 오염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언제나 죄의 오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죄의 오염은 밖에서 우리에게 미치기도 하지만 우리 마음의 부패로부터 비롯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감으로 죄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4)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과 불화하고 원수 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5) 구원은 영생의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구원을 온전히 받은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때 받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이 궁극적인 구원 곧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믿는 우리에게 위대한 구원을 가져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므로, 구원의 방법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나 미련하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한이 없으시므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나고 똑똑하고 지혜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져서 복음을 믿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이 복음의 가치나 능력을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므로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미련한 것이라고 비난할지라도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 번째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인은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죄인이 무슨 수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의로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증거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한번은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 때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보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은 그의 의로운 행실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더니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 역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으나, 우리에게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사실을 내세우고 선민의 표식인 할례를 받은 것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자랑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은 복음을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볼 때에는 부끄럽고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나사렛 예수 한 분만이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이 결코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 아무리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고 조롱하고 비방할지라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성도들은 복음을 자랑하고 복음을 순종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 대한 이 위대한 선언이 저와 성도님들의 진심어린 신앙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